프롤로그

도착하지 못한 마음은 어디로 가는가

by 권화린
우리의 모든 탐험의 끝은
처음 떠났던 그곳에 도착하여,
그곳을 처음으로 알게 되는 것이다.
- T.S 엘리엇


이 문장을 처음 마주했을 때, 나는 내가 지나온 시간을 길게 늘어진 하나의 직선으로 떠올렸다. 내 인생은 언제나 어딘가를 향해 이동 중인 상태였다. 멈추면 낙오될 것 같은 두려움, 어딘가에 도달해야만 비로소 의미가 생길 것 같은 조급함. 목적지는 늘 선명했지만, 이상하게도 내가 발을 딛고 서 있는 '지금'은 한 번도 나의 장소가 되어주지 못했다.


나는 늘 다음 페이지를 향해 달렸다. 더 잘 해내야 했고, 기어이 버텨야 했으며, 타인의 리듬에 나를 깎아 맞춰야 했다. 그렇게 숨 가쁘게 도착한 곳마다 또 다른 출발선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삶은 늘 예고편 같았고, 진짜 본편은 영영 오지 않을 것처럼 느껴졌다. 그때는 몰랐다. 내가 느끼던 허기가 성취의 부족이 아니라, 온전히 머물 수 있는 단 한 평의 공간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어린 시절부터 내 인생에 '내 방'은 존재하지 않는 단어였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좁은 단칸방에서 세 식구가 숨을 몰아쉬던 시절을 지나 15평 임대아파트로 이사했을 때도 풍경은 다르지 않았다. 방이 두 개로 늘어났지만, 독립된 방 하나는 '사내아이'라는 이유로 당연하게 남동생의 몫이 되었다. 나는 늘 엄마와 같은 공기를 나눠 마시며, 불편하다는 말 대신 '괜찮다'는 말로 나 자신을 먼저 설득하는 법을 배웠다.


결혼을 하고 아이가 태어나서 집 안의 모든 공간은 가족의 공동 영역이었고, 아이의 놀이터였으며, 언제든 타인에게 열려 있어야 하는 무대였다. 이름 대신 아내로, 엄마로, 딸로 불리는 동안 나의 자리는 지워졌다. 잠시 혼자 있고 싶다는 갈망조차 이기적인 사치처럼 느껴져 마음 한구석에 욱여넣었다. 그렇게 나는 긴 시간을 온전히 나로 머물 수 있는 방 한 칸 없이 떠돌았다.


서른셋, 이혼을 했다. 짐을 싸서 돌아간 곳은 다시 엄마의 오래된 집이었다. 그것은 금의환향이 아니라 갈 곳 없는 영혼의 고육지책이었다. 동생의 타지생활로 인해 비어있던 좁은 방에 아이와 둘이 침대 하나를 겨우 나눠 썼다. 그곳에서 나는 다시 딸이 되었지만, 여전히 타인의 눈치를 살피는 임시 거주자였다. 고맙다는 말과 미안하다는 마음이 하루의 기본값이 되어버린 집에서 마음을 놓는 일은 끝내 허락되지 않았다. 그 시간은 회복이라기보다, 차가운 바닥에서 맨몸으로 견뎌내는 버팀에 가까웠다.


진짜 해방은 그 집을 나설 때 찾아왔다. 이혼 후 2년이 흐른 서른다섯의 어느 날, 아이와 나 단둘이 살 작은 전셋집을 얻었다. 생애 처음으로 내 방문에 손잡이를 잡던 그 순간의 촉감을 잊지 못한다. 문을 닫고 불을 켰을 때, 정적 속에서 나는 비로소 깨달았다. 해방이란 대단한 자유가 아니라, 더 이상 누군가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는 '고요'라는 것을. 그 작은 방 한 칸은 나에게 처음으로 허락된 영토였고, 35년 만에 나를 나에게 돌려보낸 유일한 장소였다.


그 고요 속에 앉아 비로소 알게 되었다. 나는 늘 도착하지 못한 미래를 꿈꾸느라, 이미 내가 기어이 살아낸 시간들을 한 번도 제대로 바라보지 않았다는 것을. 멀리 가야만 삶이 완성된다고 믿었지만, 사실 내가 도착해야 할 곳은 미래의 화려한 성채가 아니라, 방 한 칸 없던 서러움과 눈치 보며 견뎌온 지난날의 어둠, 그 모든 조각을 품고 있는 바로 '지금의 나'였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 캄캄했던 시간들은 버려야 할 흔적이 아니었다. 오히려 나를 여기까지 데려다준 정직한 발자국들이었다. 이제 나는 더 이상 나를 바꾸겠다고 다짐하지 않으려 한다. 대신, 아무것도 없던 방에서조차 기어이 삶을 이어왔던 나의 미완성된 시간들을 온 마음으로 존중해 보려 한다.


만약 당신의 삶이 여전히 춥고 미완처럼 느껴진다면, 나는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당신은 아직 도착하지 못한 사람이 아니라, 그 어둠 속에서도 수많은 마침표를 찍으며 이미 여러 번 도착해 온 사람이라고. 우리가 그토록 찾아 헤매던 목적지는 사실 우리가 외면하고 싶었던 그 아픈 출발점과 같은 자리에 있었음을, 이제야 다정하게 알아차린 것뿐이라고.


방이 없던 시간도, 방을 찾기 위해 헤맨 시간도,

그리고 비로소 문을 닫고 혼자만의 고요함 속에 머무는 이 순간도.

나의 생은 그 모든 어둠과 빛을 합쳐 이제야 비로소 더할 나위 없다.


일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