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언제부터 역할로 살기 시작했을까
어느 순간부터 나는 정해진 루틴대로 자동화되어 있는 나를 발견했다. 아니, 정확히는 의식하기 시작했다. 정교하게 설계된 AI 자동화 시스템처럼 '엄마', '직원', '책임자', '어른' 같은 단어들로 나의 정체성을 단정 짓고, 주어진 알고리즘에 따라 역할을 수행해 나가고 있었다.
그 단어들은 참 편리했다. 나라는 복잡한 우주를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아도 되었고, 무엇이 옳고 그른지 판단해야 할 때 명쾌한 기준을 대신 만들어주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편리함은 공짜가 아니었다. 역할은 언제나 가혹한 요구를 동반했다. 잘해야 했고, 버텨야 했으며, 누구도 실망하게 해서는 안 된다는 보이지 않는 계약서에 서명한 기분이었다.
우리는 언제부터 역할로 살기 시작했을까? 아마도 아주 자연스럽게 폐부에 스며드는 안개처럼 거의 의식하지 못한 채였을 것이다. 어릴 적 내가 꿈꾸던 어른이란 '선택의 자유'를 마음껏 누리는 존재였다. 하지만 막상 마주한 어른의 실체는 자유의 확대가 아니라, 역할을 하나씩 기꺼이 떠안는 과정에 가까웠다.
학생이라는 신분이 끝나자 직장인이라는 명찰이 붙었고, '나'로 존재하기도 전에 누군가를 돌봐야 하는 보호자가 되었다. 그렇게 나를 우선하려던 시간은 늘 '나중에'라는 이름의 서랍 속으로 밀어 넣었다. 하지만 그 서랍은 좀처럼 열리지 않았다. '나중에'는 생각보다 쉽게 오지 않았고, 설령 시간이 생겨도 그 시간을 어떻게 써야 할지 모르는 지경에 이르렀다.
역할은 우리를 사회라는 거대한 기계 안에 안전하게 편입시킨다. 톱니바퀴가 되어 맞물려 돌아가는 순간, 우리는 소속감이라는 안온함을 얻는다. 그러나 동시에 역할은 우리에게서 질문을 뺏어간다.
학창 시절 윤리 교과서에서 만난 그 하나의 질문, '나는 누구인가?'라는 근원적인 질문을 20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낡은 서랍 속에서 꺼내보았다. 이 질문은 점차 '내가 살아야 할 의미는 무엇인가?', '나는 왜 존재하는가'로 세분화되어간다. 그러다 결국 도달하는 곳은 역시나 '이 상황에서 내가 해야 할 기능은 무엇인가?'라는 효율적인 판단이 앞서기 시작한다. 그 찰나의 전환점에서 우리는 '존재'가 아니라 '기능'으로 자신을 인식한다. 내가 아파도 기계는 돌아가야 하고, 내가 슬퍼도 역할은 수행되어야 하기에.
나는 오랫동안 내가 꽤 성실한 사람이라고 믿어왔다. 맡은 바 책임을 다하며, 맡겨진 임무 수행에만 몰두하며 끝까지 해내고야 말았다. 주변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삶. 그것이 훌륭한 삶의 척도라고 굳게 믿었다. 하지만 차가운 밤공기 속에 홀로 남겨졌을 때 깨달았다. 그것은 건강한 성실함이 아니라, 벼랑 끝에서 밀려나지 않으려는 몸부림에 가까웠다는 것을.
제 역할을 하지 못했을 때 돌아올 타인의 서늘한 평가, 나에게 의지하는 이들의 실망 섞인 눈빛, 그리고 무능한 낙오자로 분류될 때의 그 정적. 나는 그 침묵이 두려웠다. 그래서 더 애썼고, 더 참았고, 더 나를 뒤로 미뤘다. 아이러니하게도 역할에 충실할수록, 사회적 기능에 완벽히 몰입을 할수록 나는 소멸되어만 갔다.
왜 두려움은 늘 성실함으로 위장될까?
어릴 적부터 우리는 성실함을 최고의 미덕이라 배웠다. 하지만 그 성실함의 겹겹을 들여다보면 종종 낯선 얼굴이 숨어있다. 그것은 단단한 책임감이 아니라, 부서지기 쉬운 불안이다. '여기서 멈추면 다 무너질 것 같아서', '부족한 사람으로 보이고 싶지 않아서', '내가 없어도 세상이 잘 돌아간다는 사실을 마주할 용기가 없어서' 두려움이란 감정은 결코 있는 그대로의 실체를 드러내지 않는다. 항상 열정, 책임, 배려 같은 근사한 옷으로 위장하여 우리를 속인다. 나는 성실함이라는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옷을 입고 살았다. 늘 내가 한 발 더 움직였고, 늘 입술을 깨물며 버텼으며, 늘 괜찮은 사람의 가면을 고쳐 썼다. 그러면 아무도 나를 의심하지 않기 때문이다.
성실한 사람은 이 사회에서 쉽게 비난받지 않는다. 도리어 칭찬과 훈장을 받는다. 그래서 우리는 두려움을 들키지 않기 위해 스스로에게 더 열심히 살라고, 조금 더 버티라고 채찍질을 멈추지 않는다. 어쩌면 그것은 잘 살아내기 위한 능동적인 노력이 아니라, 빠져나올 틈을 주지 않는 불안으로부터 도망치려는 처절한 몸부림이었을지도 모른다. 성실함은 선택이 아니라 '방어'가 되었고, 삶은 항해가 아니라 현상 '유지'가 되어버렸다.
비극은 우리가 역할을 잘 수행하면 할수록 가속화된다. 역할은 결코 '충분함'에 안주하지 않는다. 9개를 잘해도 남은 1개를 더 잘하길 요구하고, 어제만큼 버텼다면 오늘 조금 더 견디길 강요한다. 효율의 세계에서 나의 감정은 사소한 노이즈가 되고, 나의 고유한 생각은 사치가 된다.
"지금 이런 감정에 빠져 있을 때가 아니잖아!" 이 말은 지난 세월 동안 내가 나 자신에게 던진 가장 가혹한 경고였다. 눈물이 차오를 때, 문득 허무가 몰려올 때, 나는 이 말로 내 존재의 입을 틀어막았다.
문제는 역할 그 자체가 아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고, 누군가의 부모이자 동료로 살아가는 것은 분명 가치 있는 일이다. 진짜 문제는 '역할이 나를 전부 설명해 버릴 때' 발생한다. 엄마이기 이전에 나는 어떤 색깔을 좋아하던 사람이었는지, 직원이라는 이름 뒤에 숨겨진 나는 무엇을 갈망하고 무엇에 분노하던 사람이었는지. 그 질문을 더 이상 하지 않게 될 때, 우리는 비로소 길을 잃는다. 내가 누구인지 잊은 채로 목적지 없이 달리는 기관차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나를 잃어버렸다는 감각은 천둥번개처럼 요란하게 오지 않는다. 그것은 아주 사소하고 조용한 순간들에 스며든다. 지독하게 바빴던 하루 끝에 퇴근하여 불 꺼진 거실에 앉았을 때, 누군가 "요즘 너는 좀 어때?"라고 물었으나 도무지 할 말을 찾지 못해 입술만 달싹일 때, 남들이 보기엔 충분히 행복해 보이는 조건 속에서도 가슴 한구석이 서늘하게 비어 있을 때. 그 모든 신호는 내 안에서 같은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나는 지금 내 삶의 현장에 있지만 정작 나 자신에게는 없다."
나는 이제야 안다. 우리가 역할로 살기 시작한 결정적인 순간은 사회에 첫발을 내디딘 날이 아니다. '내 안의 목소리보다 타인의 기대를 우선하기로 선택한 그 첫 순간'이었다는 것을. 그리고 그 결정은 대부분 너무 일찍, 너무 조용히,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이루어져 버린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나는 여전히 수많은 역할의 그물망 속에 있다. 당장 이 옷들을 다 벗어던질 용기는 아직 부족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하나만은 끝까지 되찾으려 한다. 내 삶을 '설명'당하는 객체가 아니라, 내 삶에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는 주체로 남는 것.
어쩌면 진짜 성장이란 역할을 완벽하게 해내는 유능함이 아닐 것이다. 그 촘촘한 역할들 사이에서도,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는 일상 속에서도, 끝내 나라는 고유한 빛을 잃지 않으려는 처절하고도 아름다운 의식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언제부터 '잘 살아야 한다'는 타인의 문법으로, '나로 살아야 한다'는 본연의 질문을 덮어버렸을까. 이제는 그 두꺼운 덮개를 조금씩 걷어내 보려 한다. 비록 그 아래 드러난 모습이 투박하고 상처투성이일지라도, 그것이 진짜 나의 얼굴이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