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냥독선생

무의미의 바다에서 진실을 건져내려면

『진실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미치코 가쿠타니 씀, 돌베개, 2019

by 고양이쌤

*2020년 9월 격월간 교육잡지 <민들레>에 기고한 글입니다.



1퍼센트의 진실과 이성의 몰락

“광주에 북한군이 들어와서 사태를 일으켰다는 주장도 있잖아. 그게 아무리 소수라 할지라도, 단 1퍼센트의 사람들이 주장하는 말이라 해도, 진실일 가능성이 있는 거 아닌가?”

한 술자리에서 대학 동창에게 들었던 이 말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오히려 시간이 갈수록 더 생생해진다. 그 친구는 “소수의 주장이라고 무시하면 안 되지”라고 말했다. 진실을 외면하기 위해 ‘소수의견 존중’이라는 민주주의의 가치를 이용하려는 친구의 태도가 비열하게 느껴져 더는 대화를 하고 싶지 않았다.


『진실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의 저자 미치코 가쿠타니는 ‘사실에 대한 무관심, 이성을 대신한 감성, 좀먹은 언어가 어떻게 진실의 가치를 깎아내리는지, 그리고 이것이 미국과 세계에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검토(10쪽)’하기 위해 이 책을 썼다. 그래서인지 저자는 ‘이성의 쇠퇴와 몰락’을 첫 장에 놓으며 책을 시작한다. 사실 비이성은 인류 역사와 늘 함께했다. 마녀 재판, 종교전쟁, 세계대전, 인종 청소, 생체실험 등 역사책 속에는 인간이 저질렀던 비이성의 처참한 결과가 수없이 기록되어 있다. 어쩌면 인간은 비이성적 존재이기에 이성을 추구하려 무던히도 애써왔는지도 모른다.


인류는 더는 어리석은 행동을 하지 않기 위해 이성을 추구하고 논리를 교육하는 것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겨왔다. 저자는 미국은 ‘이성, 자유, 진보, 종교적 관용이라는 계몽주의 원칙 위에(19쪽)’ 세워졌다고 말한다. 그 견고한 토대가 있었기에 반이성주의의 위협에도 무너지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러나 저자는 이성의 시대가 점점 저물고 있다고 진단했고, 트럼프의 당선이야말로 이를 단적으로 증명한다고 본다. 트럼프는 하루에 5.9개의 거짓말을 하고, 국가의 주요 정책을 트위터에서 결정하며 백악관에서는 주로 TV를 보며 지낸다고 한다. 기후위기를 부정하고, 러시아 선거 개입부터 자신의 재산 액수까지 입만 열면 거짓말을 일삼으면서도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을 비난하는 모든 사람을 거짓말쟁이로 몰아붙인다.


트럼프 월드에서는 기초과학에 해당하는 사실조차도 (예를 들면, 마스크가 코로나19 확산을 막기 위해 필요하다는) 필요에 따라 거짓이 된다. 저자가 더욱 안타까워하는 것은 많은 미국인들이 그를 지지하고 그가 주장하는 대안 사실을 믿는다는 것이다. 왜 이렇게 된 걸까?


저자는 서문에서 전체주의 정권이 힘을 얻었던 이유를 ‘진실의 왜곡과 파괴’라며 ‘사람들이 냉소와 피로감과 두려움으로 인해, 무조건 권력을 잡고 보려는 정치 지도자의 거짓말과 가짜 약속에 곧잘 넘어간다는 점(9쪽)’을 권력자들이 알고 있다고 말한다. 저자는 트럼프의 집권 또한 이와 배경을 같이 한다고 생각한다. 2008년 금융위기로부터 가속화된 중산층의 몰락과 유동하는 세계에 적응하지 못한 사람들의 불안이 정치에 대한 냉소와 피로감을 가중시키는 가운데 트럼프라는 괴물이 탄생했다.


이러한 문제를 지적한 것은 저자가 처음은 아니었다. 이미 10년 전 수전 저코비는 『미국의 비이성 시대』에서 ‘합리적 담론의 역할과 상식과 사실에 기초한 정책의 역할이 위축’된 원인으로 ‘정보오락 프로그램의 중독, 종교 근본주의의 지속적인 영향, 지성주의를 전통적인 미국인의 가치관과 불화하는 진보주의와 동일시하는 대중의 시각, 기본 능력뿐 아니라 그 능력의 기초를 이루는 논리를 제대로 가르치지 못하는 교육제도(27쪽)’를 지적한다. 소위 ‘레드넥Redneck’이라는 혐오와 조롱의 말로 불리는 가난하고 교육받지 못한 백인 남성들이 트럼프의 열렬한 지지층이라는 사실이 저코비의 분석이 크게 틀리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보고 싶은 것을 보고, 믿고 싶은 것을 믿기 위해 사는 사람들은 맹목적이기에 극단주의자가 될 수밖에 없다. 저자는 이를 ‘열정의 비대칭성(81쪽)’이라고 말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명백한 진실’을 설명하기 위해 시간을 들여 게시물을 만들지 않지만, ‘다른 진실’을 만들고자 하는 사람들은 근거는 희박하고 주장만 강조된 게시물을 수백 수천 개를 만들고 퍼뜨리는 데 전력을 다한다. 그렇게 사람들은 ‘이것이 진실이다’라고 외치는 게시물 위를 끝없이 부유하게 된다. 너무 다양한 진실 위를 떠돌다 보면 무엇이 진실인지 가리려는 노력이 헛수고처럼 느껴지고, 사람들은 그저 나와 성향이 비슷한 쪽에서 말하는 것을 따르는 게 편리하다고 느끼게 된다.



가짜뉴스와 소셜 미디어가 빚어내는 허무주의

가짜뉴스 확산에 가장 큰 역할을 하는 것은 바로 소셜미디어의 발달일 것이다. 19대 대선에서 내 SNS 안에서만큼은 심상정이 대통령이었다. 친구들 대부분이 진보정당인 정의당 또는 녹색당 지지자들이기 때문이다. 2004년 미국의 대선 직전에 “내가 아는 사람 가운데 조지 부시 지지자는 하나도 없는데 여론조사 결과가 어떻게 막상막하일 수 있지(97쪽)?”라며 의아해했다고 하는 극작가 아서 밀러처럼 나 또한 ‘도대체 그 많던 정의당 지지자들은 다 어디로 갔지?’하고 매번 선거 결과를 볼 때마다 의아해하곤 한다. 이 현상을 저자는 말하는 ‘필터탑에 갇힌다’고 표현한다.


포털의 창에 검색어를 입력하는 순간 수많은 정보가 쏟아진다. 기사나 블로그 등을 읽으면서 나는 무언가를 깊이 알게 된다는 착각에 빠지게 된다. 그러나 사실 내가 클릭하는 정보들은 내가 보길 원하는 정보일 뿐이다. 나와 다른 성향의 글이나 기사는 ‘믿고 거르게’ 된다. SNS는 더욱 그렇다. 관심사가 한 번 설정되고 나면 알고리즘은 끊임없이 나의 확증편향을 강화해 줄 정보들만 제공한다.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다양한 의견을 수렴한다는 것은 착각에 불과하다. 알고 보면 거기서 거기인 정보들을 반복해서 집어먹다가 결국은 ‘역시 내가 옳았어’ 하며 스마트폰을 꺼버린다.


독서모임에 나오는 분 중에는 가끔 가족이나 친척 단톡방에 어르신들이 이상한(?) 정보를 계속 올리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고민하는 경우가 있다. 그 정보의 출처는 또 다른 이가 보내준 문자메시지다.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최초의 정보제공자를 찾을 수 있겠지만, 누구도 그 정보를 검증하려는 노력을 하지는 않는다. 때로는 유튜브 영상을 뉴스 영상으로 착각하고 그대로 믿는 노년층이 있다는 얘기도 듣곤 한다. 수많은 개인이 각자의 채널을 갖고 어떤 말이든 글이든 쓸 수 있는 지금 그 채널의 숫자만큼의 ‘진실’이 존재하게 되었다. 다른 이의 주장에 귀를 기울일 필요도 없고, 근거를 반박하기 위해 공부를 할 필요도 없다. 내가 믿고 싶은 진실을 선택하기만 하면 된다. 각자의 생각 정원 속에서 더 높은 담을 치며.


세계 지도자를 자청하는 한 인간의 거짓말을 실시간으로 목격하다 보니 올바름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것이 무의미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거짓말로 점철된 인생을 사는 사람에게 권력과 부가 집중되는 모습은 정직하고 성실한 인생을 산 사람들을 한순간에 바보로 만든다.


허무주의는 사람들을 무감각하게 만든다. “정치인들은 다 썩었는데 거짓말 좀 하면 어때.” “사기 치려면 크게 치는 게 낫지.” “대의를 위해서 작은 허물은 감춰줘도 돼.” 같은 말처럼 ‘비정상의 경계를 낮춰 용납할 수 없는 것을 정상으로 만드는 경향(133쪽)’이 있다.


2012년 미국의 한 초등학교에서 총기 난사 사건이 일어났다. 일부 악플러들은 유족들을 조롱했고, 거기에 유족들이 고발을 하자 악의적 공격이 난무했다. 이후 또 다른 총기 사건에서도 피해자나 생존자들에 대한 조롱이 마치 재미있는 밈처럼 퍼져나갔다고 한다. 나는 이를 보며 ‘세월호 유족’에 대한 각종 조롱과 악성 댓글이 떠올랐다. 윤리적 기준이 사라지고 어떻게 사는가보다 무엇을 얻는가가 더 중요해진 세상에서 약자가 되기 싫은 사람들은 약자를 혐오할 수밖에 없다.


저자는 허무주의가 포스트모더니즘의 유산이라고 주장한다. 탈진실의 사회가 도래하게 된 것은 미국만이 아니라 전 세계적인 추세인데, ‘누구나 동의하는 보편적인 진실은 없으며 사회적 세력이 형성하는 ‘인식’만이 있음’을 골자로 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상대주의가 사회문화 전반에서 악용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이 비서구, 비백인, 비남성, 탈계급적 사고를 확장시키는 데 기여를 해왔음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오늘날에 와서는 ‘공격적인 이론이나 틀렸다고 밝혀진 이론을 주장하고 싶어하는 사람들, 또는 동등하게 취급할 수 없는 것을 동등하게 취급하고 싶어하는 사람들도 이 주장을 이용(66쪽)’하게 된 것이다. “Black lives matter(흑인 생명은 소중하다)!”라고 외치면 이에 대해 일부 백인 극우들이 “All lives matter!”라고 되받아치고, 여성혐오 하지 말라고 하면 “모든 혐오가 나쁜데 왜 꼭 ‘여성’만 혐오하지 말라고 하느냐, 그건 차별이다.”라고 말하는 것이 그 예다. 언론은 마치 양쪽의 의견을 공평하게 반영하는 것처럼 보도해주곤 하는데, 저자는 이런 현상을 ‘가치의 거짓 등가성’이라고 비판한다.


저자는 미국의 건국세대가 강조해왔던 ‘공동선, 공동의 이해와 목적’ 등이 상대주의 아래에서는 획일화된 전체주의의 산물처럼 여겨지게 된 현실을 개탄한다. “모든 사람이 저마다의 의견을 가질 권리가 있는 것이지, 저마다의 사실을 가질 권리가 있는 것은 아니다(15쪽)”라는 미국 민주당 상원의원을 지낸 사회학자 대니얼 패트릭 모이니핸의 말을 인용하며, 최소한의 공통된 사실 기준을 공유하는 공통의 현실 감각이 우리에게 절실하다고 말한다.



관종의 시대, 진실은 어디에

이 책을 읽으며 가장 크게 동의한 부분은 ‘비대해진 자아’에 대한 비판이다. 언제부턴가 사람들은 ‘나’에 대해 지나치게 집착하기 시작했다. 저자는 이를 ‘셀피의 시대’라고 명명하며 모든 것이 나의 관점에서 해석이 가능하고 나 자체가 기준이 되어버린 세계에서 공동체에 대한 의무감이나 시민으로서의 책임감은 약해질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한국식으로 말하자면 ‘관종의 시대’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누구도 통제하지 않지만, 자아라는 감옥에 갇혀 나의 행복이 최고인 양 추구하며 살아가니 세상이 어떻게 되든 나의 세계만 침범하지 않으면 상관없다. ‘마치 그곳에 인정받지 못한, 혹은 잃어버린 자아가 있는 것처럼 모두 스마트폰에 얼굴을 묻고(193쪽)’ 자아도취 또는 자기비하에 빠져 있다.


저자는 이런 주관성의 수용이 객관적 진실의 약화를 불러왔다고 본다. ‘지식보다는 의견을, 사실보다는 느낌을 찬양하게 (57쪽)’된 나머지 자신의 경험만이 진실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늘었고, ‘많은 측(면), 다양한 관점, 불확정성, 다양한 이해방식(67쪽)’이라는 말을 쓰기를 즐기는 사람들은 과학조차도 믿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여성학자 정희진의 해제는 이 책이 주는 논쟁거리에 불을 붙인다는 점에서 본문만큼의 가치를 지닌다. 정희진은 글의 첫머리에 ‘저자의 관점에 동의하지 않지만 작가의 문제 제기를 많은 이가 공유하기 바란다’고 썼다. 정희진은 ‘진실(객관성)이 없다는 뜻이 아니라 시공간의 횡단을 통해 구성된다(200쪽)’고 말한다. 진실이라 쓰인 역사도 결국 강자에 의해 쓰인 것이고, 포스트모더니즘은 약자의 입장에서도 역사를 쓸 수 있게 해주었다. 둘의 진실이 배치된다 할지라도 둘 중 하나가 거짓이라고 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진실의 유무와 시비, 진위를 중심으로 논할 때, 결국 하나의 진실만이 존재하게 되는데 그렇게 되면 피와 폭력이 동반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따라서 진실의 죽음을 애도하며 트럼프의 거짓말을 폭로하기보다 ‘그의 목소리를 상대화하는 방향으로 논쟁을 시작(201쪽)’하자고 제안한다.


사실이란 합의하는 영역이 아니며 해석 가능성이 열려 있는 문제라 할지라도 최저기준에 대한 공감과 합의는 필요하다고 믿는다. 그러나 정희진의 말처럼 무언가를 확실하게 틀렸다고 말할 수 있는 것도 권력이고, 그 기준을 정하겠다고 생각하는 것은 엘리트주의일 수 있다.


미국 최고의 서평가인 저자와 황폐해진 공업 지대에서 실업자로 살아가는 ‘레드넥’은 비슷한 양의 정보를 가지고 있지도 않고, 설사 정보를 갖더라도 그것을 해석할 능력에서 큰 차이가 난다. 그런 두 사람이 비슷한 방식으로 현실을 감각하고 공통의 사실 기준을 공유할 가능성이 있을까? 격차가 더 심각해지지는 않을까? 정희진은 모두가 트럼프가 되기 전에 우선은 내 주변의 ‘트럼프들’과 싸우자고 말한다. 아직은 ‘트럼프들’에 동조하고 존경하는 사람들보다는 피해 다니는 사람들이 많은 상황을 희망적이라고 본다며 일독을 권한다.


책 표지가 매우 인상적이다. 뫼비우스의 띠 모양의 뱀이 자신의 꼬리를 물고 있다. 거짓과 혐오를 일삼으며 진실을 외면하다가는 결국 허무주의에 잡아먹히게 될 것이다. 진실 따위 중요하지 않은 세상일지라도 허무주의에 빠져서는 안 된다. 냉소하고 체념하다 무의미의 바다에서 익사하지 않기 위해서, 더 나아가 그 바다에서 진실을 건져 올리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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