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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양이쌤 Jan 15. 2021

노랭이는 다 계획이 있구나

노랭이와의 첫 만남

“와 니 진짜 몬생깃네.”

노랭이를 처음 만났을 때 무심코 내뱉었던 첫 마디였다. 마당에 밥을 주며 여러 못생긴 고양이들을 두루 접해왔지만 그중 독보적으로 못생긴 고양이였다. 치즈들은 다 귀여운 것 아닌가 했던 나의 고정관념을 깨준 고양이 노랭.    

만난지 얼마 안 됐을 때 핼쑥한 노랭


비가 추적추적 오던 날 노랭이와 나는 처음 만났다. 앵구 가족에게 밥 주려고 나갔더니 못 보던 고양이 한 마리가 대문 근처에 앉아있었다. 나를 보고도 딱히 놀라지도 움직이지도 않고 가만히 보고 있었다. 당시 앵구 가족들이 오면 밥을 주고 다른 때는 밥그릇을 치워놓고 있었다. 혹시 마당 안에서 영역 다툼이 생길 경우 앵구 새끼들이 다치거나 쫓겨나갈까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노랭이는 그냥 보고 넘길 수가 없었다. 너무 비쩍 말라있었고, 눈이 슬퍼 보였다. 오늘 밥을 먹여도 오래 살아남을 것 같지 않았다. 앵구 가족들이 오면 싸우기보다는 먼저 도망가지 싶었다. 앵구가 순둥이지만 얘 정도는 쉽게 이기지 않을까 싶을 만큼 기운도 없어 보였기에 한 끼라도 먹이자는 마음에 밥을 주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 노랭이는 도망가지 않았다.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또 그다음 날도 노랭이는 마당에서 나를 반겼다. 앵구랑은 인사를 텄는지 친하게 지냈다. 앵구는 처음 노랭이랑 마주쳤을 때는 약간 경계를 하며 들릴랑 말랑 하는 하악질을 하기도 했는데, 노랭이가 워낙 숙이고 나오니까 마음을 푼 듯했다. 둘은 며칠 만에 함께 낮잠 자는 사이로 발전했다. 앵구와 달리 부인냥은 까칠해서 서로 싸우지 않을까 걱정도 했는데, 앵구 새끼들이 꽤 컸을 때라 마실 나가는 시간이 많아서인지 부딪히는 일이 없었다. 새끼들도 청소년 시기에 접어드니 마당에는 밥만 먹으러 오지 바깥으로 나도는 시간이 대부분이었다. 점점 앵구 가족이 마당에 있는 시간보다 노랭이가 있는 시간이 길어지기 시작했고, 그 시간만큼 노랭이는 통통하게 살이 올랐다.      


앵구와 노랭이의 관계 변천사


처음 만났을 때 그 비극적인 표정은 메소드 연기였나 싶을 정도로 노랭이는 발랄하고 애교가 넘치는 고양이였다. 멀리서 내가 보이면 종종 걸음으로 달려와서 발라당 누워 등으로 땅을 기며 브레이크 댄스를 출 만큼 애교가 격렬했다. 노랭이는 주차되어 있는 차 위에 올라가 일광욕을 즐기거나 망을 보곤 했는데, 그러다가 내가 보이면 “꺄꺄오옹~!” 하며 지나치리만큼 반갑게 뛰어왔다. 혹시 차가 긁혔다거나 고양이들 우는 소리에 잠을 깼다거나 하며 항의할 이웃들이 있을까 봐 우려되어 큰 목소리로 “어·머·넌·누·구·니·내·고·양·이·도·아·닌·데.” 하며 발연기를 하기도 했다. 우리는 손 타면 안 되는 사인데 노랭이는 선을 넘기 시작했고, 만날 때마다 심각하게 부비부비 댄스를 시전하는 통에 걷다가 넘어질 뻔한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결국 그 애교댄스에 넘어가 ‘노랭이’라는 정식 이름까지 지어주고 말았다.     


좋아. 계획대로 되고 있어!


이때가 노랭이와의 첫 만남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사실 나의 착각이었다. 이 글을 쓰기 위해 스마트폰 사진첩을 뒤적거리던 중 집을 사고 얼마 안 됐을 무렵에 마당 고양이들을 찍은 사진 속에서 노랭이를 발견한 것이다! 아마 녀석은 이곳저곳을 떠돌다가 내 마당에 들리게 되었고, 그때 헤헤거리며 멍한 눈으로 마당고양이들 사진을 찍고 있던 나를 보고 감을 잡았을 것이다. “저 사람, 호구가 될 상이로군.” 노랭이는 계획이 있었고, 난 그 계획에 감기고 만 것이다....     


노랭이에게 이름을 지어줄 무렵 앵구 가족은 완전히 마당을 떠났다. 세 아이 중 한 아이는 잃었지만, 두 아이는 무사히 청소년냥으로 키운 뒤 부인이 먼저 떠나고, 새끼가 떠나고, 뒤를 이어 앵구도 떠났다. 앵구는 떠난 뒤에도 1~2주에 한 번씩은 이층집 문 앞까지 찾아와 인사를 하고 가는 묘성 바른 고양이였다. 그러다 인사가 점차 뜸해지고 결국 다신 오지 않았다. 앵구는 어디 가도 예쁨 받고 잘 살 고양이니 죽었을 거라 생각하고 싶진 않다.     

문안인사 오는 앵구


앵구는 내가 길고양이와도 우정을 쌓을 수 있게 만들어 준 고양이쌤 책방 최초의 마당 입주 고양이였다. 이후로도 마당은 빌 날이 없었다. 노랭이를 비롯해 수많은 고양이들이 내 마당에서 잠시 쉬고 허기를 채우고 마음 편히 잠을 자고 떠났다. 물론 그 때문에 가슴 아픈 일도 많이 겪게 되었지만, 길고양이에게 마당을 내 주면서 그 공간이 채워지는 만큼 내 마음도 채워지는 경험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앵구가 떠난 마당은 드디어 노랭이 세상이 되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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