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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양이쌤 Jan 18. 2021

고양이랜드 비기닝

출산의 서막

“쟤 임신한 거 아냐?”

“아니야. 내가 잘 먹여서 살찐 거지.”

대수롭지 않게 넘겼었는데 갈수록 이상했다. 다른 데는 말랐는데 배만 살찌는 건 좀 아니지 않나 의심이 들기 시작했고, 의심은 확신이 되었다. 배가 탱탱볼처럼 동그래지고 젖이 불었고, 날이 갈수록 애교 스킬이 늘어났다. 길고양이들이 임신하면 사람에게 의지하는 경우가 있다는 고양이 커뮤니티의 숱한 게시글을 봐 왔으면서도 나는 왜 몰랐던 걸까. 어쩌면 모르고 싶었던 것 같다. 그저 마당에 오는 고양이들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밥만 주고 싶었지 책임지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탱탱볼처럼 배가 불러왔지만 모른 척하고 싶었다....



노랭이는 암컷이고, 외모와 달리 마성의 매력을 지닌 고양이였다. 남자친구가 하루에도 몇 번씩 바뀌는 걸 자주 목격하곤 했다. 대표적으로 세 명의 남친이 돌아가면서 노랭이를 찾아왔다. 앞머리(턱시도 고양인데 검은 무늬가 뱅 앞머리처럼 생겨서), 왕머리(치즈 고양인데 정말 누가 봐도 왕머리), 칼쓰마(고등어 고양인데 점잖음. 유일하게 노랭이가 매달리는 느낌). 집 안 고양이들은 노랭이가 데려오는 남자친구들과 그들 간의 밀당과 암투를 막장드라마 보는 기분으로 구경하고 있었다. 완전 팝콘각이라며 함께 구경해놓고 왜 임신할 거라고, 새끼를 내 마당에 낳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을까!      


노랭이 주요 남친 목록



병원에 데려가 보라는 남편의 말을 무시하며, 노랭이의 불러오는 배를 못 본 척하며, 그렇게 식은땀 흘리는 나날이 흘러가고 있었다. 내 안에 천사와 악마가 속삭였다.

천사: 아니야. 저건 그저 살이라고! 굶다가 영양가 높은 사료를 먹으니까 급격하게 살이 찐 거라고! 

악마: 흐흐흐. 분명 임신이야. 곧 귀여운 새끼들이 주르륵 태어날 거야. 크하하. 얼마나 귀엽겠어!

천사: 혹시 수컷인데 잘못 본 거 아닐까? 다시 확인해 봐!

악마: 없던 땅콩이 새로 생기기도 한다는 거야! 말도 안 된다고. 잘 생각해 봐~ 처음 왔을 때부터 알았잖아. 녀석이 임신했다고 예상했었잖아. 크크큭.     


둘 다 악마인가? 누가 천사고 누가 악마인지 모르겠지만, 귀여운 아깽이들을 볼 수 있다는 생각에 들뜨기도 하면서 진짜 태어나면 마당에서 다 키울 수도 없고 입양이 안 되면 어떡하지 하는 걱정에 노랭이를 바라보며 웃었다 울었다 했다. 언제 새끼를 낳을지 알 수가 없으니 일단 고양이집을 씻어 말리고 소독한 뒤 깨끗한 옷을 깔아두었다. 봄이었지만 혹시 몰라 핫팩도 넣어두고.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노랭이가 절뚝이기 시작했다. 몸이 무거운데 어디서 뛰어내리다가 접질린 모양이었다. 임신했는데 아프기까지 하면 어쩌나 걱정이 되어 병원으로 들고 뛰었다. 막상 가보니 별 일 아니었고 다리찜질 해주라는 진단을 받고 왔다. 이제 와 하는 생각이지만, 병원 다녀 온 다음 날부터는 똑바로 걸어 다녔던 걸 보아 거의 카이저 소제 급 연기가 아니었나 싶기도 하다. 내가 자기의 묘생에 개입할 수밖에 없게 만들려는 거대한 계획이었던 건 아닐까. 어쨌든 기왕 병원에 간 김에 초음파를 했고, 곧 출산할 거고 적어도 5마리 이상이라는 확인사살을 받고 돌아왔다.      


네, 임신이 확실합니다. 적어도 다섯?...



운명의 날이 째깍째깍 다가왔다. 퇴근하려는 나를 밀치고 유독 집안으로 들어오려고 했었는데, 출산이 임박해서 그랬나보다. 다음날 아침에 내려가 보니 다행히 준비해준 집 안에 6마리 새끼를 출산하곤 열심히 그루밍을 해주고 있었다. 새끼 상태를 눈으로 확인하기가 어려워 폰을 집어넣어 촬영을 해서 보니 치즈만 5마리였다. 아빠도 치즈였던 모양이다. 예상가는 놈(왕머리)이 있었지만 일단 그건 중요하지 않으니 라고 생각했지만 사실 그게 가장 중요한 것이었단 걸 나중에 깨닫게 된다....    

 


아련아련열매 잡수셨어요?


한 마리는 작고 까만데 움직임이 없었다. 이미 배 안에서 죽은 채로 태어난 것 같았다. 사람 냄새 묻으면 안 된다고 해서 고무장갑을 끼고 죽은 새끼를 꺼내 묻어주었다. 내 마당에서 죽은 첫 아기였다. 다행히 나머지 5마리는 기운차게 꼬물거렸다. 한 마리는 유독 컸고 세 마리는 고만고만했고, 한 마리가 유독 작았다. 노랭이는 젖 먹인다고 밥을 제대로 먹지 못했다. 뭘 해줄 수 있을까 고민하다 닭 안심을 사다 미역국을 끓였다. 부모님께도 끓여드린 적 없는 미역국을 고양이를 위해 끓이다니.... 어쨌든 내 집에서 태어난 생명을 모른 척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노랭이도 날 믿고 내 집에 새끼를 낳은 거니까 꼭 모두 건강하게 잘 크길 바랐다. 그게 나에게도 좋은 일이 될 것 같았다. 그때는 정말 노랭이를 잘 도와주기만 하면 될 줄 알았다. 귀여운 아깽이들 무럭무럭 크는 것 보면서 즐거울 일만 있을 줄 알았다. 뒤에 찾아올 슬픔은 까맣게 모른 채로, 마당이 곧 냥글냥글 고양이랜드가 될 줄은 꿈에도 모른 채로.

미역국까지 끓여 먹였는데.... 출산 후 태세돌변..... 눈빛 험악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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