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고양이쌤 Jan 20. 2021

귀여움 저장 용량이 부족합니다

봄이, 달래, 쑥이와 함께한 그해 봄

‘용량이 부족합니다’

당시 내 스마트폰은 시시때때로 용량 부족을 읍소하였고, 쓰지 않는 파일을 정리해 달라고 애원했다. 불쌍해서 정리하려고 들어가 보면 한 장 한 장 다 주옥같은 고양이 사진이었기에 지울 수가 없었다. 스마트폰 저장용량에 사막화를 가져 온 주범! 그것은 바로 노랭이의 아가들!      


출산 직후에는 안타까운 일이 있었다. 사산된 하나를 빼고 새끼가 다섯이었는데, 이틀 지나자 세 마리가 된 것이다. 출산 다음 날 한 마리가 사라지고, 그 다음 날 또 한 마리가 사라졌다. 아마 밤에 죽은 아이를 노랭이가 멀리 물어낸 모양이었다. 노랭이는 스산한 새벽에 죽은 새끼를 물고 어디로 갔었던 걸까? 주변을 둘러볼까도 했지만 그럴 엄두가 나지 않았다. 죽은 아이를 보는 건 겁이 나기도 했고, 내가 간섭할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었다.     

 

노랭이의 임신이 확실해지고 출산을 돕기로 하면서 노랭이의 삶에 어느 선까지 개입할지에 대해 남편과 의논했다. 고양이에 관한 것은 모두 내 소관이기 때문에 남편은 거의 간섭하지 않지만, 당시 남편이 휴직을 하면서 고양이 병원 가는 일을 비롯해 내 일을 많이 도와주고 있었기 때문에 의논이 필요했다. 또 내가 막무가내로 일을 저지르는 걸 스스로 잘 알기 때문에 남편이 나를 어느 정도는 잡아줘야 이성을 잃지 않을 수 있었다. 나는 집 안의 네 마리 고양이들을 키우는 것도 힘들어 할 때가 많았기 때문에 더 묘구수를 늘이는 것은 무리였다. 게다가 룬, 우란, 살룻 세 고양이는 지병이 있어 거의 매주 병원을 다녀야 하는 아이들이었다. 노랭이와 노랭이 새끼 모두 내가 키울 게 아니라면 선이 필요했다. “집과 사료, 물을 제공하되 춥다고 아프다고 집 안에 들이는 일은 하지 않기, 아프면 약을 사 와서 기본적인 처치는 하되 병원에는 데려가지는 않기”가 우리가 정한 규칙이었다.   

  

그렇게 남편 앞에서 강력하게 다짐을 하고, 마당에 가면 또 헬렐레 풀려버렸다. 아깽이들은 진리다! 룬은 7개월 즈음, 우란이는 2개월 즈음, 살룻은 3살 즈음, 랏샤는 3개월 즈음 데려온 아이들이다보니, 갓 태어난 고양이를 처음 보는 나로서는 이성을 놓을 수밖에. 눈도 못 뜨고 꼬물거리는 찹쌀인절미 같은 아가들을 놔두고 열흘 정도 여행을 갔다 왔는데, 남편이 보내 준 아깽이들 사진 때문에 여행 내내 집에 돌아가고 싶었다. 내가 여행하는 동안 꼬물이들은 눈을 떴고, 집 밖으로 기어 나오려고 낑낑대기 시작했다.      


세 마리의 덩치 차이가 컸다. 4월 20일 봄에 태어난 아이들이라 봄 시리즈로 이름을 지어주었다. 가장 큰 아이를 봄이(덩치가 커서 눈에 잘 보여서), 중간 크기를 달래(너무 많이 울어서 달래준다고), 너무 작고 약한 아이를 쑥이(쑥쑥 자라라고)라고 이름을 지어주었다. 봄이는 태어날 때부터 남다른 덩치를 자랑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눈도 뜨기 전부터 밖으로 기어 나오려고 땡깡을 써서 엄마를 힘들게 했다. 엄마 먹는 사료 냄새도 가장 먼저 맡았고, 역시나 그 작은 이빨로 사료를 제일 먼저 꼭꼭 부숴먹은 것도 봄이다. 데크를 떠나 마당을 가장 먼저 경험한 것도 봄이었는데 나에겐 작은 마당이었지만, 아깽이들에게는 미지의 숲이나 마찬가지였다. 봄이가 마당으로의 탈출을 노리고 있을 때 달래와 쑥이는 허피스 증상으로 눈이 많이 붓고 눈곱 때문에 눈도 제대로 뜨지 못했다. 병원에 가서 약을 처방 받아 와 발라주고 먹이고 했더니 금방 좋아지는 게 보였다. 많은 길고양이들이 이 정도 항생제면 나을 병으로 실명을 하고 목숨을 잃는 일이 허다하다는 게 너무나 안타까웠다.      

봄이 달래 쑥이

건강해진 아가들에게 마당은 최고의 놀이터였다. 봄이와 달래는 덩치가 비슷해 사냥놀이하기에 좋은 파트너였다. 잡초 사이에 숨은 봄이는 마치 세렝게티 초원의 사자 같았다. 잡초 뒤에 몸을 숨겼다가 달래가 지나가면 갑자기 “와앙!”하고 나타나서 깜짝 놀라게 하거나(물론 매우 어설픈 동작이다), 둘이서 정원석 사이사이를 누비며 술래잡기를 했다(물론 매우 느리다). 나무에 오르기도 하고, 아저씨가 애지중지 기른 꽃들을 공격하기도 하며 무럭무럭 자라나는 것을 보는 것만으로 흐뭇한 나날이었다(물론 식물 사랑 남편은 운다).      

마당의 (같잖은) 사자들


집 안 고양이들은 꼬마 고양이들을 흥미롭게 구경했다. 방충망을 사이에 두고 바깥 고양이들과 냄새도 맡고 비비기도 하며 지내던 녀석들은 노랭이한테는 하악질을 했지만, 새끼들에게는 그러지 않았다. 봄이와 달래가 특히 좋아하는 고양이는 친절한 랏샤 아저씨. 동글동글한 외모만큼 동글동글한 마음씨를 갖고 있는 랏샤를 알아본 것이다. 거실창이 열리면 봄이와 달래가 달려오고, 그럼 랏샤도 마중하면서 서로 코 냄새 엉덩이 냄새를 맡았다. 그러고 나면 랏샤는 창문턱을 괴고 앉고, 봄이와 달래는 방충망을 뜯었다....  

   

봄이는 의지의 한국 고양이였다. 그 조그만 이빨로 매일 같이 부지런히 뜯더니 결국 자기 몸만 한 구멍 내고 집 안으로 들어왔다. 처음 들어 온 집인데도 자기 집처럼 빨빨거리고 돌아다니는 봄이와 달리 정작 집 주인인 네 마리 고양이들은 봄이를 피해 도망치기 바빴다. 안락한 집 생활에 젖어들어 험한 야생의 삶을 잊어버린 것이다. 급하게 방충망에 테이프를 발랐지만, 봄이는 수시로 테이프를 뜯고 들락거렸다. 아아. 나를 망치러 온 나의 구원자, 노랭이 새끼들 같으니라구.     

자~ 제가 한 번 들어가 보습니다


봄이, 달래, 쑥이와 지낸 보드랍고 사랑스러웠던 그해 봄을 기억하면 늘 눈물이 난다. 그때 내 집에서 가장 예쁜 곳이 마당이었다. 2층 테라스에 나가 마당을 내려다보면 푸른 잔디 위에 노란 네 마리 고양이들이 보였다. 그 풍경이 아름다워서, 그리고 지금은 그 풍경을 볼 수 없어 마음이 아려온다.     



매거진의 이전글 고양이랜드 비기닝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