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가난을 얼마나 알고 있는가?
가난에 대해 관심이 많다. 어린 시절 가난했고, 지금은 살만 하지만, 언제 가난해질지 모르기 때문에 대비를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하는 대비란 돈을 모으는 것은 아니다. 아직은 갚아야 할 빚이 있고 따로 모을 만큼 벌 지도 못한다. 다만 할 수 있는 일은 가난해도 내 존엄을 지키며 살 방법을 찾는 것인데, 과연 생계가 어려울 정도로 가난해졌을 때 존엄할 수 있는 게 가능이나 한 건지 모르겠다. 고양이와 책이 내 자존감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사람인데, 돈이 없으면 책을 사 볼 수도 없고, 고양이를 병원에 데려갈 수가 없다. 그런 처지가 되었을 때도 내가 삶을 사랑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다. 그래서 가난이 더 두렵다.
작년에는 가난을 다룬 몇 권의 책을 읽을 기회가 있었다. 『아이들의 계급투쟁』, 『가난 사파리』는 각각 영국과 스코틀랜드의 빈곤 지역을 경험한 저자가 쓴 책이다. 두 권의 책은 공통적으로 빈곤 지역에서 태어나고 자란 아이들이 정서적으로 얼마나 취약해질 수 있는지를 다루고 있다. 예를 들어 취약 계층의 아이들은 중산층 이상의 아이들에 비해 신체와 지능 모두 발달 속도가 느리고, 학대에 노출될 가능성이 훨씬 크다는 것이다. 가난하지만, 가족끼리 서로 사랑하고 작은 것도 나누며 이웃, 친구들과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것은 이제 낭만이 되어가고 있다. 가난해서 폭력적이게 되고, 폭력적이라서 또 가난해진다.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나 자라면서 정서적, 물리적 폭력을 경험한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에 비해 정서적으로 취약해질 가능성이 많아 알코올이나 약물, 또는 폭식 등의 문제를 겪을 확률이 높고, 이는 또한 자식들에게 대물림될 가능성도 높아진다. 점점 삶을 개선할 수 있는 의지는 약해지고, 가난에서 벗어나기 힘들어진다.
특히 『가난 사파리』는 빈곤의 당사자인 저자의 목소리를 생생하게 들을 수 있다는 점에서 좋은 책이었다. 저자는 스코틀랜드 빈민가에서 태어나 가난이 한 인간의 삶에 미칠 수 있는 온갖 정서적·물리적 폭력을 체험하고 목격하며 자랐다. 공공서비스의 일환으로 행해진 심리 상담을 받게 된 저자는 자신의 문제를 직면할 수 있는 내적인 힘을 얻었고, 그 힘으로 글을 쓰고 랩을 하면서 가난의 실상을 알리는 일을 하고 있다. 그 일환으로 쓰인 이 책으로 영국에서 가장 탁월한 정치적 글쓰기에 수여하는 ‘오웰상’을 받았다.
‘가난 포르노’라는 말이 있다. 끔찍한 말이다. 예전 한 지자체가 쪽방촌을 체험관광으로 만들겠다는 발표를 해 뭇매를 맞은 적이 있다. 때때로 정치인들이 최저생계비로 한 끼를 해결하며 황제의 식사가 부럽지 않다느니 하는 말을 했다가 여론의 분노를 사기도 했고. 가난을 구경거리나 낭만으로 여기는 태도는 가난한 사람들뿐만 아니라 언제 가난해질지 모르는 사람들을 더욱 불안하게 만든다. 가난은 점차 형태를 잃고 유령처럼 주변을 부유하며 나를 쪼그라들게 만든다. 우리는 가난을 얼마나 알고 있는가? 가난한 사람들의 목소리를 직접 들어본 적이 있는가? 가난한 사람들을 호기심과 안타까움을 갖고 구경하지만, 결국은 돌아서서 잊어버리는 행태를 저자는 ‘가난 사파리’라 명명하며 비판한다.
이 책의 훌륭한 점은 가난을 ‘개인의 책임’이나 ‘사회구조적 문제’라는 하나의 관점으로만 해석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가난의 원인은 가난한 사람의 숫자만큼 다양한데 일률적으로 해석하고 대책을 세우려 하기에 수많은 사각지대가 생겨나고, 들인 돈에 비해 성과가 나지 않는다. 근본적인 원인을 찾으려 애쓰기 전에 당사자의 목소리를 먼저 들어야 하는 이유다.
또 물리적 지원만큼 정서적 문제를 돌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빈곤 지역 전체를 재개발하는 데는 시간이 걸리고 이권 개입 때문에 정작 빈곤층에게는 도움이 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또 지원금을 확충하는 것은 늘상 보수 세력의 강한 반대에 부딪히기 마련이다. 가난하지 않은 사람들이 제 말이 맞다며 정책 싸움을 하는 동안 실제 가난의 당사자들의 좌절감과 열패감은 커지고, 더 나은 삶을 위한 의지를 상실하고 만다. 가난의 당사자가 문제를 말하고 개선하는 주체에 서게 하기 위해서는 우선 그들이 존엄을 되찾을 수 있도록 정서 상태에 대한 돌봄이 필요하고, 이를 위해 공공 서비스를 확충해야 한다.
“좌파는 엘리트층을 전복하거나 공공 지출을 증가시키는 새로운 경제체제에 대해 끊임없이 이야기한다. 서구 사회의 중첩되고 상호 의존하는 구조적 억압과 자본주의에 내재한 상징적 폭력에 대한 논쟁은 끝없이 이어진다. 하지만 정서 문해력(자신의 정서 상태를 표현하고 자신의 감정을 전달할 수 있는 능력)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과식에 대한 논쟁은 보기 드물다. 가난한 사람들의 음주 문제와 약물 상용 또는 이런 문제를 부채질하는 심리 문제에 더 귀 기울이는 활동가를 본 적이 없다.” (『가난 사파리』, 193쪽)
『아이들의 계급투쟁』, 『가난 사파리』가 가난의 원인과 파생되는 문제를 다룬 책이라면 『가난한 사람이 더 합리적이다』는 해결책을 다룬 책이다. 이 책을 쓴 아비지트 배너지와 에스테르 뒤플로는 2019년 노벨경제학상을 받았다. 두 사람은 부부인데 직접 현장에 뛰어들어 빈곤층을 인터뷰하고 수많은 대조 실험을 통해 빈곤문제의 해결책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그 과정에서 그들은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편견과 선입견 때문에 빈곤 문제가 해결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가난한 사람들은 게으르고, 비합리적이다' 또는 '가난한 사람은 순수하고 도덕적이다'처럼 가난의 원인이나 처한 환경이 다 다른데, 가난한 사람을 일반화, 대상화해서 문제를 해결하려 하다 보니 실패가 많았다는 것이다.
책상 앞에 앉아서 "원조를 늘려야 해!", "그러면 자생력이 없어져서 더 빈곤해져. 민주주의와 시장 경제를 발전시켜야 해!" 이렇게 떠들게 아니고, 빈곤한 사람들이 원하는 게 무엇인지, 빈곤의 덫을 끊기 위해 최소한의 필요가 무엇인지를 연구해야 한다는 게 그들의 주장이다. 공짜로 예방주사를 놓아준다고 해도 두 살 이전에 아기를 밖으로 데려 나오면 안 된다는 미신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미신을 극복할 유인책을 함께 제공하면 예방접종률이 확 높아진다고 한다. 예방접종을 받은 아이는 무사히 어른으로 자라 소득을 올릴 가능성이 훨씬 커지는 건 당연할 것이다.
책 제목처럼 '가난한 사람이 더 합리적'인 건 아니다. 사람은 누구나 비합리적인 선택을 많이 한다. 그런데 선진국 국민이나 부자들은 비합리적 선택을 하더라도 그것을 보완해줄 시스템이 있기에 비합리적이지 않게 보일 뿐이다. 실제 가난과 불행에 시달리다 보면 체내 코르티솔 분비량이 늘어 인지 능력과 의사 결정 능력에 직접적인 손상을 준다고(198쪽) 한다. 저자는 가난한 사람들이 비합리적 선택을 덜 하고, 자신의 잠재능력을 온전히 발휘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들지 않으면 빈곤 퇴치는 영영 불가능한 이야기라 생각한다. 또 그것은 공정하지도 않다. 얼마나 많은 재능 있는 아이들이(어쩌면 전 지구적으로 꼭 필요한 인재가 될지도 모르는)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일찍 죽어버리거나,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한 채 살아갈까를 생각해보면 빈곤 문제는 더욱더 우리 모두의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더욱 중요한 것은 작은 희망과 안도감, 위안이 강력한 유인이 된다는 점이다. 넉넉한 소득에 안정적인 생활을 하면서 갖고 싶은 것을 손쉽게 얻는 사람은 대개 밝은 미래를 위해서는 독려와 규율이 필수적이라고 생각한다. 즉 이런 사람들은 가난한 사람에게 지나치게 많은 혜택을 주면 게으른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할 거라고 걱정한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가난한 사람은 이와 정반대의 상황에 놓여 있다. 자신이 원하는 모든 것이 멀리 떨어져 있는 상황에서 희망을 유지하기는 매우 어렵다. 골대를 조금 가깝게 밀어주는 것은 가난한 사람이 골대를 향해 달려가는 첫걸음을 내딛도록 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가난한 사람이 더 합리적이다』, 278쪽)."
세 권의 책을 읽고 나서 종합적으로 든 생각은 ‘어느 누구의 가난도 같은 게 없다’는 것이었다. 보통 가난에 대해 이야기하면 보수는 “능력대로 버는 게 옳다. 더 노력해야 한다”는 말을 하고, 진보는 “구조가 문제지 개인의 책임이 아니다”라고 말하는데, 내가 읽은 책의 저자들은 “어떤 가난은 구조의 문제고, 어떤 가난은 개인의 문제다. 누구의 가난도 한 가지의 관점으로 설명하거나, 하나의 해결책으로 구제할 수가 없다.”라고 말하고 있다.
최근 읽은 『가난의 문법』도 마찬가지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저자 소준철은 소위 ‘폐지 줍는 노인’으로 표상되어 연민이나 비난의 대상이 되곤 하는 노인들을 ‘윤영자’라는 사람의 삶으로 재구성하여 가난을 구조를 들여다본다.
이 책을 읽고 독서모임을 하던 중 현상만 있고 해결책이 없어 아쉽다는 평가가 많이 나왔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저자가 재활용품 수집 노인의 삶을 추적하고 연구하여 책으로 가시화한 것만으로 그 역할을 다했다고 생각한다. 사회학이 할 영역은 보이지 않거나, 보지 않으려 하는 것들을 표면으로 건져 올리는 일이지, 섣부른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다. 해결책은 또 다른 전문가들의 영역이다.
그럼 개인은 아무 노력도 하지 말라는 말인가? 나는 저자가 해결책을 말해준다 한들 내가 개인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없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그저 세금 꼬박꼬박 내고, 복지를 확장하겠다는 정당에게 표를 주는 일 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아니 그것만 제대로 해도 된다.
그럼 가난 문제 해결을 위해 나서야 할 전문가는 누구인가? 바로 가난의 당사자들이다. 가난을 해결하겠다는 사람들의 대부분이 가난의 당사자가 아닌 게 현실이다. 개개의 가난은 너무나 개인적이고, 그들이 바라는 해결책 또한 지극히 사적이다. 노숙자에게 집과 일자리를 제공해도 며칠 만에 그곳을 탈출한다는 얘기를 들어봤을 것이다. 10만 원을 줘도, 100만 원을 줘도 폐지 줍는 노인들은 또 폐지를 주우러 길로 나올 것이다. 그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어떤 삶을 바라고, 어떤 죽음을 기대하는지를 1:1로 접근하지 않으면 해결이 불가능하다.
그 점에서 저자가 ‘정자’와 ‘경로당’ 공동체에 대해 말하는 점과 지역에 불법적으로 존재하는 ‘고물상’ 중심으로 해결책에 접근하는 점이 매우 흥미로웠다. 또 노인들이 묫자리를 제공받기 위해 교회보다 성당에 다닐지 고민한다는 것과 자신들의 장례식에 누구도 오지 않을까 봐 교회에 나간다는 점, 폐지 줍는 노인의 교통사고 원인 등을 조사한 점은 정말 옆에서 밀착하여 오래 지켜보며 관계를 쌓아가지 않았다면 몰랐을 지점인 것 같다.
나는 가난에 해결책이 있다면, 더 많은 사회복지사가 정당한 대우를 받으며 일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게 가장 시급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이 1:1로 취약계층을 밀착 전담하고, 또 당사자들의 의견을 정책으로 반영할 수 있다면 좋겠다. 더해서 가난의 당사자들이 가난 문제를 해결하는 주체가 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게 아닌가 생각해본다.
“이 생태계를 유지하게 하는 건, 노인들의 일과 그 안의 경제뿐만은 아니다. 이 생태계는 보다 젊은 세대들 혹은 보다 부유한 계층의 책임을, 더 나아가 제품을 제조하는 업체의 의무를 대신하는 역할을 한다. 거칠게 말하자면, 노인은 젊은 세대와 부유한 계층에 의해 착취당하고 있는 셈이다.” (90쪽)
가난은 정치의 문제라고 생각했던 때가 있었다. 그렇기도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어느 순간부터 가난은 세대를 이어가는 전염성 높은 질병이 되어가고 있다. 치료를 위해서는 돈도 필요하지만, 어디가 아픈지 세심한 진단이 우선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들어야 한다. 당사자의 목소리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