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실격』, 다자이 오사무, 민음사
자기애와 자기혐오의 경계는 모호하다. ‘나는 왜 이것밖에 안 되는 인간일까?’하는 말에서 ‘이것’의 기준이 높은 사람일수록 자기혐오에 빠지기 쉽다. 생겨 먹은 대로를 인정하지 못 하는 끝없는 자기혐오는 무한한 자기애의 토양에서 피어난다.
요조는 지역 유지 집안의 막내로 태어났다. 잦은 병치레, 엄격한 아버지, 하인과 하녀의 강간. 그는 자신을 둘러싼 세계를 이해할 수 없었다. 특히 인간이란 것은 늘 공포를 일으켰는데, 그는 공포를 가장하기 위해 ‘익살’이라는 가면을 쓴다. 인간세계에는 ‘정말이지 산뜻하고 깨끗하고 밝고 명랑한 불신(『인간실격』 쏜살문고, 23쪽)’이 충만했기에 광대의 가면을 쓰고서야 겨우 그 세계로 한 발 내딛을 수 있었다.
요조가 인간을 그렇게 두려워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에게 인간이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존재였다. ‘먹고사니즘’에 대한 광신적 믿음, 끝없는 탐욕, 탐욕스럽지 않은 척 하는 가식, 신뢰에 불신으로 응대하는 폭력. 인간을 알면 알수록 인간 세계에 적응하지 못했고, 기어코 인간을 무시무시한 도깨비로 그리게 된다.
그렇다면 그저 인간을 미워하면 될 일인데 그는 인간이 아닌 자신을 미워한다. 마치 자신이 인간의 모든 죄를 뒤집어쓰고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라도 된 듯, 자신을 벌주지 못해 안달한다. 술을 마시고, 불륜을 저지르고, 자살을 기도하고, 약에 중독되고. 처절한 자기 학대의 결과 그는 스물일곱의 나이에 마흔 살 이상으로 보일 만큼 마모되고 말았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의 주인공 라스꼴리니꼬프는 자신을 선악을 초월한 비범인이라 규정하고 그걸 증명하기 위해 고리대금업자를 살해한다. 이와 반대로 요조는 평생 범인 의식에 시달린다.
“또 ‘범인 의식’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저는 이 인간 세상에서 평생 동안 범인 의식으로 괴로워하겠지만 그것은 조강지처 같은 나의 좋은 반려자니까 그 녀석하고 둘이 쓸쓸하게 노니는 것도 내가 살아가는 방식 중 하나일지도 모릅니다(『인간실격』 쏜살문고, 45쪽).”
나는 라스꼴리니꼬프가 가졌던 비범인 의식과 요조가 시달리는 범인 의식은 결국 같은 것이라 생각한다. 라스꼴리니꼬프가 비범인으로써 세상을 심판하려 했다면 요조는 철저한 죄의식을 갖고 스스로를 처벌함으로써 인류의 제물이 되었다.
‘부끄럼 많은 생애를 살았다’기에는 뭔가 부족하다. 우리가 평소 알던 부끄러움과는 뜻이 달라 보인다. 요조는 타인에게 피해를 준 적이 없다. 그런데도 끊임없이 부끄러움을 느꼈다. 우리는 흔히 보지 않는가. 진정 부끄러워해야 할 일에도 뻔뻔히 삶을 유지하는 사람들을. 요조는 자신을 그런 인간과 동류로 보지 않았기에, 인간은 그래서는 안 된다는 고매한 기준이 있었기에 끊임없이 부끄러움을 느낄 수 있었다. 그랬기에 생을 마감하는 숭고한 결단을 내릴 수 있었다.
요조만큼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 어렵기에 우리는 이 폭력의 세계에서 가해자의 위치가 되기 위해 발악하며 산다. 가해자 되기에 더 이상 수치심을 느끼지 않을 때 인간은 실격 당한다는 것을 애써 잊은 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