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당 신규 입주묘들
노랭이가 집안으로 입성하고 마당은 텅 비어버렸을까? 전혀. 곧 새로운 입주묘 후보자들이 마당을 기웃거리기 시작했다. 밥그릇과 집, 캣타워를 치우지 않았기 때문이다. 노랭이 가족들이 먹던 대용량 사료가 거의 새 것인 채로 남아 있었고 내가 만들어 준 집은 너무 커서 어디 버릴 데도 없었다. 이 사료만 주고 더는 마당에 밥을 주지 않기로 독하게 마음먹었다. 길고양이들에게는 절대 아는 척도 하지 않고 간섭도 하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지난 2년 간 너무 괴로운 일이 많았기에 정을 줄 기력도 없었다. 그래서 밥만 주고, 와서 먹든 말든 내버려 두기로 했다. 그러자 하나 둘 후보자들이 빼꼼히 고개를 내밀었다.
먼저, 늘상 다녀가는 노랭이 남편 왕머리가 있다. 노랭이를 찾는 듯 애틋한 눈빛으로 거실 창 앞에 기웃거리다가 밥을 먹고 쉬다 간다. 가끔 노랭이가 바깥을 내다보면서 구슬프게 울 때가 있는데, 그럼 어디 숨어서 듣고 있었는지 금세 달려온다. 노랭이도 가끔은 남편이 궁금한지 남편이 오면 슬쩍 내다보기도 하지만, 딱히 정이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싫지도 좋지도 않고 그냥 조만간 또 만나자고 말하는 지인처럼 데면데면 지낸다.
앞머리도 여전히 마당급식소 단골이다. 다른 데서 밥을 먹고 다니는지 사료보다는 잠자리가 급한 것처럼 보인다. 올 때마다 요상한 소리로 울어대서 부담스럽지만 또 안 보이면 걱정되는 사이가 되어버렸다. 앞머리를 처음 봤을 때는 눈에 큰 상처가 난 줄 알았다. 눈 주변이 피 묻은 것처럼 붉어 보이기도 하고 살이 드러난 것처럼 보이기도 해서 늘 싸우고 다니는 건가 했다. 안면을 튼 후 좀 가까이 다가가서 봤더니 상처가 아니었다. 그냥 눈이 작고 눈 주변에 털이 적어서 그렇게 보였던 것이다. 다른 고양이들에 비해 독보적으로 못생기고 얼굴이 크다는 것을 빼면 평범한 고양이였다. 외모 때문에 책방에 오는 어린이들이 앞머리를 두려워해서 친근감 있게 이름을 ‘강호동’으로 개명했다. 효과가 있어 어린이들도 강호동만 오면 “에~ 강호동이래요~”하면서 우스워하게 되었다. 한때 노랭이를 사랑했던 남자로서 여전히 노랭이를 보면 뜨거운 눈빛을 보내기도 하지만, 노랭이는 역시나 관심이 없다. 현재 노랭이는 살룻 오빠에게 푹 빠져있으므로 강호동이 구슬프게 울어대도 쳐다도 보지 않는다. 돌아서는 강호동의 어깨가 왠지 측은해서 잠자리에 새 이불도 깔아주고 사료도 더 부어주고 있다.
회색 턱시도를 입은 것 같은 고양이도 있다. 녀석은 정말 특별한 이유로 마당을 찾는다. 바로 ‘공굴리기’를 하기 위해서다. 마당에는 동그란 전등이 2개 있다. 인테리어용 바닥 전등인데, 막대사탕 모양이다. 짧은 기둥에 둥근 전등갓이 씌어있는 모양인데, 이 회색 턱시도 녀석은 꼭 동그란 전등갓을 뽑아서 굴리고 노는 것이다. 와당탕탕 소리가 나서 내다보면 전등갓을 빼서 축구를 하고 있는 녀석을 구경할 수 있었다. 다 놀고 가면 나가서 다시 꽂아놓는데, 한참 뒤에 또 와당탕탕 소리가 난다. 보면 녀석이다.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하루에 두 번은 꼭 와서 축구를 하는데 다시 꽂아놓으려면 여간 귀찮은 게 아니다. 문제는 이 놀이를 다른 고양이들이 배운다는 것이다. 나중에는 동네 고양이들이 돌아가면서 찾아와서 전등갓 차기 놀이를 즐겼다. 그중 한 놈은 누워서 네 발로 저글링을 하기도.... 나중에는 너무 귀찮아서 다시 꽂아 놓지 않았는데 신기하게도 이후 공굴리기 빈도 수가 낮아지더니 아예 하지 않았다. 공굴리기가 재미있었던 건지, 내가 꽂아놓은 걸 다시 빼놓는 게 재미있었던 건지, 고양이들의 마음은 도통 모를 일이다.
마당에는 한동안 입주묘가 없었다. 수시로 드나드는 녀석들만 있었다. 그러다 어느 날 단풍잎처럼 예쁜 삼색 고양이 한 마리가 찾아왔다. 처음에는 밥만 먹고 사라지더니, 안전하다고 느꼈는지 내내 머물기 시작했다. 예뻐도 너무 예뻐서 고양이계의 정유미라고 학생들에게 입이 마르도록 칭찬했다. 한 아이가 사진을 보더니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같아요!”라고 해서 이후 앨리스라고 불렀다. 앨리스는 7~8개월 정도 된 청소년냥으로 보였는데, 아직 발정이 난 것 같지는 않았다. 암컷이라서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설마 또 같은 일이 반복되진 않겠지? 앨리스는 사람을 무서워하니까 임신을 하더라도 내 마당에 새끼를 낳지는 않겠지? 불안해서 계속 찾아보게 되고 그러다보니 또 정이 들기 시작했다. 앨리스는 사람뿐 아니라 다른 고양이들도 무서워해서 왕머리나 강호동이 오면 번개같이 빌라 사이 화단으로 도망갔다가 고양이들이 가고 나면 다시 돌아왔다. 저렇게 빠르고 눈치 있는 아이니 내가 돌봐주지 않아도 되겠다 싶었다.
이제 마당의 주인은 앨리스인가 했을 때 새로운 식구가 나타났다. 고등어 가족이다. 어느 날 엄마 고등어가 턱시도 새끼를 데리고 다니는 걸 목격했는데, 아주 작고 불분명한 소리로 “으리 지베 와서 븝 므고 그지(우리 집에 와서 밥 먹고 가지).”라고 했는데, 그걸 어떻게 들었는지 새끼를 데리고 마당으로 왔다. 그런데 무려 새끼가 셋! 턱시도 말고 고등어 아가가 둘이나 더 있었던 것이다. 난 정말 구제불능인 게 그 개고생을 하고도 또 새끼들 보니까 너무 귀엽고 막 예쁘고 설렜다. 남편이 팔짱 끼고 “인간아~ 인간아~” 하면서 혀를 쯧쯧 차는 게 눈에 선했지만, 나도 모르게 ‘로얄캐닌 마더 앤 베이비 캔’을 장바구니에 담고 있었다. 새끼들 중 하나가 많이 약해 보여서 사료만으로는 부족할 것 같아 고영양 습식캔을 주문한 것이다. 실망스럽게도 약한 아이는 사료를 더 좋아했지만, 나머지 식구들은 습식캔을 잘 먹어주었다.
어? 그런데? 분명히! 남은 사료만 다 먹이면 이제 마당급식소 문 닫기로 한 거 아닌가? 귀여움에 장사 없다고 그런 다짐은 벌써 헌신짝처럼 버려졌다. 그렇지만 아무리 귀엽더라도 선은 지키기로 했다. 지금껏 겪어 온 일들을 통해 나는 한 가지 중요한 선을 내 마음에 그었다. ‘내가 할 수 있는 만큼만 하되, 최대한 살리는 쪽으로, 그리고 죄책감 느끼지 않기’라는 것이다.
한발이가 사라지고, 이방인이 죽고, 노랭이를 집안에 들이면서 남편은 마당에 사료를 두지 않는 게 좋겠다고 했다. 나도 며칠간은 사료 그릇을 치웠다. 마음이 편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불편해졌다. 마당에 노랭이 가족만 밥을 먹었던 게 아니기 때문이었다. 갑자기 사료를 주지 않으면 지금껏 먹으러 오던 아이들은 새로 밥 먹을 곳을 찾아야 하는데 그게 쉽지 만은 않을 것이다. 다른 고양이들의 영역을 침범해야 할지도 모르고, 그 과정에서 다치거나 죽을 수도 있다. 또 굶어서 병에 걸릴 수도 있다. 내 마음 편하자고 사료 그릇을 치운다면 너무 많은 고양이들이 지금보다 더 힘든 삶을 살아야 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어차피 남아 있는 사료니 그것만 주기로 한 것이다. 근데 10kg사료를 사 놓았던 터라 남아도 너무 많이 남아 있었다. 그 사료를 다 먹어 갈 때쯤 고등어 가족이 왔고 새 사료를 주문하는 것에 망설임이 없었다. 역시 나라는 인간은 다짐 같은 건 안 하는 편이 나았다. 어차피 안 지킬 거면서.... 그래서 급식소 운영은 계속 하기로 했다. 대신 지나치게 감정 이입해서 나를 망치는 일은 없도록, 어떤 일이 있어도 내 탓을 하지는 말자고 다짐했다. 그래야 오래 급식소를 열 수 있을 것 같았다.
고등어 가족들은 사람 손을 타지 않은 녀석이라 나를 보면 도망가기 일쑤였고, 데크를 자기들 영역이라 생각했는지, 내가 밥 주러 데크 위로 올라가면 하악거리기도 했다. 서로의 거리를 지키지 못해 상처 받고 상처 주었던 시절들을 생각하면 그게 다행이라 생각했다. 그렇게 인간을 싫어하는 채로 무사히 커서 짧더라도 자유롭게 살다 가길 기도했다.
그러다 얼마 후 가장 약했던 새끼가 사라졌고, 몇 주 뒤에는 데크 위에 쓰러진 턱시도 아이를 발견했다. 급하게 데리고 들어와 몸을 녹이고 사료를 갈아서 물과 함께 조금씩 먹여 보았지만 몇 시간 만에 죽었다. 그리고 또 얼마 가지 않아 가장 건강했던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결국 어미만 남았다. 그때쯤 ‘고양이 학대 단톡방’ 뉴스를 보게 됐다. 가만히 놔둬도 죽어가는 존재들을 잡아다 유희거리로 죽이는 사람들과 한 시대를, 비슷한 장소를 살아간다는 것이 끔찍스럽다. 무엇을 증명하고 싶어 그것을 사진과 영상으로 공유했던 걸까. 그들의 마음을 이해하고 싶지는 않다. 이해도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들을 위해 존재하는 가치다.
길고양이 관련 뉴스를 보면 댓글에 꼭 이런 말이 있다. “길고양이 때문에 죽어가는 새는 어쩔 거냐!” 개고기 먹지 말라고 하면 “소, 돼지는 왜 먹느냐?”하는 것과 꼭 같은 사고방식이다. 죽어가는 소와 돼지가 안타깝다면 그 말을 하는 자신부터 비건이 되면 된다. 마찬가지로 죽어가는 새가 안타깝다면 새를 위해 먹이를 주고 생태를 보호하면 된다. 새를 보호하기 위해 길고양이를 죽여야 한다는 것은 억지에 가깝다. 만약 우리나라가 길고양이의 생태를 너무나도 잘 보호하여 개체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있는 상황이라면 달리 생각해 볼 수도 있다. 그러나 길에서 10마리가 태어나면 그중 절반 이상은 새끼 때 죽고, 나머지는 채 2-3년이 못 되어 죽는다. 병들어 죽고, 굶어 죽고, 차에 치여 죽고, 학대 받아 죽고. 그런데 이제는 놀잇감으로 죽고 전시되어야 한다니.
턱시도 아가가 죽어가던 날, 사실 내가 그 아이를 먼저 발견했던 게 아니다. 평소 들어 본 적 없는 울음소리가 계속 들려와 나가보니, 마당에서 밥만 먹고 가는 치즈 태비 녀석이 한 곳을 맴돌면서 울고 있었다. 나를 보면 늘 잽싸게 도망가는 녀석이 가지도 않고 그 자리에서 이상한 소리를 계속 내길래 발 아래를 보니 턱시도 아가가 쓰러져 있었다. 내가 아가를 데리고 집에 들어가자 치즈 태비는 사라졌는데, 나는 그게 죽어가는 새끼를 보고 알리려고 낸 울음소리라고 생각한다. 자기 새끼도 아닌 이방인과 흰둥이를 거두어 젖을 먹인 노랭이처럼 고양이들은 서로를 살리려고 이리 애쓰는데 그렇게 어렵게 살아난 아이들을 너무 쉽게 죽이는 인간을 목도하면 허망해진다. 나는 언젠가부터 동물에게 ‘사람보다 낫다’는 말을 쓰지 않는다. 동물들은 늘 대부분의 사람보다 낫다.
적극적으로 살리려고 하지 않아도 좋다. 고양이를 사랑하지 않아도 좋다. 아니 미워해도 된다. 다만 죽이지는 말자. 죽어가는 것들이 너무 많은 세상이다. 나부터 덜 죽이는 쪽으로, 최대한 살리는 쪽으로 내 삶의 기준을 바꾸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