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기가 되어버린 김노랭
“으윽끼끼꺄꺄까깍”
요상한 소리가 멀리서 들린다. 돌아보면 노랭이가 아주 낮은 포복 자세로 서서히 기어오고 있다. 마치 슬로우 비디오 같은데 보고 있는 게 답답해서 “그냥 빨리 와!”하면 그때서야 속도를 내고 총총총총 달려와 품에 와락 안긴다.
고양이 이야기를 쓰기 시작한지 두 달이 되어간다. 수업이 없는 월요일과 화요일에 서재에 틀어박혀 글을 썼다. 좌식 책상을 두고 바닥에 앉아 글을 쓰는데, 그러면 룬, 우란, 살룻은 각각 내 근처에 자리를 잡는다. 룬은 내 앞 창가에 세워져 있는 캣폴 해먹에 앉아 햇빛을 받으며 꼬박꼬박 졸기 시작한다. 우란이는 캣베드라고 불리는 고양이용 이불베게 세트가 있는데, 그 안으로 쏙 들어가 잠을 잔다. 살룻은 내 무릎에 눕거나 아니면 방석 위에 눕는다. 그럼 노랭이는?
노랭이는 우란이가 무서워 서재 안에 들어오지 못하고 거실에서 우란이가 푹 잠들 시간까지 기다린다. 시간이 좀 흘렀다 싶으면 밖에서 울기 시작한다. 독특하게 끙끙 앓는 소리를 내는데, 그럼 내가 밖을 내다보고 “우란이 언니야 잠들었으니까 빨랑 온나.”하고 속삭인다. 그럼 눈치를 보면서 천천히 걸어오는데 지나치게 낮은 자세로 천천히 기어오면서 요상한 소리로 운다. 그럼 우란이가 깰 지도 모르는데 왜 그러는지 알 수가 없다.
서재로 들어오면 나에게 달려와 다리 사이에 얼굴을 파묻고 한참 가만히 있는데, ‘들장미 소녀 캔디’나 ‘빨강머리 앤’ 역할에 심취한 것 같다. 설움을 참으며 끝내 이 고난을 극복하고 말 것이라며 어깨를 들썩이는 소녀 역할을 하고 있기에는 너무 포동포동하다. 노랭이가 집안에 들어온 뒤로 세 마리 고양이는 살이 조금씩 빠졌지만, 노랭이는 1kg 넘게 쪄서 현재 살룻 다음으로 몸무게가 많이 나간다. 해피 라이프를 즐기고 있는 노랭이다.
제일 잘 지내고 있는 주제에 비운의 주인공을 놓치고 싶지 않은지 연기가 날로 늘어간다. 노랭이는 우란이는 정말 무섭고, 룬은 우란이 깨어있을 때만 무섭고, 살룻은 우스워한다. 처음에는 살룻 앞에서도 낮은 자세를 보여줬는데, 요즘 좀 친해지고, 살룻이 덩치만 컸지 완전 헛빵이라는 것을 알아챈 이후로는 오빠를 우습게 보고 장난을 걸거나 때리기도 한다. 특히 살룻이 코를 골며 푹 자고 있으면 옆에 가서 때리거나 밀어서 잠을 깨운다. 살룻이 화를 내며 솜방맹이질을 해도 도망가지 않고 끝까지 밀어내서 옆에서 잔다. 그럼 결국 방석에서 밀려나는 쪽은 살룻이 되어버린지 오래다.
룬은 별로 무서워하지 않으면서 그런 척 연기를 한다. 룬이 지나가다 노랭이를 보고 못마땅해서 으르릉 소리를 내면 노랭이는 바로 그 자리에서 발라당 넘어져 버린다. 나중에는 룬이 멀리서 쳐다만 봐도 눈빛 레이저를 맞은 듯 발라당 쓰러졌다. 좀 오버다 싶은데, 노랭이가 발라당 쓰러지면 룬은 당황해서 안절부절 하다 그 자리를 피하는데, 아마 그걸 노리는 듯 싶다.
11살 룬, 10살 살룻, 9살 우란이는 활동성이 거의 없는데, 노랭이가 들어오면서 활기가 생겨서 좋았다. 장난감 반응도 좋고 살룻과 장난도 치고, 우란이와 싸움도 하니 나름 중년층 고양이들이 운동도 되고 좋다고 생각했는데, 까불어도 너무 까분다 싶을 때도 있었다. 고양이를 키우면서 한 번도 고양이 때문에 집이 어질러진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다. 무엇을 놔둬도 다음날 그냥 그 자리에 있었다. 컵도, 연필도, 종이도, 책도. 그런데 노랭이가 오면서 “고양이의 만행.JPG” 같은 게시물을 이해하게 되었다. 쓰레기통을 엎어놓기도 하고, 화장지를 뜯어놓기도 하고, 화분을 깨놓기도 하고, 연필이나 지우개를 바닥으로 떨어뜨려놓기도 하고. 박스를 다 뜯어놓기도 하고.... 다행인 것은 책방 고양이라는 의식은 있었던지 책을 망가뜨리지는 않았다.
가장 큰 위기는 남편이 아끼는 엄청 큰 화분을 와장창 해버렸다는 것! 책장 위로 뛰어오르다가 화분에 걸쳐져 있던 나무 판을 밀어버리는 바람에 화분이 넘어지면서 깨져버렸다. 만약 나무도 부러졌다면 남편이 엄청 분노했겠지만, 다행히 나무는 목숨을 건졌다. 새 화분을 사면서 속이 깊은 길쭉한 박스가 하나 생겼는데 그 박스에 ‘노랭이 생각의 방’이라고 써 놓고 말썽을 피우면 그 안에 넣어놓았다. 물론 10초면 탈출해버리지만.... 나중에는 우란이에게 쫓기면 본인이 직접 생각의 방으로 들어가서 지금도 버리지 않고 두고 있다.
남편의 분노를 일으키는 사건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는데, 한날은 화분이 잔뜩 파헤쳐져 있어서 이게 무슨 일인가 보니 화분에 똥을 싸 놓은 게 아닌가! 새 집을 맞이해서 다시 살아보겠다고 애쓰는 해피트리가 노랭이 똥으로 시름시름 앓게 되었다. 이런 적은 처음이라 너무 큰 충격에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고심하다 일단 신문지로 흙을 파지 못하게 막아놓았다. 그렇게 사건이 일단락되나 했는데....
의지의 노랭이는 신문지를 뜯고 또 화분에 올라가 오줌을 싸 놓았다. 어찌나 많이 쌌던지 노란 오줌이 그 두꺼운 흙을 뚫고 바닥까지 내려와 물받침을 흘러넘쳐 바닥에.....
이것은 신문지로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 원인을 알아야 했다. 갑자기 화분에 배변을 하는 데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매의 눈으로 지켜본 결과, 노랭이는 화장실 가는 것이 불안한 것 같았다. 고양이 화장실은 다용도실에 있는데, 볼 일을 보는 동안 우란이가 와서 노랭이를 때리는 일이 일어났다. 입구가 하나라 퇴로가 없다 보니 우란이가 올까 두려워서 볼 일 보러 가기가 싫었던 것 같다. 노랭이가 화장실을 가려고 할 때 내가 따라 가서 입구를 닫고 안심시켜주니 엄청난 양의 똥과 오줌을.... 냄새가 심각했지만, 시들어가는 화분을 생각하면 견뎌야 했다. 코를 움켜쥐고 “아이구 우리 노랭이 똥 쌌쪄요? 아이 똥도 예쁘게 싸네. 오구오구 오줌도 같이 싸네! 거 시원하게도 잘 싼다.”하면서 리액션 폭풍을 선사했다.
노랭이는 그게 꽤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다. 화장실에 가고 싶으면 내 주변에 와서 울어댔다. 그럼 안아들고 화장실로 가서 모래 위에 올려주면 볼 일을 봤다. 분명 안 그랬는데, 점점 갈수록 볼 일을 다 보고 모래도 덮지 않고 그냥 나가버린다. 그럼 내가 모래를 덮어주고.... 화분에 안 싸는 것만으로 다행이다 싶어 노랭이 하자는 대로 해주고 있었는데 슬슬 걱정이 됐다. 내가 없으면 볼 일을 참는 것 아닐까? 자고로 잘 먹고 잘 싸는 것은 건강의 기본인데, 잘 먹기만 하고 싸는 걸 참으면 안 될 것 같았다. 매번 화장실에 안고 갈 수 있는 건 아니니까. 내가 집을 비울 때도 있으니 이렇게 습관이 들면 나중에는 화장실이 아니라 병원으로 안고 달려가야 하는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가장 좋은 방법은 화장실을 열린 공간에 두거나 이곳저곳 흩어놓는 것이지만, 아무래도 사람들이 드나드는 곳이라 그럴 수는 없었다. 고민이 되어 며칠 노랭이를 관찰한 결과, 괜한 에너지를 쓴 셈이 됐다. 손님들의 증언에 의하면 노랭이는 내가 수업을 하거나 바쁠 때는 혼자서도 화장실에 잘 갔다. 그냥 나를 부려먹는 게 즐거웠거나, 추임새를 넣어주면 똥이 더 잘 나온다거나 그런 이유에서 나와 같이 화장실에 가고 싶었나보다.
5년이라는 짧은 생 동안 열네 마리의 새끼를 낳고 야생의 삶을 치열하게 살았던 노랭이는 집안에 들어오면서 ‘다섯 짤’ 애기가 되었다. 미운 다섯 살이라 했던가. 이 글을 쓰는 두 시간 내내 노랭이는 내 무릎 위에서 내려오지 않는다. 다리가 너무 저려서 끌어내리려고 하면 손을 물어뜯는 바람에 현재 다리에 감각이 없는 상태다. 노랭이도 초등학교 갈 나이(8살)가 되면 조금은 의젓해지려나? 그럼 또 많이 서운 할 것도 같다. 남은 생에 내내 까불어도 좋으니 오래오래 내 곁에 있어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