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삑 삑 삑 삑"
이틀째 창문 밑에서 울어댄다. 책방 창문과 옆 빌라 창문을 바쁘게 오가다면서 울어댄다. 마치 창문 밖으로 버려지기나 한 것처럼 말이다. 다가가면 나무 위로 잽싸게 올라가 나를 빤히 내려다보며 또 "삑삑" 운다. 어쩌란 말이냐....
오랜만에 예전 한발이 친구가 놀러 와서 데크 위 소파에서 자고 있길래 사진을 찰칵 찍었다. 찍고 확대해 보는데 '어라? 얜 뭐지?' 웬 흰둥이 녀석이 귀신처럼 찍혀 있는 게 아닌가! 눈을 비비고 바라보니 온 몸이 새하얗고 오드아이인 녀석이 숨어서 나를 경계하며 바라보고 있었다. 한발이 친구 고양이를 경계하진 않는 걸로 보아 길에서 태어난 녀석이구나 했다. 아직 5개월 정도밖에 안 돼 보이는 녀석이 어쩌다 혼자 다닐까 안쓰러워 습식캔을 좀 부어주고 멀리 물러나 있으니 다가와서 허겁지겁 먹어댔다. 며칠 잘 멕여야겠다 그렇게 생각했는데....
그 후로 내내 우는 것이다. 책방 안의 고양이를 보더니 방충망에 몸을 비비대며 애정을 표시했다. 아마 고양이 무리에서 지내다가 길을 잃어버린 모양인데, 계속 울어대니 영 눈치가 보였다. 사람 손을 탄 것 같진 않아 구조는 무리겠다 싶었는데, 인스타그램에 올렸더니 입양하고 싶다는 연락이 왔다. 모르는 사람이라면 구조는 어려울 것 같다고 했을 테지만, 예전 제자가 묘연을 느꼈는지, 주변에도 물어보고 함께 살겠다는 각오를 하고 연락을 해와서 한 번 잡아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동안 얼굴을 익히고 좀 놀아주다 보면 경계를 풀겠지 싶었다. 그런데 그날 비가 왔다. 아가야(임시 이름) 피부 상태가 별로 좋지 않아 보였는데, 비까지 맞으면 더 악화될 것 같았다. 혹시나 싶어 창문 너머로 장난감을 흔드니 너무 신나하며 다가왔다. 30분쯤 놀아주니 마음이 놓였는지 내 손에 냥냥펀치를 날리기도 하고 냄새를 맡기도 했다. 이쯤이면 되겠다 싶어 창문을 열고 장난감으로 살살 꼬시니까 책방 안으로 쑥 들어와서 얼른 문을 닫았다.
깜짝 놀란 녀석이 불붙은 로켓포처럼 책방을 질주하기 시작해서 와장창창 난장판을 만들더니 결국 내가 정말 아끼고 사랑하는 고양이 조각상 하나를 깨 먹었다. 덩달아 책방 고양이들도 놀라서 "이기 머선 129!" 하며 눈이 뚱그래졌다. 한참을 뛰고 뒹굴고 울더니 차츰 안정이 된 녀석은 책방 이곳저곳을 탐색했다. 아가야는 고양이들이 있는 것에 크게 안심하는 것 같았다. 살룻과 노랭이가 그중 친절해 보였던지 내내 쫓아다니며 치대려고 했다. 내가 있으면 거실 캣타워 위로 피신해서 내려오지 않고 울어댔지만, 밥도 잘 먹고 똥도 오줌도 예쁘게 쌌다. 피부도 가까이서 보니 낫고 있는 상태여서 조금만 순화가 되면 입양을 보내기로 했다.
다행히 일주일 지나니 더는 울지 않았고, 내가 있어도 캣타워 밑으로 내려왔다. 노랭이와 살룻을 졸졸 따라다녀서 솜방맹이를 얻어맞기도 했는데, 며칠 만에 전세가 역전되어 살룻은 아가야에게 얻어맞는 지경이 되었다. 노랭이는 오랜만에 체력 레벨이 맞는 상대를 만나 신났는지 내내 레슬링하고 잘 뛰어놀았다.
아가야가 오면서 책방에 활기가 생겼다. 책방 고양이들이 나이가 있다 보니 아무래도 장난감 반응도 별로 없고 늘 잠만 자고 그랬는데, 아가야가 오고 경쟁심이 생겼는지 놀이 반응이 격렬해졌다. 밥도 더 많이 먹고 운동도 많이 해서 그런지 체중도 늘고 몸 상태도 눈에 띄게 좋아졌다. 또 아가야를 입양하기로 한 제자가 장난감과 방석, 스크래쳐 등 이것저것 선물을 보냈는데, 그게 썩 맘에 들었는지, 기분이 한결 좋아져 경계심도 많이 사라졌다. 병원에에서도 상태가 좋아졌다는 말을 들으니 '아가야 그냥 내가 키워?' 하는 맘이 잠깐 들기도 했다.
그러나 이미 캣타워까지 질러버린 입양자를 생각해서 그럴 수는 없었다. 또 다섯 마리가 되면 병원 데려가기도 힘들다. 나는 보통 두 마리용 이동장은 등에 메고, 양 손에 하나씩 이동장을 들고 병원에 간다. 그렇게 20kg를 이고 지고 이동하면 나의 저질 체력으로는 5분만 걸어도 심장이 뻐근하다. 여기에 한 마리를 더 보태면 목숨이.... 체력이 좀 더 강해지면 생각해 볼 일이다.
아가야는 20일 정도 함께 지내다가 입양을 갔다. 입양 가기 전날엔 스스로 나에게 다가와 냄새도 맡고 장난도 치고 바로 앞에 누워 눈키스도 해주었다. 입양자에게도 곧 그렇게 해주리라 믿는다. 고양이가 까칠하다지만, 내가 아는 고양이들은 늘 사람을 믿고 싶어 했다. 믿고 다가가고 싶지만 그랬다가 다치고 죽은 가족과 동료들에 대한 기억이 유전자 깊숙이 박혀 있어 그게 쉽지 않을 뿐이다. 그렇지만, 진심을 다해 눈을 맞추고 밥을 먹이고 예쁘다, 사랑한다 말해주면 어느새 내 발 밑에 다가와 '스윽'하고 몸을 비빈다. "나도 너를 조금은 믿어보기로 했어.'하고.
내 마당이 고양이들에게 긴장된 하루를 잠시 내려놓을 수 있는 그런 곳이 되길 바란다. 조금은 신뢰할 수 있는 인간이 사는 곳으로 동네 고양이들 사이에 소문나길 바란다. (너무 믿을 수 있는 곳이 되는 것은 부담스럽다.) 배고픈 길고양이들에게 사료를 주고, 아프면 약간의 치료라도 해줄 수 있을 만큼만, 딱 그만큼의 마음의 품을 유지하며 살고 싶다. 정말 어려운 일일지도 모른다. 경제적 상황이 나빠질 수도 있고, 내 몸이 따라주지 않을 수도 있다. 나는 나를 위해 고양이와 함께 살기를 선택한 사람이라 힘들면 언제든 고양이를 놓을 수도 있는 사람이다. 내가 딱 그 정도의 인간임을 인정해야 늘 경계할 수 있다.
나 하나의 삶도 주체를 못 해 허우적대기 바빠 주변을 돌아보지 못하고 살았다. 그런 내가 10년 전 고양이를 만나면서 삶의 목표가 생겨났고, 내 쓸모를 찾게 되었다. 아직은 많이 부족하지만, 다른 존재를 보살피면서 아무런 기대없이 온 마음으로 사랑하는 법도 조금씩 배우고 있다. 누구도 내게 가르치지 못했던 것을 고양이에게 배우고 있다. 앞으로도 나에게 많은 가르침을 줄 '고양이 선생님들'과의 만남을 기다리며 '고양이쌤' 책방 문을 언제나 활짝 열고 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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