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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티아고 순례길, 포르투갈 루트 후기 (7)

by 휘피디

걷기 시작한 지 7일째의 아침. 일어났을때 몸이 꽤 가벼웠다. 쭉 25km이상 걷다가 전날 20km정도만 걸었는데 그 정도 차이로도 몸 상태에 영향이 생기는 걸까. 혹은 내 몸이 이 길에 적응을 해나가고 있는 걸까.

오늘은 평소보다 가방이 2키로 정도 무겁다. 물과 주스와 빵, 그리고 빵에 바를 생선 으깬 것? 을 챙겨가기 때문이다. 앞으로 매일 점심식사를 이걸로 대체하려고 한다. 아침에 7시 반쯤 나왔는데, 어두워서 길이 잘 안 보인다. 포르투갈에선 그래도 이 시간에 이 정도로 어둡진 않았는데. 이게 계절이 지나가서인지 혹은 북쪽으로 올라와서 생기는 현상인지 잘 모르겠다. 어둠 속을 헤매며 걷다가 스위스에서 온 크리스틴을 만났다. 별 거 아닌 말도 크게 리액션해주는 밝은 친구다. 크리스틴과 열두시까지 같이 걸었다. 살아온 얘기부터 종교, 직업 등 별 얘기를 다 한 거 같다. 짧은 영어로도 계속 말들이 이어지는 게 재밌다. 호응을 크게 해주니 나도 덩달아 신나서 온갖 얘기를 하게 된다. 그녀를 보며 나도 타인에게 밝게 호응해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했다.


20241023_110748.jpg 오늘은 언덕을 많이 오르내릴 모양이다. 날씨가 짱 좋다!
20241023_102757.jpg 크리스틴과 함께


크리스틴은 글루텐 프리 식사를 하고 있어서 식당을 가지 않는다고 한다. 먹을 게 없다나. 나와 비슷한 처지라 공감이 되었다. 나도 빵 좀 그만 먹고 싶은데... 걷다가 성당 앞에 벤치가 보였다. 둘 다 먹을 걸 따로 싸온 터라 거기 앉아 간식을 먹었는데, 크리스틴이 싸온 걸 보니 오트밀에 물 부어 먹는 거였다. 순간 크리스틴이 불쌍해졌다. 저렇게 먹어야한다면 정말 슬플 거 같다...
크리스틴은 숙소를 그때그때 기분 내키는대로 잡는 스타일이었다. 간식까지 같이 먹은 뒤 크리스틴은 이 동네에서 숙소를 찾겠다고 하여 갈라섰다. 그 뒤로 혼자 두 시간쯤 더 걷다가 문 연 케밥집이 보여 들어갔는데 의외로 케밥이 입에 잘 맞는다. 고기, 야채, 감자튀김. 그놈의 빵이 아닌 것 만으로도 기쁘다!


오늘의 목적지는 레돈델라. 걷는 거리는 17km. 거리가 점점 짧아진다. 조금 덜 걷게 된 것만으로도 컨디션이 날아갈 것처럼 좋다. 레돈델라에 도착해 숙소에 도착했다. 구글 별점에 베드버그가 나왔다고 해서 긴장을 좀 했는데, 가보니 실제로 깨끗하지는 않았지만 조심하면 별 문제는 없을 것 같다. 이제 남은 일정은 4일이다. 4일?? 4일만 걸으면 이 길이 끝난다고?? 이제야 몸이 적응했는데... 확실히 포르투에서 시작하는 일정이 짧긴 하다. 이대로 2주일은 더 걸을 수 있을 거 같은데. 이렇게 조금 걸어서야 산티아고의 별들에게 뭔가를 물어볼수 있을까.


20241023_154537.jpg 숙소 앞엔 큰 정원이 있었다. 힐링타임이다.


별들에게 물어보는 얘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사실 난 11년 전 산티아고 길을 걸을 때 신비한 경험을 한 바 있다. 매일 새벽 4~5시에 출발하는 일정으로 길을 걸었는데, 그러다보니 밤하늘에 별이 매우 많았다. 새벽에 걷기 시작한 첫 날 유성이 떨어지는 걸 보았다. 유성을 보는데 그런 생각이 들더라. 다음에 또 유성이 떨어지면 어떤 소원을 빌어야 할까?

아마도 떨어지는 유성을 보며 소원을 빌면 이뤄진다, 라는 말은 그 찰나의 순간도 잡을 수 있을만큼 그 소원을 계속 마음에 품고 그것을 생각하며 산다는 의미이리라. 그렇게 살면 유성에 빌지 않아도 그 소원이 이뤄지겠지. 아니, 소원을 이뤄내겠지. 그럼 내가 마음 속에 품고 계속 생각하며 살 화두는 무엇인가. 이런 생각을 하며 그 길을 걸었다. 그리고 25일 정도를 걸어 답을 얻었다. 내가 평생 마음에 품고 살아야할 소원은 이것이구나.

그 날은 산티아고에 도착하는 날이었다. 여정의 끝에서 나는 별에게 물어볼 소원을 정했고, 고개를 들었다. 그리곤 소원을 빌었다. 그 순간 하늘에서 유성이 떨어졌다. 마치 나의 소원에 대답하듯이. 당시에 너무 흥분해서 어두컴컴한 산티아고길에서 비명과 환호성을 몇 번이나 질렀던 기억이 난다. 하늘이 나에게 허락해준 기분이었다. 너는 그런 마음을 품고 살아도 된다고. 앞으로 잘 해보라고. 그게 벅차 견딜 수가 없었다.

시간이 꽤 흘렀다. 당시 유성을 보며 빌었던 소원이 이뤄졌냐고? 아니다. 나는 그 소원을 제대로 마음에 품고 살지도 못했고 소원을 이룰 기회를 여러번 놓치기도 했다. 역시 유성이 그냥 소원을 이뤄주는 것은 아니다. 내가 잘 해야 하는 거겠지.

어쨌건 11년 전 그런 일을 겪은 터라 이번 여정에도 기대를 하고 있다. 한 번 더 소원을 빌 수 있을까. 그럼 나는 무슨 소원을 빌어야 할까. 마지막 날, 산티아고 가는 길이 제발 맑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숙소에선 카이라는 독일에서 온 잘생긴 남자와 한방에 머물게 됐다. 79년생인데 딸이 둘이고 한 명은 중학생이랜다. 나는 뭐하고 사는 거지. 물어보니 산티아고 길이 처음이란다. 이 친구 역시 프랑스 루트는 사람이 많을 것 같아서 포르투갈 루트로 왔단다. 나름 두 번째 걷는 거라고 이러쿵 저러쿵 조언을 해주다보니 왠지 스스로가 우습다. 고작 한 번 더 왔을 뿐인데 그게 뭐라고 이렇게 얘기해주고 싶은 게 많은지.

저녁식사는 숙소 내에서 간편식으로 때웠는데, 인도네시아에서 온 두 가족 같이 먹게 됐다. 그 중 여자 한 분이 한국 드라마 팬이다. 한국어 대사를 흉내내는데 엄청 웃기다. 그 옆에 있던 남편은 아내가 하도 많이 봐서 자신도 대사를 외웠댄다. 나도 덩달아 유명한 대사를 흉내내줬더니 다들 자지러진다. 실장님~ 같은 것들. 주로 얘기 나오는 게 사랑의 불시착, 사내 맞선 같은 드라마다. 역시 세계에 통하는 건 로코인가!

여정을 돌이켜보면 오다가다 사람들을 많이 만나기는 하는데, 하는 얘기들이 비슷하다. 어디서 왔냐. 어땠냐. 오늘 어디까지 가냐. 이 길을 왜 걷냐 등등. 조금 더 깊은 얘기까지 하게 된 경우는 체코아저씨와 마티스와 크리스틴 정도였던 것 같다. 역시 동행해야 얘기가 나온다.

돌이켜보니 걷다가 한국인을 거의 보지 못했다. 다른 나라 사람들은 나 한국인 많이 봤어! 라고 하는데 이상하게 나는 한국인과 인연이 잘 닿지 않는다. 걷다가 다섯 명이 같이 다니는 한국인 그룹을 딱 한번 만났는데, 어째서인지 동행하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당시엔 마티스와 같이 다니기도 했고 한국인 그룹이 시끄러워서 민폐를 끼친다는 산티아고 민원을 여러 루트로 들어서 일부러 피하기도 했다. 혼자 걷는 한국인을 만나면 참 반가울 거 같은데, 그런 일이 생길까.


8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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