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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티아고 순례길, 포르투갈 루트 후기 (8)

by 휘피디

오늘은 이틀치의 이야기다.

아침 7시, 어두운 와중에 길을 나섰다. 아마도 8~9시 사이에나 해가 뜨겠지. 걷는 길 사이사이로 별이 보였다. 11년 전처럼 부디 산티아고에 도착하는 날에도 저렇게 별이 보였으면 좋겠다.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라는 지명 자체가 별들의 들판이라는 뜻 아닌가. 그날은 새벽부터 걸어야지.

아침에 아무 것도 먹지 않고 공복으로 걷는데 오히려 컨디션은 좋아진 느낌이 들었다. 한시간 정도 걷다가 문 연 마트가 있어서 물과 사과를 하나 샀다. 사과를 생수로 대충 씻어 먹는데 그렇게 맛있을수가 없다. 사과 하나로 이렇게 행복할 수 있다니. 행복이란 참 작은 것에서 찾아온다.

이어서 걷는데 해가 뜨기 시작했다. 마침 걷던 마을의 경치가 아주 좋았는데, 그 마을 너머로 뜨는 태양이 나를 흥분시켰다. 뭔가 벅차오르는 느낌. 갑자기 뭔가가 차올라 '나는 할 수 있다!' 세 번을 외쳤다. 무슨 시험을 앞둔 수험생도 아닌데 가슴이 벅차니 뭐라도 소리를 지르지 않을 수 없었다.


20241024_090331.jpg 가슴이 충만해지던 마을
20241024_090410.jpg 기념 셀카 한 장
20241024_091653.jpg 소리를 안 지를 수 있겠는가?


오늘의 목적지는 폰테베드라. 거리는 20km. 오늘의 일정이 끝나면 산티아고까지 3일만 남는다. 시작한지 얼마 되지도 않은 여정이 이렇게 끝나가고 있다.

오늘의 순례길은 별다른 일이 없었다. 아침에 사과 하나로 행복하고, 일출을 보며 감동받고. 그 뒤론 조용히 명상에 빠진 것처럼 아무 생각없이 계속 걸었다. 이렇게 좋은 기분을 괜한 생각들로 망치고 싶지 않았다. 점심은 목적지에 도착해서 먹을 요량으로 쉬지 않고 걸었고, 그렇게 폰테베드라에 도착했다.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씻지도 않고 바로 나와 점심으로 초밥 부페를 갔다. 어떻게든 빵 아닌 요리를 먹고 싶어서 전날 밤부터 검색해본 곳이다. 오픈까지 삼십분 기다려서 들어갔는데, 초밥의 퀄리티는 살짝 아쉬웠지만 그래도 밀가루가 아닌 음식을 먹은 것 만으로도 흡족했고 가성비도 좋았다. 부페다 보니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며 먹다가 이번 순례길 동안 가장 과식한 식사가 되었다.

씻고 쉬다가 숙소에서 줄리를 만났다. 며칠 전 포르투갈의 마지막 숙소에서 만났던 체코 출신의 예쁜 아가씨다. 이렇게 두 번이나 만나면 보통 친해질텐데 아쉽게도 대화를 많이 하지 못했다. 왜냐, 이 친구가 술을 워낙 좋아하는데 나는 막 술을 끊어서. 이 친구는 숙소에서 씻자마자 와인을 까는 타입이라 말을 못 붙이겠다. 술 좋아하는 친구들이 자연스레 그녀 곁에 모여 왁자지껄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그러고보면 술이 참 좋은 윤활유기도 하다. 조절하기 어려워 그렇지.


오늘의 저녁 식사는 여전히 간편식. 전자렌지용 윙봉과 간편밥, 사과 바나나를 먹었는데 적당히 흡족했다. 점심을 너무 많이 먹어서 저녁엔 속이 불편한 터라 적당히 먹다 그만두었다. 식사 후엔 그냥 침대에 앉아 책을 봤다. 유발 하라리의 신작 넥서스를 다 읽었다. 이번 여정을 위해 e북 리더기를 구입해서 왔는데 매우 유용하게 쓰고 있다. 한국에서 바르셀로나로 오는 공항과 비행기 안에서만 책 여섯 권을 읽었고 그 뒤로도 틈틈이 읽다보니 이번 여정 중에 읽은 책이 15권이 넘는다. 책이 집보다 더 잘 읽히는 게, 여행과 책은 참 좋은 친구아닐까.


다음 날 아침도 이른 아침에 눈이 떠졌다. 전날 점심에 부페에서 너무 과식을 해서인지 아직도 속이 더부룩하다. 그래도 에너지 섭취를 해야할 것 같아 사과와 바나나를 한 개씩 먹고 길을 나섰다. 처음 먹을 땐 잘 안 들어갔는데 두어시간 걸으니 금세 배가 꺼져 걷는 내내 배가 고팠다. 인체란 이 얼마나 에너지 효율 낮은 놈인지!


20241025_080233.jpg 아름다웠던 폰테베드라의 새벽길


어둠 속을 걷는데 앞뒤로 삼삼오오 모여 걷는 사람들이 보인다. 산티아고가 가까워진 위치다 보니 알게 모르게 무리가 생긴다. 하지만 나는 아니지. 외로운 길이다.

걷는 것은 갈수록 익숙해지는 것 같다. 족저근막염도, 아킬레스건염과 각종 디스크도 점점 증세가 약해지고 있다. 몸이 적응하는 건지, 술을 안 마셔서 염증이 줄어드는 건지는 모르겠다. 생각은 점점 없어지고 나는 어느샌가 걸음을 내딛는 기계같은 존재가 된다.


두 시간쯤 걸었을때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비가 본격적으로 내리니 다들 커피숍에 들어갔는지 정말 길 주변에 나밖에 없었다. 그 속을 빠른 걸음으로 걸었다. 나는 이 길을 왜 걷는 걸까. 숙제하는 기분으로? 아니면 기왕 시작했으니 끝을 보자는 마음으로? 쉽게 답할 수 없는 문제지만, 이 길에서 '금주'라는 실마리를 얻은 것 만으로도 내겐 의미가 있었다.

오늘의 목적지는 칼다스 데 레이스. 거리는 21km. 숙소는 1인실로 잡았다. 전날 숙소가 20명이 큰 방 한 곳에 모여있는 구조라 시끄러웠기 때문이다. 그리고 간만에 좀 좋은 곳에서 자고 싶었다. 그렇게 빗 속을 뚫고 도착한 숙소는 아주 좋았다! 오랜만에 혼자 쓰는 방에 들어오니 뭔가 에너지도 더 생기는 느낌이다.


20241025_124153.jpg 여정 중 가장 좋았던 숙소


숙소에 짐풀고 밥집을 찾는데, 스페인 전통음식은 보통 해물이라 땡기는 게 없었다. (내 입맛은 돈까스 제육볶음 된찌 부찌 김찌를 좋아하는 한국 평균 남성 입맛이다) 결국 주변 수제 햄버거집에 가서 버거와 나초를 먹었다. 둘 다 꽤 맛있었고, 양이 많았다! 어제에 이어 오늘 점심도 배 터지게 먹고 리타이어. 웬지 아침을 부실하게 먹으면 보상심리로 점심을 과식하게 되는 것 같다. 저녁은 꼭 조금 먹어야지.


20241025_132254.jpg 스페인 스타일 수제버거


빨래방에서 빨래를 하면서 다음 날 묵을 숙소와 산티아고에서 묵을 숙소를 잡았다. 산티아고에서는 오전 미사를 받아야지. 그러고나서 피스테라를 당일치기로 갈까... 그런 생각을 했다. 아직은 모르겠다. 산티아고까지 가봐야 감흥을 알 수 있으리라.

빨래방에서 오늘의 대미를 장식할 이벤트를 맞이했다. 신발 깔창이 비에 푹 젖어서 건조기에 돌렸는데 - 며칠 전 한 번 돌린 적이 있는데 그땐 멀쩡했다 - 이게 온도가 달라서 그런지 두 손가락만하게 쪼그라들어버렸다! 그걸 보고서 아무도 없는 빨래방 안에서 어찌나 웃었는지. 사진을 찍지 않은게 아쉽다. 원래 산티아고에 도착하면 신발을 버릴 생각이었는데, 오늘 여기서 버려야겠다. 남은 이틀은 크록스로 가겠구나.


9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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