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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티아고 순례길, 포르투갈 루트 후기 (9)

by 휘피디

오늘도 이틀치의 이야기다. 여정을 끝내는 이야기이도 하다. 아마 한국에 돌아온 뒤의 소회와 잡다한 후일담을 모아 글을 한 편 더 쓸지도 모르겠다만, 순례길의 이야기는 오늘로 끝. 그동안 읽어주신 분들께 감사드리며, 마지막 후기를 시작한다.


전날 장을 본 사과와 바나나, 락토프리 우유로 적당히 아침을 먹고 길을 나섰다. 걷다보니 우유때문인지 위산이 역류하는 느낌이 자꾸 든다. 역시 식도염 환자에게 우유는 무리인가. 먹는 게 뻔해지고 생활도 단순해지니까 컨디션이 저하될 때 범인을 찾기가 쉬워진다.

어제 신발을 버린 관계로 오늘은 크록스다. 확실히 바닥이 물렁하니까 돌길을 걸을 때 발에 피로가 온다. 남은 날이 얼마 안남아서 다행이다.

걸으며 까미노에서 느낀 것들을 블로그에 쓸까 생각을 해보았다. 여기서 뭔가 감동적인 것들을 느끼고, 좋은 사람들을 만나고, 큰 의미가 있었던 것처럼 적어야 사람들이 좋아할텐데... 하지만 이 길을 걷는 나는 사실 그러지 못했다. 나 이거 왜 걷고 있지 라는 생각을 훨씬 자주했고 진짜 먹을 거 없네 라는 생각을 그보다 많이 했다. 사람을 많이 만나지 못해 외로웠다. 하지만 종종 잡념이 없어졌고 작고 단순한 것 때문에 행복했으며 변화를 위한 결심도 할 수 있었다. 이 길은 여전히 매력이 있다. 그래, 서울에 가면 여기서 느낀 바를 정리해보자.


내일 산티아고까지 조금만 걷기위해 오늘은 조금 무리하는 일정을 잡았다. 산티아고 성당의 아침 미사를 듣고 싶어서다. 숙소가 있는 도시 중에 산티아고에 가장 가까운 도시를 찾았다. 그래서 오늘 걸을 거리는 약 23km. 그래봤자 4만보 정도의 거리지만 요 며칠 3만5천보가 안 되게 걸었기 때문에 평소보다 무리하는 건 맞다. 하지만 오늘 조금 더 걸은 덕분에 산티아고까지 남은 거리가 18키로 정도로 줄어들었다. 내일은 4시간 정도만 걸으면 될 거 같다.

한참 걷다가 도시를 만났다. 도시는 소중하다. 문연 가게가 있으니까. 점심을 먹으려고 케밥집앞에서 기다렸는데 가게 앞에 적힌 오픈 시간이 지나도 문을 안 연다. 결국 포기하고 길을 걷다가, 문을 연 술집을 발견했다. 식당은 안 열어도 술집은 연다! 술집 앞에 점심 메뉴로 피자를 판다고 가판대가 서있어서 들어갔다. 피자를 주문한 뒤 나오는 걸 보니 냉동피자다. 그런데 맛이... 좋은데?? 뭐야 이거. 에어프라이어라도 쓴 게 아닐까 싶다. 전자렌지 피자만 먹다보면 에어프라이어 피자로도 감동받을 수 있는 법!

발바닥 통증은 거의 사라졌지만 걷는 건 여전히 고된 일이다. 크록스를 신고 있는데 비까지 오면 더 그렇다. 힘들어서 그랬는지, 혹은 무아지경 상태라도 됐는지 이 날은 어떻게 걸었는지 거의 기억이 없다. 이 글을 쓰면서 보니 이날 찍은 사진이 한 장도 없더라. 그냥 한 걸음씩 옮긴 게 전부다.

힘겹게 걸어 숙소에 왔는데, 체코에서 온 줄리를 또 만났다. 이번이 세번째다. 항상 나보다 늦게 출발하는 거 같은데 어떻게 먼저 도착해있는지 의문이다. 이 사람 축지법이라도 쓰나.

간밤에 호스텔에서 사람들은 즐거워보였다. 바로 다음 날이면 산티아고에 도착하니 당연히 신나겠지. 와인과 맥주 파티가 벌어져 밤 11시까지 시끌벅적하다. 그런데 나는 그 무리에 함께하지 못했다. 언어 능력 때문일수도 있고, 술 때문일 수도 있고. 밤 늦게 뭘 먹기 싫어서였을수도 있다. 혹은 일정 때문일 수도 있겠다. 내일 새벽에 별을 보고 싶어서 아주 일찍 출발할 예정이었거든.

다들 흥분한 와중에 나 혼자 9시쯤 억지로 잠을 청했다. 5시에 일어나보니 날이 흐리고 비가 오고 있다. 아마도 별을 보는 건 불가능해보인다. 아쉽지만 어쩌겠는가? 이게 산티아고길인데. 일찍 준비를 마치고 6시 전에 출발했다. 별은 못 보겠지만 오전 열시 미사는 들어야지.


여정의 마지막 날, 순례길 11일 차. 비와 구름과 어둠 속을 뚫고 한참을 걸었다. 그러다 아주 잠깐, 구름 사이에서 별을 만났다. 북두칠성과 카시오페아가 보인다. 결국 오늘도 별을 보여주시는 구나. 감사합니다. 별들에게 뭔가를 물어보려 멈춰섰는데,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제는 소원을 빌게 아니라 그냥 하루 하루를 충실히 사는 수밖에 없겠구나, 라고. 그리고 별을 향해 그런 마음을 읊었다.


하루하루 열심히 살겠습니다. 기회를 주신다면 더 큰 것도 이뤄보겠습니다.


11년 만에 만난 산티아고의 별이지만 내겐 그것으로 충분했다. 잠깐이나마 만난 별들과 인사를 할 수 있어서, 뭘 물어야할지 고민할 수 있어서, 어떻게 살아야할지 문득 알아버려서 행복했다. 그리고 감사했다.


20241027_062200.jpg 남은 거리는 16km!


다시 길을 나섰다. 저 찰나의 만남 이후로는 별을 보지 못했다. 궂은 날씨 속을 한참 걸었다. 8시가 지나 해가 뜨니 날이 조금씩 개이기 시작한다. 10시 미사에 도착하려면 서둘러야했다. 산티아고 시내에 도착한 뒤엔 성당까지 거의 뛰다시피 갔다. 어찌된 일인지 아침인데도 시내에 사람이 매우 많았다. 9시 50분쯤 겨우 성당에 도착해보니 이날 10시 미사는 없단다. 순간 몸의 긴장이 확- 풀리고 호흡이 돌아왔다. 내 여정이 이렇게 끝나는구나.


20241027_131012.jpg 성당 앞에선 현대자동차가 후원하는 마라톤 대회가 열리고 있었다


성당 앞 가게에 배낭을 맡기고 입장을 기다렸다. 그런데 우비를 겉에 입느라 안에 얇은 옷만 입고 있었기 때문에 땀이 식자 매우 추웠다. 12시에 미사가 있어 한 시간 이상을 기다려야 했는데 이미 내 뒤에 줄이 길었고 혼자 온 터라 배낭을 맡긴 가게에 다녀올 수도 없었다. 이때 미사를 기다리던 시간이 이 여정 중에 제일 힘들었던 거 같다. 그만큼 덜덜 떨었다.

11시쯤 성당이 문을 열었다. 성당에 들어간 뒤 미사를 기다리는 동안 한국인 여자분을 만났다. 산티아고 길에 한국인 순례자가 그렇게 많다는데 정작 나는 혼자 온 한국인 순례자를 산티아고 성당에서 처음 만났으니 재밌는 일이다. 둘이 앉아 수다를 떨었다. 그 분은 산티아고가 네 번째인 베테랑 순례자였다. 세번째 올때까지는 카톨릭 비신자로 왔고, 그 뒤에 개종하여 이제는 신자가 되었단다. 먹는 거 때문에 고생한 얘기를 하다보니 금세 친해진다. 이게 얼마만에 한국말인지 모르겠다.


20241027_125712.jpg 두번째 보는 향로 미사


미사를 마치고 한국인분과 헤어졌다. 성당 안에서 순례길을 걸으며 만났던 사람들을 몇 몇 다시 만날 수 있었다. 서로 얼굴만 봐도 마음이 다 전해진다. 고생 많았어. 너도 해냈구나. 웃으며 서로를 안아주고 축복해주었다. 까미노의 끝에서, 부엔 까미노.

배낭을 찾아 두꺼운 옷으로 갈아입고 성당 주변을 돌아다녔다. 인증서도 받고, 여운도 느끼고 싶다. 나는 아까 만난 한국인 분처럼 여길 또 다시 오게 될까.


20241027_131140.jpg 여정의 끝에서


이걸로 나의 순례길은 끝이다. 11일의 짧은 여정이 아쉽다. 걸으면서 확인한 것은 이런 것들이다. 1. 나이 먹고 저질이 된 내 몸 2. 빵 같은 거 대충 먹고는 지낼 수 없게 된 입맛 3. 술 끊으면 친구 사귀기 힘듦. 4. 잡념이 없어지면 작은 것에 행복해짐 5. 힘든 걸 잊게 해주는 것도, 깨달음을 주는 것도 결국 사람.

비와 구름으로 자욱했던 하늘 사이로 잠깐이나마 별을 보여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여기서 얻은 마음을 소중히 품고 다시 한 번 잘 달려보겠습니다.

긴 후기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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