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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휘휘 Nov 14. 2019

수능의 색, 어둡지만 밝은

재수생 출신 오빠의 소회

몇 시간 뒤 수능의 아침이 밝아온다. 오늘이 수능 보는 날임을 하늘도 알고 있는지 공기가 제법 차고 매섭다. 마지막 수능을 본 지 4년이 되어가지만 지금에서야 11월 중순의 찬 공기가 달리 느껴지는 건 동생 때문이다. 내가 두 번째 수능을 치를 당시 중학교 2학년에 불과했던 철부지가 어느덧 열아홉 고3이 되어 수능을 본다. 오늘 아침 국어를 시작으로 탐구 영역까지의 결과가 내년 봄에 벚꽃을 어디서 볼 지 결정한다. 


내가 겪은 비극을 되풀이한다면 기숙학원에서 꽃내음을 맡을 테다. 다만 동생이 그런 향기는 원치 않다 확고히 말했으니 미래에 없을 일이다. 동생은 나와 많이 달랐다. 단적으로 MBTI 검사 결과를 예로 들 수 있다. ENFJ 성향의 나와 ESTP 성향을 타고난 동생의 간극은 사춘기를 겪을 무렵부터 드러나기 시작했다. 타고난 오지랖을 가진 나를 동생은 별로 좋아하지 않았나 보다. 처음엔 서운한 감정도 있었는데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다. 애초에 다른 면이 존재하는 거니까. 그러다 보니 동생이 나한테 공부에 대해 물어본 적은 그다지 많지 않다. 너무 TMI라나. 공부는 처음엔 그렇게 해야 하거늘 쯧쯧...


각설하고 동생은 1학년 때 화장품과 관련된 전공에 관심이 있었다. 모 대학의 화장품공학과 혹은 화학공학과를 나와 화장품을 연구하고 제조하는 데에 일조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나. 그런 녀석이 2학년 때 갑자기 진로를 바꿨다. 미술이었다. 원래부터 시각디자인 쪽에 관심이 있었다 고백했다. 하지만 여기는 어디인가. 입시 제도의 지옥, 예체능에도 지성을 갖춘 인재라는 명분 하에 국어, 수학, 영어 성적을 강요하는 나라 아니던가. 


동생은 디자인이라는 꿈과 수능 성적, 내신이라는 현실의 괴리에 좀처럼 적응하지 못하는 듯했다. 입시 미술이 요구하는 기이한 구도의 그림과 과장된 색감이 동생한테 맞지 않았을 수도 있다. 내가 동생이 아니니 추측할 뿐이다. 다만 동생은 유난히 수능 공부를 힘들어했다. 물론 고3 때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놀다 기숙학원에 들어가고 나서야 정신을 차리고 힘들게 공부한 나로서는 수능 공부가 고되고 힘든 건 당연하다 생각한다. 


하지만 동생은 과도한 부담감을 이겨내지 못하고 입시 제도 자체로부터 회피하는 듯한 모습도 보였다. 입시 제도의 지옥에서 벗어나고 싶지만 도망치지 못하는 현실에서 무너지지는 않을까 하는 마음이 들었다. 공부를 하지 못하고 무기력하게 누워있는 동생에게 일어나라는 말을 차마 할 수 없었다. 


보기 안쓰러웠다. 동생이 누워있는 걸 볼 때마다 열아홉의 내가 겹쳐 보였다. 전공을 향한 나의 꿈과 받쳐주지 않는 성적과의 괴리는 미성년의 나로서는 견뎌내기 어려운 무엇이었다. 그래서 난 동생을 이해한다. 완전히 이해하는 건 불가능하지만 무기력의 늪에서 누워본 적 있기에 동생의 무기력한 잠을 이해했다.


그러므로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응원할 것이다. '미술', 듣기만 해도 범위가 방대하다. 유튜브 편집도 미술 디자인이요 미술관에 전시된 공예품도 미술 작품이다. 동생은 무엇이든 될 수 있고 무엇이든 만들 수 있다. 이미 결정한 진로에서 방대한 삶의 길이 완성된 셈이다. 제법 글도 괜찮게 쓴다. 자기가 뭘 만들었는지 설명도 잘하는 녀석으로 성장하기에 잠재력이 충분하다.


그래서 난 결과가 어떻든 동생을 응원할 테다. 수능을 죽 쒀서 전문대를 가든 대박을 쳐서 인 서울 디자인과에 진학을 하든 어떤 쪽이든 동생은 꿈을 향해 나아갈 힘이 있는 녀석이기 때문이다. 웃는 얼굴로 집에 들어와 줬으면 좋겠다. 열아홉의 내가 수능을 망친 날 울지 않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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