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밀 아자르, <자기 앞의 생>을 읽고
<자기 앞의 생>을 읽고 나서 한 노래가 생각났다. 아티스트 Jclef(제이클레프)의 <지구 멸망 한 시간 전>이라는 노래인데, 가사는 제목 그대로 지구 멸망이 임박한 상황을 노래한다.
오늘이 아니어도 매 순간은 어차피 운석 드리우는 삶이야
영원히 산다면 사랑은 눈앞의 고만 고만한 것.
창밖을 봐 욕망을 드러내는 시간
가장 허무한 우리는 추하지 않을 거야
무너진 인생을 꾸역꾸역 살아가다 세상이 무너지는 그 순간에도 우리는 사랑을 해야 할까? 노래는 맞다, 우리는 최후의 상황에서도 사랑해야 한다고 말하는 듯하다. 우리는 영원히 살 수 없기에 사랑해야 한다. 영원한 인생은 사랑의 영원함을 말한다. 그런 사랑은 없다. 그렇기에 사랑, 필멸의 운명은 내 사람을 더욱 소중히 여기고 사랑하게 한다. 사랑은 지구가 멸망하는 그 순간까지 해야 하는 것이다.
<자기 앞의 생>은 야피, 라우드 알 라야힌의 말로 시작한다.
-그들은 말했다.
“넌 네가 사랑하는 그 사람 때문에 미친 거야.”
나는 대답했다.
“미친 사람들만이 생의 맛을 알 수 있어.”
생의 맛, 삶이 어떤 건지 알고 있는 자들은 미친 셈이다. 그 생의 맛을 느끼게 하는 건 사랑이다. 당신은 사랑하고 있는가?라고 처음부터 물어보는 이 발칙한 책은 평범하지 않다. 평범하다 믿고 있는 사랑과 다른 형태의 무엇을 보여준다. 바로 유태인 창녀와 그의 보살핌을 받는 무슬림 꼬맹이 모모의 사랑 이야기다.
유태인 로자 아줌마와 열 살 배기 무슬림 모모의 이야기는 자기 앞에 내던져진 삶이 어떤 것인지 곱씹어보게 된다. 사실, 모모는 열 살이 아니다. 카츠 선생님은 로자 아줌마의 건강이 최악에 치달을 때 고백한다. 너는 열네 살이 맞으며 난쟁이가 아니라고 말한다. 그저 로자 아줌마는 상품성을 잃은, 더 이상 몸을 팔지 못하는 창녀에 불과했고 그에게 남은 건 열 살이라 믿고 싶은 모모뿐이었다.
로자는 모모와 함께 있고 싶어 다른 보호시설에 보내지 않은 채 열 살이라 믿게 한 거고 모모는 여느 무슬림들처럼 수염이 자랄 때조차 열 살이라 믿었다. 로자 아줌마가 그렇게 말해왔으니까. 늙은 유태인 창녀와 부모 없는 무슬림 사이에 남은 건 사랑뿐이었다. 로자 아줌마가 모모를 왜 사랑했을까 떠올리면 아무래도 모모가 순수했던 탓이라 생각한다. 모모의 순수한 대목은 책 곳곳에서 보인다.
모모는 어느 날, 아래층, 드리스 씨네 카페로 내려가 하밀 할아버지 앞에 이렇게 물었다.
“할아버지, 사람이 사랑 없이 살 수 있어요?”
“그렇단다.”
할아버지는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였다.
갑자기 울음이 터져 나왔다.
모모도 사랑 없이는 살 수 없단 걸 알고 있다. 로자 아줌마가 수용소 시절 기억 때문에 끌려가는 걸 무서워하며 매일 밤 죽음을 두려워하는, 나약한 늙은이에 불과하지만 말이다. 난 이 층계에서 죽고 말 거야, 계단을 오를 때마다 힘겹게 소리를 내뱉는 그녀의 뒷모습만 봐도 알 수 있을 것이다. 늙은 창녀의 펑퍼짐한 실루엣은 자체로 슬프다. 그녀가 모모에게 해줄 건 위조 서류를 챙겨 놓으며 모모가 다른 보호시설로 끌려가지 않게 하는 것쯤이다. 모모는 로자가 끌려가지 않도록 그녀만의 아지트에서 숨을 거둘 수 있게 도와준다. 서로가 멀어지지 않게 당겨주는 묘한 인연의 끈이 느껴졌다.
사랑이란 무엇일까 끊임없이 물음을 던지는 작품이었다. <자기 앞의 생>은 비단 모모의 시선에서 전개된 삶쯤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나는 세상에 던져진 채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생각하게 해 줬다. 나는 이 세상에서 서로를 보듬고, 가진 게 없더라도 이거 하나 너 가지라며 손을 건네는 자그마한 마음까지 나눌 줄 아는 사랑을 해야 한다. 세상은 미쳤으니까, 그 세상에서 살아가려면 미쳐야 하니까. 나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이런 말을 건네고 싶다.
“당신과 같이 미쳐가고 싶어요.”
그렇게 우리는 사랑할 테다. 지구가 멸망하는 그 순간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