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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휘휘 Dec 31. 2020

2020년을 돌아보며

코로나 때문에 아무것도 한 게 없을까

2020년이 내일이면 사라진다. 사라지는 건 이 세상에서 없어지는 걸 의미하므로 내게, 그리고 당신에게 2020년은 애초에 사라진 상태였는지도 모르겠다. 그만큼 2020년은 정신없이 흘러갔다. 1월 초 태국에 다녀왔더니 우리나라 전체에 코로나가 퍼졌고 3월 초 학교를 다니지 못하게 되었단 생각이 드니 신경불안증에 걸렸다. 


신경불안, 신경쇠약이라면 영화나 소설 속 주인공처럼 약을 한 움큼 쥐어먹지 않으면 잠을 못 자는 사람을 떠올렸는데 아니었다. 작은 소리에도 놀라고, 자다 말고 이유 없이 식은땀 흘리면서 깨는 거 빼면 그다지 드라마틱한 병도 아닌지라 약 먹으면서 내가 할 수 있는 걸 생각하고 실행하니 금방 나아졌다. 감기약도 잘 안 먹는 내가 그런 약은 알아서 찾아 먹은걸 생각하면 심리적 안정이 정말 필요했나 보다. 


상담하다 보니 알게 된 건 내가 주변 사람에게 동화가 무척 잘되는 사람이라는 것. 화가 많은 사람 곁에 있으면 덩달아 화가 많아진다. 말 많은 사람 옆에 있으면 말이 같이 많아지다가 한계치에 도달하면 번아웃되고 마는, 좋다면 좋고 안타깝다면 슬픈 사람이다. 동기 부여, 자극 추구가 낮은 수치는 아니지만 행동 유지력이 바닥을 친 탓에 끊임없이 동기를 부여해야 됐다. 그렇지 않으면 작심삼일이었으니 계속 그 일을 해야 하는 이유를 만들었다. 그런 식으로 자신을 다독여야 하다 보니 내가 코로나 이후 했던 일은 끊임없이 자아를 찾는 것이었다.


자아 찾기의 일환으로 가장 먼저 벌인 일은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보기였다. 전문의가 말하는 나와 내가 바라보는 나의 괴리를 찾고자 MBTI를 다시 검사했다. ENFJ라는 성격이 나의 아이덴티티였다. 사교성이 좋으나 비판에 민감하고... 책임감이 강하나 어쩌고... 트라우마가 없으면 완벽하다고들 하는 성격인데 보통 이렇게 남을 챙기고 배려하려 드는 사람은 대개 인간관계 때문에 크게 데이는 경우가 발생하기 마련이다. 결국 완벽한 성격은 없다. 그래서 시작한 MBTI 오픈 채팅방이었다. 나랑 다른, 완벽하지 않은 사람들과 소통하며 나를 찾고 싶었다. 그 사람이 삼척에 와서 즐겁게 놀다 갔고 다음에도 오고 싶다 말한 덕분에 애증의 대상이었던 고향을 달리 보는 계기가 되었다. 연초에 고마운 사람을 일찍 만난 건 큰 행운이다. 방에 들어간 지 벌써 1년이 되어가는데도 제법 친밀한 관계를 이어가고 있다. 인연이 닿으면 닿는 대로, 떠나면 떠나는 대로 두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다음으로 벌인 일은 공모전 두드리기였다. 문예창작학과 나온 사람이 졸업할 때까지 글 하나 세상에 못 내놓으면 문제라는 생각을 주입했다. 그간 눈독 들였던 독립출판사에 시를 썼고, 추려서 공모전에 냈다. 작년에는 입구 컷이었지만 운이 좋았던 건지 올해는 보기 좋게 5 작품 모두 당선됐다. 소정의 원고료라고는 해도 전공 살려서 돈을 번다는 건 언제나 멋진 일이다. 지금은 AI 데이터 플랫폼 서비스하는 친구의 지인 부탁으로 뉴스 기사를 요약하는 AI의 정확성을 판단하는 업무를 보는 중이다. 3분에 3천 원을 벌 수 있는데, AI의 정확성 향상을 위해 노동하는 인간이라니 기분이 묘하다. 그래도 어문계열 전공자로서 전공을 살려 돈을 버는 일 자체에 의의를 둔다. 나는 멋진 일을 하고 있다고 맘 속에 주문을 건다.


6월, 살면서 처음으로 학점을 4점대를 찍어봤다. 절대평가의 맛은 실로 달콤했다. 상대평가에 치여 B만 나와도 다행이란 머리에 A+이 박히니 어안이 벙벙했다. 이대로만 성적이 유지되면 참 좋을 텐데... 12월은 그러지 못했단 걸 미리 밝힌다.


7월, 2학기에는 학교에 가야지 맘먹은 터라 여름방학 때 고향에서 돈 벌고 가야겠단 호기로운 마음으로 관공서 알바에 지원했다. 경쟁률이 3대 1이 넘는, 나름 힘든 알바였는데 보기 좋게 되어서 아르바이트했다. 바다가 보이는 대나무 숲이 있는 공원의 물썰매장이었다. 일 자체는 쉬웠고 다양한 사람을 마주할 수 있어 좋았다. 그중 하나가 지금의 여자 친구인데, MBTI나 행동 양상 같은 걸 보면 성격이 나랑 정반대인가 싶다가도 특정 부분은 판박이처럼 공유하니 고맙고 다행이란 생각이 든다. 할머니가 계셨으면 장난 삼아 궁합이든 사주든 봐달라고 부탁했을 텐데 그러지 못하니 참 아쉽고 그립다. 평소엔 생각도 않다가 왜 사라지면 보고 싶은 지 모르겠다. 사람은 본디 사라진 걸 그리워하라고 설계된 게 아닐까. 

9월, 기숙사에 입성했다. 1월 초 태국 여행 다녀올 때 유럽인들이 안일하게 코로나를 대처하는 모습에 충격받아서였는지 코로나 대확산을 어느 정도 예상하고는 자취가 아닌 기숙사를 신청했다. 원래대로는 택도 없는 학점이었는데 운 좋게 0.01점 차이로 최초 합격을 했던 터라 2학기 때 무리 없이 기숙사에 들어갈 수 있었다. 청소, 빨래 등 자기 몫을 정확히 하는 바람직한 개인주의자 룸메이트 덕분에 트러블 하나 없이 무난하게 기숙사 생활을 영위했다. 지금은 대구에서 잘 살고 있을 멋진 룸메에게 감사를 표한다.


12월, 계절학기로 현장실습을 신청했다. 어떻게 보면 2020년의 마지막 자아 찾기 프로젝트다. 강북구에 있는 작은 출판사, 일반 가정집을 개조해서 사무실로 사용하고 있는 듯한 비주얼이다. 코로나 이후 출판사는 어떻게 위기를 대처하는지 현장을 느껴보고 싶어서 지원했다. 사내 분위기는 제법 좋다. 직원분이 부모님 뻘이라서 그런지 잘 챙겨주신다. 내가 배정받은 책상 옆에는 열대어가 헤엄치고 있다. 어릴 적 키운 구피, 플래티, 코리도라스 친구들이 생각난다. 하늘에선 숨을 못 쉴 텐데 어항 하나 만들어 놓으셨으려나. 각설하고, 출판사에서 교정 교열 업무를 보면서 느낀 건 세상에 쉬운 일 하나 없다는 거, 방언 범벅인 작품을 교정, 교열할 때는 생각보다 더 신중해야 된다는 점이다. 그리고... 서울의 대중교통은 어떻게 될지 모르니 항상 10분, 20분은 일찍 나와 기다려야 한다는 점을 깨달았다. 고되지만 할 것이 넘치는 서울,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조용하고 재미없는 도시 고향에 비하면 복에 겨운 도시다. 


아침에 일어나 마주하는 서울은 늘 차갑고 시리다. 그 감촉이 따뜻하게 느껴질 언젠가를 위해 2020년을 꽤나 열심히, 멋있게 살아보려 노력했다. 그 강한 동기 부여가 2021년의 날 건강하고 멋있는 사람으로 만들길 간절히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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