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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휘휘 Oct 26. 2021

아직도 글을 쓰는 이유

얼마 만에 글을 쓰는지 모르겠다. 브런치에서 글 안 쓴 지 오래된 사람한테는 형식상의 안부 인사를 건넨다. 꾸준히 글을 썼을 땐 몰랐던 시스템 알람에 생각보다 많은 감정이 교차한다.


"우리 못 본 지 꽤 오래됐네요~"


같은 아파트에 살던 친구가 약대에 들어가든 대학원에 들어가든 어딜 가든 그러다 만날 수 없는 곳으로 사라지든 잊고 지낸 사이에게 무난하게 건넬 수 있는, 의례적으로 묻는 말이다. 잘 지내냐는 말에 잘 지낸다고 통상적으로 말하고, 그렇구나란 말이 당연하다는 듯 돌아온다.


우리가 사는 시대에선 지키지 못할 게 많은 만큼 지켜야 하는 말이 많은 법이다.


그러게. 왜 못 본 지 오래됐을까.


그 이유를 따진다면 젊은이가 많기로 유명한 신림에서 단기 알바를 할 무렵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여름방학이 막 시작해 후덥지근한 열기가 아스팔트를 데울 쯤이었다. 밖에서 뭘 하든 싫증이 날 법한, 심심한 한기가 도는 11월 다음으로 가장 싫어하는 7월 초의 열기. 피부가 타지 않으면 기적인 계절에 학과 선배, 동기 그리고 후배와 넷이 합심하여 공동창작, 계간지에 투고했다. 나 하나의 사색과 고찰로 쓰기도 힘든 시를 왜 넷이서 썼을까. 단기 알바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 교수님의 제안을 덥석 물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쓸모없는 인간이 되기 싫어서가 첫째였다. 글 좀 써본 놈이라면 들어봤을 굵직한 문학상을 일찍이 휩쓸었고, 글 좀 예쁘게 쓴다 싶은 유튜버들 손 끝에 글 실리는 멋진 분이 내 시적 감상을 이해하고 인정해주는데, 내 쓸모는 이쯤 되면 인정받은 거 아닌가.

 

내가 기성작가였다면 드라마 멜로가 체질 속 안재홍처럼 돈 얼마 주냐고 물어봤겠지. 기성작가와 동일하게 지급되는 원고료라는 걸 알았을 때는 묘한 뿌듯함을 느꼈다. 등단할 생각은 없으면서 등단작가와 동일한 원고료 5만 원이면 그래도 라지 사이즈 피자 한판에 사이드 메뉴까지 넉넉하게 챙겨 먹을 수 있겠네. 그들도 원고료를 받으면 시켜 먹을까. 주머니를 움켜쥐고 집밥을 해 먹을까. 여하튼 당시에는 그런 짐작이라곤 할 겨를이 없었다.


진짜 좋다. 속으로 한 번, 네 동아리 학우분께 연락드려서 써 볼게요 감사합니다. 입 밖으로 한 번.


그때 내가 좋다고 속으로 되뇐 건 정말 좋아서 나온 말인지, 아니면 돈으로 대변하는 세상에서 내 쓸모를 인정받을 수 있어서인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하나 확실한 건 원고료를 받은 뒤였다. 동생과 피자를 먹으며 포만감을 만끽한 후 사람이라면 응당 느끼는 포만감 뒤의 허전함, 위장에서. 배가 꺼져가는 감각을 오롯이 느낄 때 내가 생각해온 쓸모는 어느새 부정되었다.


5만 원으로는 외식 한 번이면 동나는 돈이거든.


대학에 처음 들어갔을 때 인생 목표 중 하나는 전세 자금을 마련하는 거였다. 2016년 5~6평 남짓한 원룸 전세금은 대략 5천만 원에서 6천만 원, 평당 천만 원이면 전세를 마련할 수 있고 매달 나가는 월세를 막을 수 있다. 순진한 콩쥐가 되지 않기 위해 돈으로 두꺼비를 사려한 건데, 5년이 지난 지금은 잘 모르겠다.


밑동이 너무 커서 틀어막지 못한 두꺼비는 이렇게 말하려나.


콩쥐야 X 됐어.


전세 자금이고 뭐고 나 하나 살면 그만이지란 생각으로 점철된 내 머릿속에선 시가 언제까지 나올 수 있을까. 나 꽤 다정하단 소리 많이 들어봤는데, 애초에 서울이란 외로운 도시에서 다정한 사람이 발 벗고 누울 곳이 남아있긴 할까.


그럼에도 나는 글을 쓴다. 글을 써야 쓸모가 생기는 사람이 나니까. 방송 구성 대본을 쓰느라 올해 마지막 날 아침 라디오 오프닝 멘트를 구성해보고, 여전히 시를 쓰고, 번득이는 생각에 소설을 쓰다가 동화도 써보고, 아동문학에선 내가 지도한 아이의 이름을 되뇌고, 생각보다 잘 살고 있단 사실에 안도하고. 종결 어미 없는 생각이 꼬리를 무는 걸 보니 소재가 떨어져 글을 못 쓸 일은 없을 거 같다.


끝나지 않는 소재, 금방이라도 동날 거 같은 위태로운 마음가짐. 회지에 투고하려면 얼굴/표정을 주제로 시를 써야 한다. 이럴 때면 나는 상대를 대할 때 어떤 표정을 지어왔는지 반추한다. 위장도 안 좋으면서 뭘 그리 곱씹어 보는지 원. 소설 동아리 학우와 교류 행사 일환으로 공동 문장을 창작할 때 소재가 하필 시간의 순방향, 불가역성이라서. 그러한 것들이 머리를 헤집는 동안에도 시간은 계속 흘러서.  


내 글을 누가 읽어줄까 싶은 와중에 연락이 끊긴 줄 알았던 친구들이 글 재밌게 잘 읽었다고 말했을 때 기분이 아직도 생각난다. 내 글을 읽어줘서 고맙다는 감사함, 내 편협한 시각에 인상을 찌푸리지 않았을까 하는 불안감. 그때 기분은 생각나는데 어떤 얼굴을 지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1학년 때 팟캐스트에서 단 한 명이라도 내 글이 좋다고 말해준다면 그걸로 충분하다고 말했던 풋풋한 나는 어느새 화장되었나 보다. 한 명이라도 많은 사람에게 쓸모를 인정받아야 5만 원 이상의 가치를 받을 수 있다 생각하니 뭐라도 하게 된다.


쓸모, 쓸모, 쓸모.


인문사회계열 졸업생이 괄호와 수식으로 범벅된 언어 구사자에게 멸시를 당하는 시대, 시골을 버리고 도시를 택했단 이유로 할당제를 받지 못하는 시대에서 나는 오늘도 쓸모를 인정받으려 글을 쓴다.


그러니 브런치야. 못 본 지 오래되었다고 보채지 말아 줘. 나 계속 글 쓸 거야.

나는 나름 쓸모 있는 사람이거든.


졸업작품집이 실물로 나오기까지 한 달도 남지 않았다.

수요 조사가 얼추 끝나면 한 권에 만원 책정하고 팔아봐야지.

날 파는 일이 당연한 세상에선 당연하듯 나를 팔아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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