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일 글쓰기 2주 1일 차

나는 나로서 살 수 없는 존재다

by 휘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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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늘 어떤 시대, 어떤 지역, 어떤 사회집단에 속해 있으며 그 조건이 우리의 견해나 느끼고 생각하는 방식을 기본적으로 결정한다. 따라서 우리는 생각만큼 자유롭거나 주체적으로 살고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대부분의 경우 자기가 속한 사회집단이 수용한 것만을 선택적으로 '보거나, 느끼거나, 생각하기' 마련이다.


우리는 분단국가라는 특수성 때문인지 몰라도 한국인의 피, 민족성을 자부한다. 대한의 얼과 한을 전 세계에 보여주겠다는 강한 일념은 전 세계에 아리랑을 울려 퍼지게 했고 비빔밥이란 식문화를 전파했다. 그런데 이러한 활동들이 '나'가 모여 만들어낸 '우리'인가라는 물음에는 여전히 고개를 갸우뚱하게 된다. 민족? 피? 그런 게 다 무슨 소용인가. 나는 나로서 인정받고 싶은 세상에서 한국인으로서 해낼 수 있는 건 없다. 나로서 해낼 수 있는 것들은 세상에 널렸다.


그럼에도 우리는 자율적인 주체가 아님을 본문의 저자 우치다 타츠루는 말한다. 당장 질문을 던져보자.

나는 누구입니까?

대부분 나는 ~~ 한 사람입니다라는 식의 말을 하지, 나는 한국사람입니다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 한 사람이라 설명할 때 말하는 자신의 이름은 한국적인 것이 아닌가? 한국계 외국인이 성에 킴, 초이, 파크를 붙이는 경우는 있다. 그마저도 성이 어순으로 따지면 뒤에 온다. 박민규 씨가 미국에선 밍큐 팍으로 불리는 것과 같은 이치다. 우리는 성을 앞에, 이름을 뒤로 두고 부르는 부분부터 한국인으로서의 문화적 동질감을 공유하는 셈이다.


저자는 포스트모더니즘, 구조주의를 넘어선 시대, 더 나아가 탈구조주의 사회에 살고 있다 말하지만 여전히 구조주의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했음을 역설한다. 구조는 일련의 코드화다. 한국에 사는 내가 "나를 나로서 생각해주세요. 다른 것들은 전혀 신경 쓰지 말아 주세요!" 라 일장연설을 늘어놓아도 결과는 마찬가지일 테다. 우리는 결국 한국의, ~씨 가문의, ~가정의 나로서 기능한다. 이는 사고의 확장을 저해한다.


구조주의에서 벗어난다는 건 이 모든 것들로부터 자유로운 내가 존재함을 의미한다. 사회에 존재한다는 말 역시 구조적이다. 나는 나로서 존재해야 한다. 그렇기엔 넘어야 할 벽이 너무나도 많다. 남성과 여성을 구분 짓는 코드는 성기, 호르몬, 염색체 등의 다양한 잣대로서 존재한다. 부와 빈을 가로막는 장벽에 쓰인 글귀는 나라마다 다르다. 나라는 또 어떠한가? 어딘가는 아직 무소불위의 권력을 지닌 국왕이 다스리고 어떤 곳은 대통령이, 바로 옆 나라는 내각이 나라를 이끈다. 우리는 코드라는 자물쇠가 층층이 채워진 구조안에서 살고 있다. 우리는 탈구조를 갈망하지만 여전히 구조적이다. 나로 살고 싶어도 어딘가 얽매인 내가 살고 있다는 의미다.


하지만 자율적인 주체로 기능하지 못하는 나는 전혀 쓸모가 없는 건가?라는 물음에는 확실히 답할 수 있다. 자율적인 삶을 살기 어렵기 때문에 우리는 소통해야 한다. 쓸모는 거기서 온다. 한국에 살기에 내재되는 보편적 정의, 미국에 살면 떠올리는 정의 등 각국의 보편적 개념이 맞물려 상호 소통을 하면 그것이 곧 범지구화다. 공동체적 삶은 결국 보편적 정의를 향한, 코드화 된 사람들의 언성이 한데 모여 완성된다.


구조는 우리 사람들이 각기 다른 생각을 갖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존재하는 코드다. 내가 지닌 생각이란 이름의 코드가 A라면 상대는 B, 그 옆은 C일 것이다. 그다음이 D가 아닌 A일지라도 모으다 보면 A to Z, 알파벳 코드가 완성된다. 나로 살고 싶다면 한국에서의 나가 아닌, 세계 속의 나로 살아야 할 것이다. 런던의 신생아가 잭보다 무함마드가 더 많은 런던에서, 캘리포니아에서 태어난 가르시아로서 살아가려면 그래야 한다.

아직까지 한국다운 것을 찾는 김 서방을 부르면 우리는 도태될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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