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일 글쓰기 3주 1일 차

나는 무엇인가?

by 휘휘


나는 이타심이 강한 ‘무엇’


나는 누구인가도 아닌 나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내가 어떤 사람인지 더 자세히 생각하게 되는 무언가가 있다. 나는 어떤 존재인가라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있다. 한두 번도 아닌 수 번에 걸친 자기 관찰과 반성이었다. 그때마다 발견한 나 자신은 타고난 이타심이 나 자신을 갉아먹을 만큼 힘들게 할 때가 많았다는 점이다. 누군가에게는 이타심이 자기 편하려는 마음에서 비롯된 이기심으로 보였을지 모른다. 자기 자신의 몫을 먼저 챙기던 사람들은 그런 나를 보며 이해 안 간다는 식의 말을 할 테다. 세상에 자기 몫도 안 챙기고 남을 보는 바보가 있단 말이야? 하면서 말이다.


신형철 평론가가 공감이란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이라 말했듯 공감을 향한 내 노력 또한 슬픔으로 귀결된다. 상대의 감정에 잘 동화되는 성격 탓에 주변 분위기에 금방 녹아든다. 이는 학창 시절에 공감능력이 좋단 소리를 듣는 이유이면서 일부에게는 흰색도 아닌 검은색도 아닌 무언가, 회색 같다는 말을 듣기도 했다. 사실 누구나 논리에 타당한 근거와 그럴싸한 가치관이 더해진다면 그 또한 새로운 정의(正義)라 불러야 한다. A가 말하는 타당한 논리는 하나의 정의고 B가 말하는 그럴싸한 말은 또 하나의 정의다.


“너는 왜 A말도 맞고 B말도 다 맞다 그래?”


“다 맞는 게 아니라 일리가 있다는 거야.”


그런 내 가치관을 또 하나의 정의로 생각해주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도 많았다. 나는 후자의 부류가 무심코 던진 말에 상처 받는, 지독한 자책감이 따른다. 남들과 조화될 수 없으면서 조화를 추구하는 성격에 고통받는단 느낌도 퍽 든다. 남자와 여자가, 586과 그들의 자녀가 그리고 왼쪽과 오른쪽 진영이 서로를 헐뜯는 세상에 A와 B 모두를 옳다 해 줄 사람은 그저 박쥐일 뿐이란 생각도 든다.




나는 이상향을 좇는 ‘무엇’


MBTI 검사 결과를 먼저 말하자면 나는 ENFJ다. 질문지가 복잡한 검사지로 보면 ENFP가 나오기도 하는데 J와 P가 4:6, 6:4 비율로 엎치락뒤치락한다. 여기저기 일을 벌여놓는다는 ENFP의 성향을 생각하면 나는 ENFJ에 더 가까운 듯하다. 내 성격은 MBTI 검사지 결과 뒷면에 적힌 성격과 빼닮았다. 계획에 있어서 어떤 이상에 목표를 두고 그를 좇는다. 그러다 보니 이상향에게 인정받아야 한다는 욕구가 남들보다 강한 편이다. 어릴 적부터 그런 마음이 강한 탓에 부모님께 인정받지 않아도 되니 애쓸 필요가 없다는 식의 말을 많이 들어왔다. 유독 가족과의 갈등이 잦았다. 가족을 책임져야 한다는 생각으로 했던 부단한 노력이 일상으로의 도피, 여행에서 부담스러웠나 보다. 가족 앞에선 ‘또 나야?’라는 생각이 자주 드는데, 혹자는 이를 피해의식이 강하다 표현한다. 직장같이 위계질서가 있는 사회생활이 어려운 성격이라 그런지 몰라도 부모님과의 관계가 유난히 어렵다.




나는 표정을 읽는 ‘무엇’


하지만 천성인 걸 어떠한가. 본질적으로 사람에 관심이 많은 유형이라 살면서 사람의 표정, 행동, 가치관에 집중한 적이 많았다. 평소 밝던 사람이 오늘은 왜 얼굴을 찌푸리는지, 저 사람은 왜 나를 보고 인상을 쓰는지, 어떤 기분 좋은 일이 생겨서 입 꼬리가 씰룩거리는지 등을 본다. 종종 어떻게 알았냐는 말을 듣는데, 사람에 관심이 많으면 아는 일에 그런 답이 돌아오면 왠지 모를 씁쓸함도 느낀다. 나만 사람에 신경 쓰는 것 같은 고독함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나는 초연한 ‘무엇’


바뀌지 않을 일에 화내는 걸 싫어한다. 결과의 변화가 없을 텐데도 언성을 높이거나 인상을 찌푸리는 행태를 보면 온몸이 긴장된다. 저 사람은 왜 저럴까? 할머니가 위독해 병원에 계실 적에도 그저 할머니가 좋진 않다며 근무지 복지사분에게 에둘러 말하는가 하면 친구가 길을 몰라 택시를 탄 채 20여 분을 헤맬 때도 화내지 않았다. 남들 앞에 할머니의 아픔을 떠올리며 눈물을 떨구고 친구의 실수에 화를 낸다고 돌아오는 건 없으니까. 변화 없음에 감정의 동요를 보이는 만큼 어리석은 짓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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