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싸가 죄는 아니잖아요

선 하나 긋고 안과 밖을 규정하는, 그 폭력에 대하여

by 휘휘

‘인싸들이 듣는 노래’ ‘인싸들이 가는 카페’ 요즘 세간은 온통 ‘인싸’에 빠져있다. insider, 즉 안에 속한 자들을 칭하는 말이다. 한편 outsider, ‘아싸’들의 삶에는 그 누구도 관심 갖지 않는 추세다. 오히려 인싸들의 삶을 더욱 부각함으로써 아웃사이더의 삶이 얼마나 비참한지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편이다. 선을 하나 그어 놓고서는 선 너머에 있는 사람은 안중에도 없다. 이러한 현상이 단편적으로 드러나는 곳이 바로 SNS 공간이다. 인스타그램, 트위터, 페이스북 등 다양한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가 있는데 그중에서도 사진 몇 장으로 자신을 표현하는 인스타그램이 1020 젊은 세대를 대변하고 있다.



자기가 어떠한 삶을 살고 있는지를 맛있어 보이는 음식 앞에 활짝 웃어 보이는 얼굴, 한국에서 볼 수 없는 아름다운 풍광 아래 빛나는 모습을 비추어 보여준다. 인싸가 보내준 풍만한 삶에 만족한 팔로워들은 사진을 두 번 눌러 하트를 보낸다. 게시물이 마음에 들었을 때 누르는, 페이스북으로 치면 좋아요의 기능을 하는 장치다. 팔로워가 많을수록 더 많은 하트를 받는다. 팔로워가 천 명이 채 되지 않는 일반인 혹은 아싸들이 받는 하트는 초라하다.



관심의 빈부격차는 여기서 발생한다. 사람들은 모름지기 관심이 고픈 생물이다. 갓난아기 때부터 우리는 어머니의 애정 어린 눈빛이라든가 주변인의 관심과 사랑을 갈구하며 살아왔다. 그렇다면 ‘아싸’는 사랑과 관심이 필요하지 않은 돌연변이쯤 되는 걸까?


필자는 아싸가 단지 하나의 큰 줄기에서 어느 정도 벗어난 잔가지와 같은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를테면 쇼미더머니, 고등래퍼 등 다양한 힙합 경연 프로그램에 참가한 유명 래퍼들은 대중에게 큰 인기를 끌고 있으며 SNS상에서의 반응 또한 폭발적이다. 밴드 경연 프로그램에 다수 참여한 브리티쉬 록, 펑크록 밴드를 향한 대중들의 시선과는 대조적이다. 인싸들이 올리는 사소한 게시물에도 수없이 달리는 좋아요, 하트는 비틀즈와 오아시스를 동경하는 로커에게는 그저 초라함, 사회에서 주목받지 못하는 존재라는 일련의 폭력으로 작용한다.


앞서 말한 빈부격차에서 봤듯이 부를 많이 축적한 사람이라 해서 필연적 악인이 아니다. 사회가 소비하는 문화에 부합하여 돈과 명예를 남들보다 많이 얻는 쪽에 가깝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우뚝 솟은 나무줄기가 아닌 잔가지, 아싸들이다. 주류 문화를 생산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어딘가 부족한 것처럼 매스컴에서 묘사되는 풍토, 그에 아싸들은 사막 위의 모래바람처럼 이리저리 굴러다녔다. 필자는 문예 창작을 전공하고 있는 학생으로서 주류 문학과 비주류의 차이를 극복하기란 좀처럼 쉽지 않아 보였다. 소득이 가장 적은 직업군에 시인, 소설가가 항상 10위 안에 들었고 본인 역시 시집보단 히가시노 게이고의 추리소설 같은 베스트셀러란에 진열된 도서에 먼저 손이 갔기 때문이다. 오랜만에 들린 광화문의 교보문고에서도 관심은 언제나 유명한 소설, 힐링을 노래하는 에세이 작가의 몫이었다. 눈길이 많이 가는 곳에는 관심과 사랑이 따른다. 눈길이 많이 가는 곳, 필자는 무언가 머릿속을 스치는 기분이 들었다.


인싸의 문화는 태초부터 다수가 소비하는 문화가 아니었다. 많은 사람들이 향유하다 보니 가능했던 것이다. 빌보드 차트 진입이 밥 먹듯이 거론되는 방탄소년단, BTS가 그러했다. 처음 우리나라에 데뷔를 예고했을 때만 해도 기존의 쟁쟁한 보이그룹에 치이기 일쑤였다. 방탄소년단이라는 어감이 촌스럽다는 조롱을 듣기도 했다.



BTS는 처음부터 선 안의 존재가 아니었다. 선 밖에서 시작해 선 안으로 들어온 그룹이다. 그들은 현재 선 밖에 있는 것들에 대해 노래하는 그룹이 되어 숨어있거나 소외당하는 전 세계의 잔가지들에 따스한 손길을 내미는 선 안의 존재가 되었다. 거대한 나무줄기로 성장한 잔가지로서 다른 잔가지에 손을 내미는 인싸다. 서점가의 불패 신화라 불리는 히가시노 게이고 또한 전기공학과를 전공한 이공계 출신이라는 독특한 이력, 잔가지 작가다. 데뷔작 <동급생> 이후 10여 년간 이렇다 할 히트작을 내지 못한 무명에 가까운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의 이력이 작품 <게임의 이름은 유괴>에서 첨단 장비를 사용한 몸값을 받아내고 유괴에 성공하는 장면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는데 큰 도움을 줬다.



아싸, 잔가지로 살아왔던 이력이 새로운 나무줄기를 만들고 그것이 다른 나무에 붙어있는 잔가지의 마음을 울린다. 잔가지로 살아왔기에 그들의 비애와 아픔을 누구보다 잘 아는 공감에의 용이함이 문화를 생산하는 존재에게 작용한 것이다.


실제로 홀로 밥을 먹거나 영화를 보는 혼밥족, 혼영족은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친구가 없는 사람 정도로 치부당했다. 현재 혼자 문화를 소비하는 고객층의 취향에 맞춰 1인용 고깃집, 코인노래방과 같은 시설이 우후죽순 생겨나고 있다. 홀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아지자 혼자를 위한 문화가 하나의 주류문화가 된 셈이다. 이는 혼자 행동하는 편이 자연스러운, 공동체로서 기능하지 않아도 충분히 만족할 만한 사회를 종용했다. 단체 의식을 중요시하던 4050 세대와의 갈등이 심화됐다는 부작용이 있지만 젊은 세대들이 즐기는, 종전에 없던 새로운 주류 문화의 탄생이 혼자 생활하는 사람들을 양지로 끌어냈다.



따라서 아싸의 문화가 소외당하지 않으려면 잔가지도 봐달라고 세간에 호소하는 게 아니라 비주류 문화를 소비하는 아싸를 결집해 하나의 주류를 생성, 잔가지가 한데 모여 또 다른 나무줄기를 만들어야 한다. 담쟁이덩굴이 나무줄기를 휘감아 올리듯, 커다랗게 성장한 나무의 가지가 옆 나무의 가지에 걸터앉듯 우리는 그렇게 살아야 한다.



나무줄기를 하나에 집착하느라 보지 못했던 사실이다. 숲에 나무가 하나밖에 없는 일은 없다. 숲 속에 나무는 수도 없이 많다. 잔가지 속에는 다른 나무로의 태동이 숨 쉬고 있다. 잔가지라고 해서 슬퍼하지 말자. 옆 나무 잔가지가 이미 손을 뻗치고 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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