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것에 옹졸하게 분노하는 사회

해답은 문학이다

by 휘휘

먼저 시 한 편을 읊고 이를 소개하고자 한다.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
저 왕궁 대신에 왕궁의 음탕 대신에
50원짜리 갈비가 기름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
옹졸하게 분개하고 설렁탕집 돼지 같은 주인년한테 욕을 하고
옹졸하게 욕을 하고
한번 정정당당하게
붙잡혀간 소설가를 위해서
언론의 자유를 요구하고 월남파병에 반대하는
자유를 이행하지 못하고
20원을 받으러 세 번씩 네 번씩
찾아오는 야경꾼들만 증오하고 있는가
...(중략)
그러니까 이렇게 옹졸하게 반항한다
이발쟁이에게
땅주인에게는 못하고 이발쟁이에게
구청 직원에게는 못하고 동회 직원에게도 못하고
야경꾼에게 20원 때문에 10원 때문에 1월 때문에
우습지 않으냐 1원 때문에
모래야 나는 얼마큼 작으냐
바람아 먼지야 풀아 나는 얼마큼 작으냐
정말 얼마큼 작으냐……

위 시는 김수영 시인의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로 당대 화자의 소시민적 삶과 그에 대한 반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 왕궁의 음탕을 욕하지는 못하면서 설렁탕집주인에게 분개를 하고 구청 직원, 땅주인에게는 아무 말도 못 하면서 조그마한 돈 때문에 야경꾼에게 분노하는 화자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이 잘 드러난 작품이다. 위 시는 시가 쓰인 1964년 억압된 시대를 넘어 2017년 오늘날까지도 효력을 나타낸다.


<권순찬과 착한 사람들> 속 인물들이 그 예다. 그들이 보여주는 소시민적 삶은 60년대 시 속 화자가 말한 부끄러움과 상통한다. 위 소설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나’는 지방대에서 근무하는 교수이며 기러기 아빠의 삶을 살고 있다. 조용한 소도시의 낡은 아파트에 거주하는 그는 주변인들에게 번듯한 직장이 있는 학식과 명망이 높은 인물로 여겨진다. 하지만 ‘나’는 외로움을 느끼며 평생 업으로 삼아온 글쓰기 자체에 깊은 회의를 느낀다. 그러던 와중 일인시위를 전개하는 ‘권순찬’씨의 존재를 알게 된다. 버려진 땅 앞에 파란 천막을 치고 돗자리를 핀 채 앉아있는 그의 목적은 하나였다. 502호의 사채업자 ‘김석만’에게 이중 입금된 돈 700만 원을 받기 위해서다. 그 돈은 당초 빌린 200만 원에서 3배 이상 불어난 돈이자 자신의 어머니가 힘겹게 노동을 하며 번 소중한 돈이었다.


하지만 502호에는 ‘김석만’ 대신 폐지를 주우며 생계를 이어가는 그의 노모가 살고 있었다. 사채업을 통해 돈을 벌어온 그가 허름한 아파트 단지로 올 가능성은 거의 없는 상황. 그럼에도 한 번 더 입금된 700만 원을 돌려받기 위해 그는 김석만을 하염없이 기다린다. 아파트 주민들은 그를 안타깝게 여겨 일자리를 구해주고 700만 원을 마련한다. 그러나 ‘권순찬’씨는 마을 주민들의 700만 원을 거부한다. 그가 원한 건 김석만의 700만 원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이후 ‘권순찬’씨에 대한 태도를 달리하여 그를 성가신 존재로 여기기 시작한다. 심지어 ‘나’는 ‘권순찬’씨의 멱살을 잡고서 그만하라고 화를 내기까지 한다. ‘나’는 ‘권순찬’씨가 사라진 후 등장한 사채업자 ‘김석만’의 당당한 모습을 보며 그의 이야기를 담은 ‘글’을 쓰기 시작한다. 이야기는 끝을 맺는다.


위 소설에서 아이러니한 점은 마을 주민들의 선의가 ‘권순찬’씨의 진짜 목적성을 배제한 채 이뤄졌고 자신들의 선의가 거부당하자 옹졸하게 그에게만 화를 낸다는 것이다. ‘권순찬’씨가 길거리로 나오게 된 근본적 원인인 사채업자 ‘김석만’에게 화를 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돈을 벌어들이는 수단인 노동을 죽어라 하면서 더 빨리 불어난 빚에 허덕이는 사회의 전반적인 구조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는 앞서 언급한 시의 화자와 상응한다.


하지만 시의 화자와 소설 속 화자는 상이한 면모가 있다. 시의 화자는 자신의 소시민적 행태에 부끄러움을 느낄 뿐 더 나아가지 못한다. 자조적인 태도를 담아내는 것에 그쳐 소시민적 삶을 극복하지 못한다. 반면 소설 속 화자 ‘나’는 ‘김석만’의 오만한 풍채와 뻔뻔함을 보고서는 분노를 느낀다. 그 후 사회 전반적인 구조의 억압을 받은 ‘권순찬’씨의 이야기를 ‘글’로 담아낸다. 옹졸한 것에 화를 냈던 자신에 대한 반성과 그간 행해왔던 소시민적 삶의 극복 의지를 드러낸 것이다. 여기서 ‘글’의 힘은 소시민 ‘나’를 계몽시키는 수단으로써 작용했다.


글, ‘문학’을 펴냄으로서 사회의 잘못된 구조를 고발하고 깨어있는, 살아있는 삶으로의 회귀를 시사한 <권순찬과 착한 사람들>. 이와 비슷한 성격의 작품은 하나 더 있는데, 바로 이창동의 <시>다. 먼저 <시>의 줄거리를 간략하게 말하자면 다음과 같다.


낡은 서민 아파트에서 중학생 손자와 함께 살아가는 할머니 ‘미자’. 그녀는 화사한 옷과 꽃 치장을 좋아하는 순수한 영혼의 소유자다. 어느 날 동네 여성회관에서 ‘시 수업’을 듣게 되고 그곳에서 ‘시’ 한 편을 써오라는 과제를 받게 된다. 끊임없이 시상을 떠올리는 ‘미자’, 시를 쓰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하던 찰나 손자가 여중생 집단 성폭행 사건에 가담했다는 것과 피해자가 자살을 했단 사실을 깨닫게 된다. 사건의 수습을 위해 모인 학부모들. 그들은 자기 멋대로 피해자의 부모님과 합의하기 위한 금액으로 인당 500만 원을 제시한다. 진심으로 소녀를 위로하기 위한 돈이 아니다. 순전히 가해자의 앞날을 위해서다. 소녀를 위로하는 수단이 돈이라 생각지도 않고 그 돈을 마련할 여유도 없는 미자. 그녀는 500만 원과 피상적인 위로, 속물이기 그지없는 세상의 잔혹함을 깨닫고 있다. 그럼에도 ‘미자’는 문학이 죽어가는 세상에서 아름다운 시 한 편을 써내야 한다.


시의 완성을 향한 여정은 예상보다 더 힘들었다. 시를 쓰는 자들이 모인 시 강연회에서는 중년의 경찰관이 음담패설을 내뱉고 사람들은 박장대소를 한다. ‘미자’ 혼자 웃지 않는다. 이는 문학을 말하는 장에서 조차 문학의 부재가 여실히 드러남을 의미한다. 저급한 농담에 포복절도하는 대중들, 이들이 내지르는 환호와 웃음은 시의 진정성을 깨닫지도 못한 채 저급한 농담에나 배꼽을 잡는 우리들을 향한 비웃음이다. 또한 ‘권순찬’씨를 비난한 마을 주민과 야경꾼에게 분개한 시 속 화자에게 던지는 웃음일지도 모른다.


<시>가 보여주는 세상은 시가 죽은, 소녀의 죽음 앞에 합의금이 먼저 언급되는 소시민들의 옹졸함만 남은 사회. 앞서 말한 두 작품 속 사회와 무척이나 흡사하다. 이 사회 속에서 ‘미자’는 ‘권순찬’씨를 위해 글을 쓴 ‘나’가 될까 아니면 야경꾼에게 분개하는 소시민 화자로 전락할까.



‘미자’는 ‘나’처럼 누군가를 위한 글을 쓰는 방식을 고수했다. 그리고 마침내 현실을 극복하고 유린되어 스러져 간 소녀의 영혼을 달래는 궁극적 수단, ‘시’를 완성한다. ‘시’의 제목은 소녀의 세례명을 딴 아네스의 노래. ‘미자’는 500만 원이 아닌 ‘시’, 이 세상에 스러져가는 문학을 통해 소녀의 영혼을 진정으로 달랜다.


‘권순찬’씨의 안타까운 삶을 위로하는 방식과 ‘소녀’의 무결한 죽음을 달래는 방식은 ‘문학’을 통해 이뤄졌다는 점에서 상통한다. ‘나’는 글을 씀으로써 사회 구조의 피해자, ‘권순찬’씨와 같은 소시민들을 위로했다. ‘미자’는 시를 써내 소녀와 같은 세상의 희생양이 된 가여운 자들의 혼을 달랬다. 더불어 위 두 작품에서 깨어있는 인물로 제시되는 인물은 단 한 명이라는 점에서 일치한다. <권순찬과 착한 사람들>에서 ‘나’가 깨어있는 지식인으로서의 의식 회복을 암시한 것, 시 강의를 듣는 수강생 중 유일하게 시를 완성한 ‘미자’. ‘나’는 사채업자 김석만에게 분노를 느낀 유일한 인물이자 ‘미자’는 소녀에게 진심의 위로를 보낸 단 하나의 인물이다. 위 작품들은 소시민적 삶이 팽배한 사회, 그 죽어가는 사회에서 가엾이 죽어간 것들에 대한 위로와 자기 극복을 일궈낼 유일한 수단은 문학임을 내비친 것이다.



지금까지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 <권순찬과 착한 사람들>, <시> 세 작품을 제시하여 사람을 진정으로 위로하거나 자기 성찰을 일궈내는 건 500만 원, 700만 원 같은 액수로 환산되는 돈이 아닌 문학임을 말했다. 최근 위안부 피해자에 대한 보상금 10억 엔을 두고 큰 논란이 일었다. 아베 총리는 10억 엔을 한국에 전달한 후 위안부 문제가 최종적이고 불가역적인 합의라는 것을 서로 확인했다고 밝혔다. 우리는 더 이상 ‘권순찬’씨를 피상적으로 위로하는 사람이 아니므로 아베 총리, 나아가 일본 정부 측에 당당히 물어볼 수 있다.

“우리가 돈 받으려고 25년 동안 수요일마다 거리를 나섰다고 생각하세요?”

10억 엔을 전달함으로써 문학의 종말을 자발적으로 선포한 일본 정부 측에 연민의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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