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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휘찬 Apr 06. 2021

술에만 취해야 하나요

다른 것에 취해 볼게요

나는 술을 즐기지 않는다. 정확하게 말하면 술을 좋아하지 않고, 몸에 잘 받지도 않는다.

나는 맥주 한 모금에도 소주 한 병을 마신 것처럼 얼굴이 벌겋게 되는 부류의 사람이다.

어른들은 나에게 어디 가서 도둑술은 못 먹겠다며 농담을 하셨지만,

나에게 술은 아무도 몰래 먹고 싶은 유혹거리가 아니다. 젤리라면 모를까.  

하지만 소위 말하는 '알쓰 (알코올 쓰레기)'로 취급당하기는 억울한 부분이 있다. 

내 주량이 얼마인지 보자고 죽어라 마신 적은 없지만,

술을 마시고 취해서 인사불성이 되거나, 기억이 끊긴 적은 없다.

술을 많이 마시게 되면 '기분 좋게 취한다'의 과정은 생략되고 바로 극심한 두통 단계로 넘어가고

그 이후에도 계속 마시게 되면 먹은걸 다 게워낸다. 

물론 이 상태까지 도달하는 일은 거의 없지만 도달하더라도 정신은 너무 멀쩡해서 더 괴롭다.

대학 합격자 발표날, 기대하던 학교의 불합격 통보를 확인하고 너무 속상한 마음에

냉장고에 있던 술을 꺼내 물컵에 한 잔 가득 마신 적이 있었는데

보통은 술에 취해서 해롱해롱하며 '니 까짓게 나를 떨어트려?! 학교가 거기밖에 없는 줄 아냐고요'

이런 상황을 상상하겠지만 나는 깨질 것 같은 머리 때문에 다음날 미술학원도 가지 못했다. 

그리고 도대체 어른들은 왜 술을 마시는가라는 높은 수준의 의구심만 갖게 되었다.

이렇듯 술에 대한 나의 기억은 대부분 기분 나쁜 두통과 연결된 터라 

점점 더 술을 좋아하지 않게 되었다. 


대학에 입학하고 보니 술을 마실 일이 많았다. 

특히 신입생 때는 OT를 시작으로 매일같이 술 마실 일뿐이었다.

학년별로 선배들을 만나는 '대면식'이라는 생전 처음 들어보는 행사 일정도 잡혔다.

명칭만 다를 뿐이지 하나같이 술 마시기 위해서 모이는 자리였다.

그때는 술 때문에 신입생 OT에서 사고가 많이 나던 시절이었다.

어느 학교는 OT 때 신입생이 술을 마시고 호수에 빠져 죽기도 하고,  

또 어느 학교는 선배들이 신입생에게 너무 술을 많이 먹여서 죽기도 했다.

엄마는 술에 대한 나의 태도와는 상관없이 억지로 술을 먹어야만 하는 상황을 무척이나 걱정했다.

다른 것도 아니고 술 때문에 허망하게 아들을 잃을까 봐 걱정하던 엄마는 특단의 조치를 내렸다.

결국 나는 대학생활을 하면서 한 번도 술로 이어지는 행사에 가본 적이 없다. 심지어 MT도 가본 적이 없다.

지금 생각해보면 엄마의 그 결정도 웃기지만

내가 반항 한 마디 하지 않고 순순히 따른 걸 보면 나도 어지간히 술이 싫었나 보다. 그 끔찍한 두통도.

다행히 시간이 지나면서 술을 강요하는 문화는 학교에서나 사회에서나 점점 사라졌다.

그래도 술을 전혀 마시지 않을 수는 없었다.

공식적인 자리뿐만 아니라 사적인 자리에서도 어느 정도 분위기를 맞춰야 할 때도 있다.

회를 먹으러 가서 혼자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먹을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런 자리에서 맥주는 500cc 한 잔, 소주 3-4잔 정도 분위기를 맞춰가면 마신다.

물론 남의 술까지 다 뺏어먹은 것 같은 얼굴이 되는 걸 감수해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벌건 얼굴과는 대조적으로 심리적인 변화는 전혀 없다. 

나는 여전히 다른 이들이 왜 술을 마시는지 모른다. '술이 땡긴다'는 그 마음도 모르겠다.

퇴근 후에 집에 와서 자기 전에 맥주 한 캔을 마시며 피로와 스트레스를 푼다는 것도 솔직히 잘 모르겠다.

한 두 번 따라한 적은 있지만 냉장고에는 언제 사다 놓은 지 기억도 나지 않는 맥주가 그대로 있다.


그동안 내가 보고 들은 바에 의하면

술은 좋은 기분을 배가시키고 나쁜 감정에는 더 빠져들게 만들며

말하지 못했던 속마음을 말할 수 있는 용기가 되기도 하고 

아직 친하지 않아 어색한 사이를 금세 말랑말랑하게 해주기도 한다.

때로는 상처 받은 마음을 토닥여주고 때로는 느끼한 속을 깔끔하게 정리해준다.

누군가는 술로 인해 망쳐버린 몸매를 안타까워하기도 하고

또 누군가는 술로 인해 몸이 망가지기도 한다.

술을 마시지 않으면 잠을 못 자는 사람이 있고, 누군가 때문에 술이라면 질색을 하는 사람도 있다.

누구는 술에 취하면 뭐가 그렇게 슬픈지 울기 시작하고,

누군가는 술에 취하면 아무렇지도 않은 척했던 얘기를 또 하고, 또 한다.

기억에 없는 상처나 큰 멍자국을 남기고 떠나기도 한다.

비록 나는 알코올의 역기능뿐 아니라 순기능도 느껴보지 못했고 

앞으로도 느끼지 못할 확률이 높지만 나에게 술을 대체할 무언가가 있을까.

생각해보니 나는 술뿐만이 아니라 딱히 무언가에 취하는 편은 아닌 것 같다.

아마도 그건 내가 감정의 소용돌이에 빠지기를 거부하는 냉철한 사람이거나

그것에서 헤어 나올 것을 미리 걱정하는 사람이거나

그것도 아니라면 언제나 내가 좋아하는 무언가에 취해있는 사람이라서 일 것이다.

마지막 이유가 끌린다.

무언가에 취해 비틀거리더라도 다른 것은 보지 않고 그 무언가를 향해 걸어갈 수 있는 사람이고 싶다.

상처가 생기고 기분 나쁜 두통이 괴롭혀도, 그 길에서 용기를 얻고 위로를 받으며 나아가고 싶다.

나는 술 대신에 언제나 내가 좋아하는 무언가에 취해있는 사람이고 싶다.


술에 취한다는 건 

가장 마음이 쓰이는 무언가만 남기고 

나머지는 흐릿하게 만들어 주는 블러 (blur) 효과 같은 건가 보다.

그 대상이 사람일 수도 있고 사랑이나 좌절일 수도 있지만

술이 가져다준 용기도, 위로도, 눈물도, 터져 나온 속마음도 

결국은 누군가에게 받지 못해 

술의 힘을 빌어 스스로에게 주는 환상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술은 외로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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