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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휘찬 Mar 30. 2021

가장 소중한 시간은 지금

현재에 충실할 것, carpe diem

초등학생에 입학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시절의 이야기다.

우리 집 앞에는 딸 부잣집이 살았다. 그중 막내는 나와 동갑이었고, 같은 학교를 다녔다.

나는 첫째였고, 그 아이는 위로 언니가 둘이나 있어서 부모님의 나이대는 달랐지만 

작은 동네에 얼굴을 마주하고 있는 집이라 이런저런 교류가 있었다.

그 집 아줌마는 그 시대 아줌마들이 다 그렇듯 억척스러웠다.

지금으로 치면 '쎈 언니' 스타일이었다. 

그다지 어려운 살림도 아닌데 (물론 속사정은 모르는 거지만)

젊어서 고생을 많이 하셔서 그런지, 앞으로 자식 셋을 키울 걱정 때문인지

10원도 손해보지 않으려는 스타일이었다.

그런 성향 때문인지 골목에서 큰소리를 내며 싸우는 일도 종종 있었다.

나는 아직 어려서 대부분의 싸움이 왜 일어났는지는 몰랐지만, 

평소의 모습으로 미루어보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뒤에서 동네 사람들의 원성을 종종 듣기도 했다.

그 집은 아줌마의 억척스러움으로 마당이 있던 단층 단독주택을 허물고 

그 자리에 5층짜리 다세대주택을 짓게 되었다.

그리고 둘로, 셋으로 나누어져 있는 다른 층과는 다르게 한층을 전부 쓰는 5층 '주인집'에 살게 되었다.

아마 뒤에서 욕은 하던 동네 사람들도 이 순간만큼은 부러워했을 것이다.

하지만 곧 이대로 마냥 부러워할 수 없는 사건이 발생한다. 

새 집에 들어가기 직전에 아저씨가 교통사고를 당해 병원에 옮기기도 전에 현장에서 돌아가셨다.

그 일이 있고 얼마 되지 않아 동네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그 아줌마 넋이 아주 나갔다고, 눈에 초점이 없더라고, 그러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했다.

"나 이제 하고 싶은 거 다 하면서 살 거예요. 집이 무슨 소용이고, 돈이 무슨 소용이에요. 죽으면 그만인데."

그 가족만큼은 아니겠지만 어린 나에게도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그리고 저 말은 두고두고 내 머릿속에 남아 지금의 나를 형성하는데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나는 누구보다도 현재형으로 살아간다고 생각한다. 지금의 행복이 가장 중요하다.

지금 가치 있는 일을 하는 것이 결국 내 인생을 가치 있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다른 글에서도 썼지만 같은 돈으로 아침에 눈뜨자마자 주식을 확인하는 것보다 

피아노를 보는 게 행복해서 내가 피아노를 사는 것도 같은 이유다.

예전에 어떤 TV 프로그램에서 짠순이 이야기가 나온 적이 있다.

통장을 여러 개 가지고 먹을 거 아끼고, 옷도 안사고 여러 군데에서 악착같이 아껴서 

서른 살에 얼마를 모았다! 하는 내용이었다. 

누군가는 대단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전혀 그렇지가 않았다.

TV에 나오는 모습은 단편적으로 편집된 것이므로 전부라고 할 수는 없지만

오로지 돈 모으기에 인생을 잠식당한 사람처럼 느껴졌다.

그 사람은 통장을 보면서 뿌듯하고 행복을 느낄지 몰라도 나의 기준에는 전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원하는 무엇을 위해 돈을 모으는 것이 아니라 돈 자체가 목적이 된 듯한 느낌.

그렇게 모은 돈으로 무슨 일을 할지 모르지만, 

오히려 20대에 즐겨야 할 많은 것들은 놓치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젊은 시절 꾸미고 가꾸는 것과 나이 든 다음의 그것이 같지 않고

그 시절에 만들 수 있는 추억들은 나이가 들면 할 수 없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내가 좋아하는 것, 하고 싶은 일, 배우고 싶은 것들도 나이가 들수록 하지 못할 이유만 쌓여가고 

내 가슴을 뛰게 하는 것들 앞에서 심장은 점점 무뎌진다.

그러므로 지금 해야 한다. 지금 바로 시작할 수 없다면, 준비라도 시작해야 한다.

나중은 없다. 그리고 나중을 위해 현재를 희생하는 일은 더더욱 없다.


이렇게 말하면

'철없는 생각이다, 그렇게 해서 언제 집을 살 거냐, 나중에 노후에는 어떻게 할 거냐' 이런 걱정이 쏟아진다.

정답은 없다. 내가 어디에 가치를 두느냐는 오로지 나에게 달려있을 뿐이다.

행복도 가치 있는 일도 모두 내 마음의 기준을 따르기 때문에 애매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그에 대한 책임도 내가 지는 것이다. 

여기에서 나는 중요한 점 두 가지를 항상 경계한다.

첫 번째는 편한 것과 행복을 혼동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지금 공부하는 것보다 누워있는 게 행복하니까 누워있어야겠다.' 같은 오류이다. 

힘들고, 어렵고, 귀찮은 것이 다 행복하지 않은 게 아니다. 

행복을 위해 기꺼이 해낼 수 있는 고생도 분명히 있다.

그 와중에도 나에게 행복을 주는 것들을 틈틈이 해 나갈 수도 있다. 

그리고 그에 대한 책임은 내가 진다.

두 번째, 행복이라는 가치가 합리화의 도구가 돼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유흥과 행복은 엄연히 다른 것이고 순간적인 쾌락과 행복도 다른 것이다. 

여기에 행복이라는 합리화를 해서는 안된다. 특히 소비생활이 그렇다. 

무언가를 갖게 되면 행복할 것 같다고 합리화하기 쉽다. 비싼 물건일수록 더 그렇다.

그러면 덜 망설이게 된다. 나 역시 그런 오류를 자주 범한다. 

그리고 행복의 합리화에 빠져 착각했음을 깨닫곤 한다. 

역시나 책임은 내가 진다.

어느 책에서 우리는 태어난 순간부터 하루하루 죽음으로 가고 있다는 글을 본 적이 있다.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루씩, 한 시간씩 죽어가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참고, 망설일 필요가 없다. 

매일매일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지금 이 순간에도 행복해야 한다.

그리고 행복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나의 기준은 

앞은 보지 않고 현재를 즐거움으로 채우며 살아가는 것이 아니다.

다만 손에 잡히지 않는 먼 미래를 위해서 

현재를 희생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다시 오지 않을 지금 이 시간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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