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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걷고 Oct 06. 2024

비우기

작은 방 하나를 나만의 공간으로 확보하기 위해 투쟁을 해왔고, 일부 양보하며 작은 방 하나를 나만의 공간으로 꾸미고 지내온 지 20여 년이 지나간다. 장롱과 피아노가 나의 공간에 들어와 있어서 늘 이 공간의 반만 나의 공간이라는 약간의 불편함을 지니고 살아온 지 20여 년. 피아노가 드디어 딸네로 옮겨지면서 공간이 넓어졌다. 장롱은 벽이라 생각하면 된다. 그 안에는 등산 용품과 양복 등이 들어가 있으니 장롱의 반은 나의 창고니 뭐라고 불만을 얘기할 상황도 못 된다. 불만을 잘못 드러내면 이 공간 자체가 사라질 위험도 도사리고 있으니 조용히 지금 상황에 만족하며 지내야 한다. 만족은 스스로 만족하는 오유지족이 있는 한편 상황에 맞춰 자신의 기대치를 낮추며 만족한 삶을 살고 있다고 자신을 세뇌시키는 방법도 있다. 나의 경우에는 후자에 속한다고 할 수도 있지만, 그나마 이 정도라도 확보한 것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피아노가 빠지면서 공간이 확보되니 서가를 정리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좁은 공간에 책 정리를 제대로 하지 못해 늘 마음 한 구석이 불편했다. 근데 막상 책을 정리하려 드니 막막하다. 몇 권 되지도 않는 책 정리를 하는 일도 쉬운 일이 아니다. 여기저기 마구 흩어져있던 책을 꺼내어 나름 분류하기 시작했다. 상담심리, 명상, 불교, 걷기, 글쓰기, 마음공부, 인생 2막, 인문, 재테크 등 몇 가지로 분류하여 책 정리를 시작했다. 평생 보지 않을 책은 버리기로 결정했다. 약 1/4 정도의 양이 된다. 이 책들을 버리려 했는데 아내가 ‘굿 윌 스토어’에 책을 기부하면 필요한 사람이 매우 저렴한 가격에 구매해 간다고 하여 한 구석에 모아두었다. 조만간 기부할 생각이다.      


책상 위와 옆의 책꽂이, 왼쪽의 서가, 오른쪽에는 서가를 눕혀서 책을 정리했다. 그리고 서가와 책상 사이의 공간에 등산 용품을 정리해 놓았다. 이제 나만의 공간이 제대로 확보된 거 같아 마음이 한결 가볍고 한가롭다. 방을 정리하고 나니 삶의 모습이 그대로 드러난다. 분류한 책은 나의 관심사이고, 등산용품은 나의 취미생활이다. 걷고, 명상하고, 상담하고, 독서하고, 글을 쓰며 살고 있다. 부처님께서는 생선을 싼 종이에는 생선 냄새가 나고, 향을 싼 종이에는 향냄새가 난다고 말씀하셨다. 물건을 살펴보니 그 물건 자체가 나의 삶이다. 생선 냄새라도 상관없고 향냄새라도 상관없다. 어부에게는 생선 냄새가 나는 것이 당연한 일이고, 미화원에게는 쓰레기 냄새가 난다. 어떤 냄새든 그 냄새가 자신의 삶과 직결되어 있다면 생선 냄새나 쓰레기 냄새도 향냄새 못지않게 향기롭다.      


방을 정리한 후에 한 구석에 좌복을 놓았다. 늘 그곳에 있었는데 정리된 방에 놓인 좌복은 뭔가 다르게 느껴진다. 마치 이 좌복에 앉아 하루 종일 명상을 해야만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장소를 어떻게 관리하느냐에 따라 삶이 달라진다. 공간을 쓰레기로 가득 채운다면 그곳에 들어가고 싶지 않을 곳이고, 만약 그런 곳에서 지낸다면 마음 역시 쓰레기가 가득할 것이다. 물리적 공간의 쓰레기를 정리하듯 마음 공간의 쓰레기도 정리해야 한다. 공간의 화려함과 우아함, 사치스러움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고 정갈함을 얘기하는 것이다. 정갈한 공간은 정갈한 마음을 불러일으킨다. 역으로 정갈한 마음은 정갈한 공간을 만든다.     

 

다른 작은 방에는 아내의 장난감 창고다. 딸아이가 결혼 전에는 딸 방으로 쓰던 곳이다. 결혼한 후 이 방은 자연스럽게 아내의 창고가 되었다. 아내는 아내만의 공간이 있고, 나는 나만의 공간이 있다. 그리고 부부가 함께 공유하는 공간도 있다. 공유 공간인 거실에도 나의 공간이 있다. 거실 한쪽에 책상이 놓여있다. 매일 아침 이 책상에 앉아 글을 쓰거나 책을 읽는다. 공유 공간 내에도 나만의 공간이 있으니 나는 공간부자다.     

 

그간 힘이 잔뜩 들어간 상태로 글을 써온 것 같다. 책을 발간하여 유명세를 누리고 싶어 하는 욕심 때문이었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타고난 재능도 없고, 글재주도 없는 사람에게 유명세가 찾아 올 리 만무하다. 처음에는 불편한 마음을 토로하고 정리하는 글이 대부분이었다. 그 이후에는 뭔가를 아는 체하고 마치 누군가를 가르치려는 어리석고 못난 마음으로 글을 써왔다. 곧 그 한계를 알아차린 것이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다. 누군가에게 가르칠 수 있는 전문성을 갖고 있지 않은 사람이 억지로 그런 흉내를 낸 것이다. 그다음 단계로 걸으며 후기를 쓰기 시작했다. 이 작업 단계에서도 자꾸 자신을 드러내려는 욕심과 잘못된 마음이 많이 있었다. 최근에 브런치 출간 프로젝트에 응모한 ‘마음챙김 걷기’를 주제로 쓴 브런치 북 ‘한 걸음에 미소, 한 걸음에 평화’를 쓰며 더 이상 책 발간을 위한 글을 쓰지 않기로 결심했다. 이 책은 선정이 되지 않아도 책으로 출간할 생각이다.      


책 출간과 자신을 알리고자 하는 마음에서 벗어나니 글쓰기가 한결 편안해졌다. 모든 힘을 빼고 뭔가를 알고 있다고 착각을 알아차리고, 누군가를 가르치려는 못된 마음을 버리고 나니 글쓰기가 매우 편안해졌다. 목적 없이 쓰는 글이니 그냥 쓰고 싶은 대로 쓰면 된다. 독자를 의식할 필요도 없으니 눈치를 보며 쓸 필요도 없어졌다. 다만 sns에 업로드하고 있으니 단 한 명의 독자를 위해서라도 진실성 있게 그리고 가능하면 거친 표현은 지양할 생각이다. 가끔 나의 글을 읽으며 감사 댓글을 달아주는 분들이 있다. 최소한 그분들에게만이라도 글 쓰는 사람으로서 기본적인 예의를 지키며 글을 쓰고 싶다.      


책상을 정리하고 책을 분류하고 나니 마음정원을 청소한 것 같아 마음이 한결 가볍다. 글쓰기의 목적이 사라지니 글쓰기가 한결 편안해졌다. 나를 알리고자 또는 명예를 얻거나 누군가에게 인정받겠다는 생각을 버리고 나니 행동하기가 한결 자연스러워졌다. 돈을 벌기 위해 무언가를 하지 않아도 되니 삶이 편안해졌다. 무언가를 얻겠다는 생각이 사라지면 자연스럽게 자신이 되어간다. 욕심이 사라진 자리에 자신의 모습이 드러난다. ego가 사라지면 Self가 자연스럽게 나타난다. 책상을 정리하며 자연스럽게 Self나 드러났다. 이 또한 즐겁고 멋진 일이다. 노후에는 비우는 일이 채우는 일보다 우선되어야 한다. 비우면 가볍고 편안하다. 채우면 무겁고 채운 것을 지키기 위해 불편함과 불안을 안고 살아야 한다. 앞으로도 계속해서 비우는 삶을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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