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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걷고 Oct 07. 2024

가족

장모님, 처남 부부와 함께 외식을 했다. 염소고기 전문점에 가서 오랜만에 포식을 했다. 장모님을 모시고 갔지만, 실은 장모님께서 계산을 하시며 우리를 대접하신 모양이 되었다. 맏사위 모양이 빠진다. 처남은 얼마 전에 고급 승용차를 구매했다. 사업이 안정적이어서 자금 여유도 있는 것 같고, 그간 고생한 생각을 하면 그 정도 누리는 것은 당연한 보상이 될 수도 있다. 그 차를 어제 처음 타봤다. 좌석이 넓고 실내 인테리어도 고급스럽다. 처남이 좋은 차를 타고 다니니 보기 좋다. 가까운 가족이 살기 어려운 형편이 되면 직접적인 도움도 주지 못하면서 마음만 불편하다. 가족 구성원 모두 각자 잘 살아야 다른 가족에게 불편을 끼치기 않게 된다. 잘 산다는 의미는 건강하고, 경제적으로 크게 불편하지 않고, 가족 간에 화목하다는 의미다. 이 단순하고 평범한 일이 결코 쉽지만은 않다. 큰 일 없이 평범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 가장 큰 행복인데, 이를 알아차리는 것도 어렵고, 이런 삶을 만들어나가는 것도 어렵다. 욕심으로 인한 상대적 빈곤감, 즉 비교가 만들어 온 삶의 비극이다. 비교만 하지 않아도 삶은 훨씬 더 편안해질 것이다.   

   

식사 후 멋진 커피숍에 들어가 차와 쪽 케이크를 먹으며 대화를 이어간다. 장모님께서 에어컨 바람이 불어오니 기침을 심하게 하신다. 감기 기운이 있으셔서 미세한 바람에도 큰 영향을 받으신다. 기침을 오래 하시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아프다. 거동하시는 것도 점점 더 불편하시고, 청력이 떨어지시는지 목소리가 커지신다. 연로하시니 잘 들리지 않고 보이지 않는 것은 당연한 노화 증상이지만, 당신이 이 사실을 받아들이시는 것은 다른 얘기다. 모시지는 못하면서 마음 한 구석에 죄송함과 불편함만 쌓인다. 목요일에 장인어른 묘소를 장모님 모시고 가기로 했다. 그 묘소에 언젠가는 장모님도 함께 모시게 될 것이다. 당신의 묘소를 당신 생전에 방문하신다. 언젠가 두 분의 영혼이 한 곳에서 지내시게 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 부부도 언젠가는 그렇게 될 것이다. 반면 손주들은 폭풍성장하고 있고, 딸네 부부는 열정적으로 살아가고 있다. 부모님, 우리 부부, 딸 부부, 손주들, 네 세대가 자연스럽게 순환하며 살아간다. 우리가 가면 아이들 세대가 오고, 아이들이 가면 그다음 세대가 온다. 자연스러운 삶의 이치다. 하지만 이 순리를 받아들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ego가 작동하기 때문이다.      


밤늦은 시간에 사위가 찾아왔다. 내일 일본으로 출장을 가기 위해 공항에서 가까운 우리 집에서 지내는 것이 편안해서이다. 사위는 백년손님이라 한다. 근데 손님을 자식으로 대하고 싶어 한다. 사위의 생각이 어떤지는 잘 모르겠다. 결혼한 지 9년 정도 지난 것 같은데 가끔은 아직도 낯설고, 가끔은 내 새끼 같다는 생각이 든다. 집에 들어오자마자 와이셔츠를 두 개 꺼내어  아내에게 다려달라고 한다. 요즘 양복을 입는 세대가 아니다 보니 넥타이를 잘 못 매겠다며 매듭을 만들어 달라고 내게 요청한다. 아내는 정성스럽게 셔츠를 다려주고, 나는 두 개의 넥타이를 내 목에서 매어 매듭을 만든 후 매듭이 풀리지 않게 빼서 전해주었다. 피아노가 빠진 나만의 공간이 어제는 사위의 침실이 되었다. 평소 쓰지 않던 이부자리를 장롱에서 꺼내어 잠자리를 만들어 준다. 행여 추울까 신경도 쓰인다. 새벽녘에 사위가 기침하는 소리를 들으니 혹시나 감기 걸린 것은 아닌가라는 걱정도 하게 된다. 아내는 아침 식사를 차려주고 나는 사위를 역 근처까지 모셔다 드렸다. 손님치레를 한 느낌도 들지만, 한편으로는 사위가 요청하는 모습이 귀엽고 한 식구가 되었다는 생각이 들어 뿌듯하고 좋다.      


사위를 데려다주고 집에 오니 오전 6시 30분. 아내는 그동안 침구를 정리해서 방이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다. 아내는 동네 주민들과 아파트 주변을 걸으러 나가고, 나는 좌복에 앉아 50분간 명상을 한다. 오랜만에 좌복에 앉아서 그런지 생각이 쉴 새 없이 일어났다 사라진다. 모두 스스로 만든 잡념들이다. 잡념과 호흡이 서로 엎치락뒤치락하는 싸움이 50분간 지속된다. 명상을 하는 것인지, 잡념을 알아차리는 것인지 구별이 안 된다. 하지만 어떻든 50분간 자세를 바꾸지 않고 앉아는 있었다. 언젠가는 잡념들이 가라앉는 날이 올 것이다. 아내는 명상이 끝나는 시간에도 여전히 밖에서 걷고 있는지 들어오지 않는다. 오늘 아침 신문에 골퍼 최경주의 인터뷰 기사가 나왔다. 그는 시합이 있든 없는 매일 스쾃 150개와 팔 굽혀 펴기 25개, 손 악력 운동 20개를 한다고 한다. 늘 근력 운동을 해야만 하는데 하면서도 안 하고 있다. 걷는 것은 몸에 익어서 언제든 걸을 수 있지만, 근력 운동은 아직 익숙하지 않다. 오늘 신문을 보며 최경주 선수처럼 할 수는 없지만 흉내라도 내고 싶었다. 간단한 스트레칭을 한 후에 스쾃 30개와 팔 굽혀 펴기 25회를 했다. 매일 꾸준히 해서 하루 스쾃 50개와 팔 굽혀 펴기 30회를 하는 습관을 들여 나갈 생각이다. 운동 끝날 때쯤 아내가 들어와 아침 식사를 한 후 이 글을 쓰고 있다.      


장모님, 처남 부부, 딸과 사위, 손주들, 아내 생각을 하니 가족이 무엇인가에 대한 생각이 떠오른다. 가족은 무엇일까? 도대체 무엇이길래 서로 안쓰러워하고 사랑하고 가끔 미워하며 살아갈까? 천륜은 금강도로도 베어낼 수도 없다. 끊을 수 없는 업보다. 업보는 부처님도 피해 갈 수 없다고 한다. 업보는 업에 대한 과보로 반드시 받아야만 되는 숙명이다. 배우자 역시 인연으로  맺어진 관계다. 인연도 업보다. 우리네 삶도, 지금 주어진 삶의 모습도 모두 업보다. 과거를 알고 싶으면 지금 살고 있는 모습을 보고, 미래를 알고 싶으면 역시 지금 살고 있는 모습을 보면 된다. 굳이 점 보러 다닐 필요도 없고 숙명통을 얻고자 노력할 필요도 없다. 지금 나의 모습은 과거의 총집합체다. 그리고 지금 살고 있는 모습이 미래의 씨앗이 된다. 가족 관계를 원만하고 사랑스러운 분위기로 만들어가며 가족 간의 업보에서 해방될 수 있다. 그러니 어떤 상황이든 가족을 사랑하고 아끼며 자신 몸 보살피듯 보살펴야 한다. 죽은 후 울고불고하는 짓은 어리석은 짓이다. 살아있을 때 서로 아끼고 사랑하며 살아가야 한다. 그리고 죽을 때는 편안하게 가실 수 있게 보내드리고 축하해 드리면 된다. 한평생 살아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으니 이제 몸에서 자유롭게 훨훨 날아가시라고 축하해 드리면 된다. 몸 때문에 욕심이 생기고, 욕심이 업보를 만든다. 몸이 사라지면 많은 욕심이 불필요해진다. 그러니 몸에서 자유롭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가?     


몸을 지니고 태어났기에 수행이 가능하다. 몸으로 인한 욕심은 수행의 근간이 된다. 욕심이 없다면, 번뇌가 없다면 수행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천신으로 태어나는 것보다 인간으로 태어난 것을 더욱 수승하게 여긴다. 인간으로 태어났기에 수행을 할 수 있고, 수행을 하면 깨달음에 이를 수 있어서 윤회라는 고통의 바다를 건널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 몸은 부모님을 통해서 받고, 부모님과 가족을 통해서 양육받으며 성장한다. 그러니 가족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가. 가족은 우리를 깨달음에 이르게 하는 뗏목이다. 가족과의 귀한 인연에 머리 숙이며 감사를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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