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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걷고 Oct 12. 2024

불이(不二) vs 분리(分離)

한강 작가가 노벨 문학상 수상을 했다는 가슴 벅찬 소식으로 모든 국민들이 행복해한다. 노벨문학상을 번역 없이 원문으로 읽을 수 있다는 자긍심과 기쁨도 크다. 예전에 전직 대통령이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는데 그때의 감흥은 기억나지 않고, 기억조차 사라진 지 오래다. 하지만 이번에는 다르다. 책을 사기 위해 서점으로 달려가는 사람들 모습을 뉴스에서 보며 나도 이번에는 책을 구입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읽던 읽지 않던 일단 보관하고 싶다는 생각마저 든다. 몇 권은 구입해서 차분히 읽어볼 생각이다. 오늘 아침 신문에 한 논설위원은 작가의 글을 읽다가 중도에 포기했다고 한다. 그 무게감을 견디기 힘들어서였다고 한다. 독자가 느끼는 무게가 이 정도라면 작가가 느끼는 무게감은 얼마나 컸을까? 작가의 고통은 단순히 글을 쓰는 고통이 아니다. 역사의 고통을 자신의 마음속에 담아 숙성시킨 후 자신만의 글로 표현한다. 숙성하는 과정은 참 힘든 시간이었을 것이다. 과거 역사 속으로 들어가 생생하게 경험하며 글을 써낸다. 주관을 지닌 인간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의 모습을 객관적으로 지켜보는 고통을 견뎌내야만 한다. 그 무게감을 견디고 감정에 매몰되지 않으며 냉철하게 글을 쓴다. 절제된 감정과 표현이 드러낸 것보다 훨씬 더 무게감이 크다. 스웨덴 한림원은 선정 이유로 “역사의 트라우마에 맞서는 동시에 인간 삶의 연약함을 드러내는 시적인 산문”이라고 밝혔다.       


광주 민주화 운동을 다룬 소설 ‘소년이 온다’와 제주 4.3 사건을 다룬 ‘작별하지 않는다’는 소설을 읽으며 치유를 받은 어머니와 한 어르신의 모습이 뉴스에 나온다. 과거 속 고통을 글로 표현된 소설을 읽으며 치유를 받았다는 것이 무척 놀랍다. 공감은 치유를 만든다. 요즘 사람들은 ‘공감’이라는 말을 자주 한다. “너의 감정을 충분히 공감한다.”, “너의 마음을 공감한다.”, “나도 그런 경험을 했기에 너를 충분히 공감할 수 있어.” 등등. 이런 공감은 공감이 아니다. 자신의 잣대와 경험과 판단으로 해석하며 상대방을 공감한다고 한다. 실은 공감은 무척 어려운 작업이다. 인간중심상담의 창시자인 칼 로저스는 공감을 이렇게 표현한다. “상대방의 마음속에 들어가 상대방과 똑같은 경험을 하되 그 경험과 감정에 매몰되지 않고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것.” 따라서 공감에는 ‘나’의 판단과 경험과 해석은 무의미하다. ‘나’라는 에고가 사라진 상태에서 비로소 공감이 이루어진다. 나와 너의 벽이 허물어져야만 공감이 가능해진다. 상담심리사로 상담을 진행하며 공감이 무척 어렵다는 것을 많이 경험한다. 그리고 나 스스로 공감을 참 잘 못하는 상담사라는 자괴감을 느끼기도 하며 공감을 위한 노력을 하고는 있지만 여전히 쉽지 않다. 지인들과 얘기 나누며 공감을 하려 해도 할 수가 없기에 차라리 입 다물고 듣는 태도를 취하는 경우가 많다.    

  

한강 작가의 소설은 실제 역사 속에서 큰 고통을 겪은 사람들에게 참다운 공감을 제공해 주었고, 그 결과로 독자들에게 치유를 경험하게 만들어주었다. 참다운 공감은 굳이 말이 필요 없는 경우도 많다. 공감한다는 사실은 공감받는 상대가 먼저 알아차리고 스스로 고마움을 표현하며 동시에 자신의 어려움을 극복하게 된다. <죽음의 수용소에서>의 작가로 유명한 정신과 의사이자 실존주의 상담 창시자인 빅터 프랭클은 한 내담자를 상담하는데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해서 고개만 끄덕였다고 한다. 그런데 나중에 지인을 통해 피드백을 들으니 자신이 상담을 너무 잘 진행해 주어서 내담자가 고통을 극복했다고 한다. 공감한다는 싸구려 표현이나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억지로 위로하려는 태도는 오히려 고통을 겪은 분들에게 더 큰 상처가 된다. 공감을 제대로 할 수 없다면 차라리 입 다물고 조용히 상대방의 말에 온몸과 마음을 기울여 정성스럽게 들어주는 것이 훨씬 더 큰 위로와 위안이 된다. 역사 속 고통받았던 사람들의 고통을 공감하기 위해 작가는 얼마나 큰 고통을 감수해야만 했을까? 이제는 조금 역사에서 떨어져 지내고 싶다는 작가의 심경이 충분히 이해된다.     

  

공감은 불이(不二)다. 하나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둘도 아니다. 너와 나, 이것과 저것은 하나는 아니지만 분리된 존재도 아니다. 서로 상반되는 존재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동전의 양면처럼 한 면이 사라지면 이면도 저절로 사라진다. 분리된 존재도 아니지만 동시에 하나도 아니니 불이다. 작가의 소설을 통해 과거 역사의 사람들과 불이의 관계가 된다. 반면 역사를 이용해서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려는 작자들에게는 이런 사건과 고통받은 사람들은 불이가 아닌 분리(分離)의 관계다. 에고가 들어가면 분리고, 에고가 사라지면 불이다. 사건과 상황을 이용하는 사람들은 분리의 세계를 살아가고 있고, 고락을 함께 경험하면 불이의 세계를 살아간다. 어쩌면 우리의 삶은 분리에서 불이의 세계로 이동하는 또는 변화하는 과정이 아닐까라는 생각도 해 본다. 분리는 투쟁과 갈등의 세상이고, 불이는 화합과 사랑의 세상이다.      


우리네 삶도 이와 같다.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분리된 또는 차별화된 자신과 자신만의 세상을 살아간다. 자신만이 특별한 존재라는 생각으로 자신만의 성을 높게 쌓고 두껍게 만들어간다. 하지만 언젠가는 이 벽을 부수고 주변 사람들 그리고 세상과 하나가 되어가는 과정을 겪는다. 물론 자신만의 성에서 평생 외롭게 살아가는 사람도 있다. 선택은 자신만이 할 수 있다. 불이의 세상에 살아갈지 아니면 분리의 세상에 살아갈지는 자신의 결정과 선택에 달려있다. 분리는 고통의 세상 즉 지옥이고, 불이는 평온의 세상 즉 극락이다.     

 

길을 걸으며 길벗을 만난다. 만나기 이전에는 분리의 관계다. 만나서 걸으며 불이의 관계로 변화한다. 각자 다른 개개인이 분리에서 불이가 된다. 자신 속에서도 분리에서 불이로 변화한다. 자신의 틀을 깨고 싶어 자신과 투쟁하며 살아간다. 그 과정이 쉽지는 않지만 일단 깨고 나면 통쾌함과 자유를 느낄 수 있다. 작은 균열이 시간이 지나며 점점 더 커지고 결국에는 자신의 알을 깨고 나온다. 알 속에서 본 세상과 알 밖에서 본 세상은 다른 세상이다. 알 속에서는 분리의 세상이고, 알 밖에서는 불이의 세상이 펼쳐진다. 뉴스에 나온 어떤 사람이 권력에 기생하며 파렴치하게 살아가는 삶의 모습을 보며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되었고 그 이후로 삶의 큰 틀을 바꾸기 시작한 멋진 길벗이 있다. 자신을 표현하는 방식으로 평상시 하고 싶은 일을 하며 그 분야의 전문가로 성장하며 자신의 틀을 깨어 가고 있는 멋진 길벗도 있다. 완벽함을 추구하며 삶을 견뎌낸 자신과 그 자신에서 탈피하려 투쟁하는 친구들이다. 막노동판에  8년 이상 온몸을 던지며 세상과 맞짱을 뜨고 삶의 이치를 깨달아가며 평범한 나날을 살아가는 매우 평범하지만 비범한 친구도 있다. 함께 걸은 세 명의 친구는 분리의 세상에서 불리의 세상으로 나아가고 있는 멋진 길벗이다. 그들과 만나서 수다를 떨고 웃으며 함께 걷는다. 그들을 통해 나의 모습을 발견하고 나 스스로 분리의 세상에서 불이의 세상으로 이동하기 위한 걷기를 한다. 길을 걸으며 자신과 타인의 분리, 자신 내부의 분리에서 불이의 세상으로 이동한다. 우리가 걷는 이유다. 길 위의 스승인 길, 자연, 길벗, 모든 존재에게 감사를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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