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3박 4일간 해파랑길을 걷기 위해 내일 아침에 출발한다. 오랜만에 며칠간 걷는다는 생각에 설렘이 가득하고 마음이 들뜬다. 그동안 무박 2일로 해파랑길을 걸었다. 그 나름대로 즐겁고 행복한 시간이었지만, 그럼에도 늘 아쉬움이 남아있었다. 그 아쉬움이 걷기에 대한 갈증인지, 길을 오랫동안 아무 생각 없이 걷고 싶다는 욕심인지, 길벗에 대한 그리움인지 잘 모르겠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게 알고 있다. 며칠간 쭉 이어서 걷는 중독의 맛을 이미 맛보았기 때문이다. 하루 걷는 것과 며칠간 계속해서 걷는 것과는 맛이 다르다. 매일 20km 정도를 걷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그럼에도 걷고 난 후에 느끼는 뿌듯함과 성취감, 그리고 피곤한 몸을 이끌고 걷는 자신과의 싸움을 통해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는 경험을 하게 된다.
하지만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이유는 자유일 것이다. 단 며칠간 만이라도 세상이라는 감옥에서 해방되어 자유를 만끽할 수 있다. 삶의 현장과의 물리적 거리감이 주는 자유가 있다. 삶의 책무에서 멀어진 심리적 거리감이 주는 자유도 있다. 삶이 감옥이라는 생각을 해본 적도 없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살아있는 한 삶의 구속에서 벗어날 수 없다.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 산다고 하지만, 그 행복 역시 자신이 만든 하나의 구속이다. 우리는 행복을 쟁취하기 위해 삶의 대부분을 바치고 살아간다. 그리고 행복의 성취감을 잠깐 느낀 후 다른 행복을 찾아가거나, 그 조차 느끼지 못하며 불행한 삶을 살아간다. 이런 논리라면 우리는 평생 불행할 수밖에 없다. 반드시 행복을 추구하며 살아야 할까? 행복의 의미는 무엇일까? 사람마다 내리는 행복의 정의는 다르다. 질병을 앓고 있는 사람에게는 건강이 행복이다. 노화로 고통받는 사람에게는 젊음이 행복이다. 경제적으로 고통받는 사람에게는 돈이 행복이다. 가족 간의 불화로 고통받는 사람에게는 화목이 행복이다. 행복은 편안한 마음 상태이지 어떤 고정적인 상태가 아니다. 따라서 행복의 정의와 기준과 우선순위는 사람마다, 또 각자 처한 상황에 따라 달라진다.
몸을 지닌 인간이기에 몸이 요구하는 것이 많다. 몸 때문에 욕심이 생긴다. 몸이 요구하는 안락함과 쾌락이 있다. 이것을 성취하면 순간적으로 행복을 느낄 수도 있지만, 이 역시 영원하지 않은 순간에 불과할 뿐이다. 따라서 더 큰 안락과 쾌락을 추구하게 되고, 결과적으로 중독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또한 사람들과 비교하며 심리적으로 비교우위에 서고자 하는 욕심이 있다. 하지만 비교를 하는 한평생 행복을 누릴 수 없다. 그렇다면 행복의 비결은 두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몸의 요구에서 자유로워지는 방법, 그리고 비교하지 않으며 살아가는 방법이다.
길을 걸으며 몸의 요구를 듣게 된다. 쉬고 싶다, 맛있는 음식을 먹고 싶다, 따뜻하거나 시원한 곳에서 눕고 싶다. 힘들게 걷지 말고 교통편을 이용하자, 그만 걷고 오늘은 여기서 마치자, 등등. 몸의 요구를 무시해서도 안 되지만, 몸의 요구에 꼼짝 못 하고 시중을 드는 몸의 종이 되어서도 안 된다. 우리는 길을 걸으며 이 두 가지 사이의 균형을 잡는 일을 배우게 된다. 몸의 요구를 무시하며 자신을 혹사시켜서도 안 되고, 몸이 요구하는 대로 따라서도 안 된다. 한쪽은 고통의 극단이고, 한쪽은 쾌락의 극단이다. 양 극단을 여의고 중도를 찾아 나가야 한다. 부처님 가르침이 바로 이 한 마디로 요약된다고 한다. 길을 걸으며 우리는 중도를 찾는 작업을 해나갈 수 있다.
길을 걷는 사람들은 길 위에서 모두 평등하다. 자신의 신분, 나이, 사회적 지위, 경제력, 경험 등을 모두 버리고 자신의 두 다리로 걸어야 한다. 위에 나열한 것들은 걷는 것에 도움이 되지도 않고, 오히려 방해물이 될 수도 있다. 길은 혼자 걷지만 혼자만 있는 곳이 아니다. 그 길의 주인은 길을 걷고 있는 자신이지만, 길을 걷고 있는 모든 사람들 역시 주인이다. 각자 주인임을 인정하고 비교하지 않고 동등한 사람으로 서로는 존중하고 배려하며 걸어야 한다. 길과 자연이 자신의 스승이 되고, 길을 걷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스승이 된다. 길벗과 마음이 맞지 않아 불편할 수도 있다. 그 불편한 마음이 스승이 된다. 상대방을 탓하는 마음을 자신에게 돌려 자신의 마음을 돌아봐야 한다. 같은 상황에서도 또 같은 사람을 만나도 사람마다 판단하고 그에 대처하는 방식이 다르다. 다른 것이 틀린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주어진 상황과 사람들 간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모든 감정과 생각들은 자신의 그림자이고 투사라는 것이다. 쉬운 일은 아니지만 길을 걸으며 늘 이 사실을 인식하며 자신을 살필 필요가 있다.
몸의 요구에 따른 중도의 균형을 유지하고, 사람과 상황으로 인해 일어난 감정과 생각 자체에 속지 않고 자신을 바라보는 연습을 하는 과정이 며칠간 함께 걸으며 우리 모두 해야만 하는 중요한 과제다. 길 위에서 또 길을 걸은 후 자신을 돌아보는 연습을 하고, 성찰하며 긍정적인 변화를 만들어 낼 수 있다. 우리가 걷는 이유는 물론 신체적 건강을 유지하기 위한 방편이기도 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자신의 성장과 변화를 만들어내기 위해서이다. 길 위에서 길벗과 함께 걸으며 일어나는 모든 감정, 생각, 느낌 등은 평상시 자신의 모습이다. 사회적 가면을 쓰고 살아가는 우리는 자신의 실체를 드러내지 않고 어느 정도 감추며 살아간다. 길을 며칠간 함께 걸으며 가면의 일부를 자연스럽게 벗을 수도 있다. 때로는 원치 않은 상황에서 자신의 모습이 드러날 수도 있다. 그때 그 모습을 서로 사랑해 주고 아껴주고 격려하는 모습도 길벗이 갖춰야 할 마음가짐이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 모두 부족하고 불완전한 사람들이다. 부족한 부분을 서로 사랑하며 채워주는 또 자신의 실체에 조금이라도 다가갈 수 있는 걷기가 되길 발원한다. 함께 걷는 길벗을 사랑합니다. 함께 걸을 수 있어서 행복하고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