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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걷고 Oct 21. 2024

보사수(步思修)

문사수(聞思修)라는 말이 있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세 가지 지혜를 의미합니다. 세 가지 지혜는 문혜(聞慧), 사혜(思慧), 그리고 수혜(修慧)입니다. 문혜는 부처님 법문을 듣고 공부하는 것을 뜻합니다. 사혜는 삶 속의 일을 부처님 말씀에 비추어 보는 것을 의미합니다. 수혜는 수행을 통해 삶의 변화를 이루어내는 지혜를 말합니다. 듣고, 생각하고, 살아가는 모든 것이 부처님의 말씀이 기준이 되어 지혜로운 삶을 살아가며 삶의 변화를 이루고 나아가 부처가 되자는 의미를 담은 매우 뜻깊은 말씀입니다.     

 

불법을 공부하는 방법은 다양합니다. 경전을 읽으며, 수행을 하며, 염불을 하며, 만트라나 정근을 통해서 공부할 수 있습니다. 이 외에도 다양한 수행법이 있을 겁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부처님 말씀이 기준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불교는 부처님의 가르침이니 부처님 말씀이 경전이 되고, 그 경전의 말씀을 따르는 것이 가장 올바른 수행법이 됩니다. 초기경전인 니까야를 공부하는 분도 많이 있습니다. 세월이 흘러서 어느 것이 부처님께서 직접 말씀하신 것인가에 대한 의견이 분분하기도 합니다. 그런 면에서 니까야를 읽는 것은 부처님 말씀을 생생하게 듣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돌이켜보니 경전 공부를 체계적으로 공부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집에는 니까야 전집이 있습니다. 사놓은 지는 10년이 넘은 것 같은데 아직 제대로 읽지 못했습니다. 언젠가는 니까야를 집중해서 읽을 날이 오리라 믿고 그 시절 인연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사혜는 일상 속에서 펼쳐지는 상황과 만나는 사람을 통해 공부해 가는 방법입니다. 상황과 사람으로 인해 만들어진 자극에 대해 대응하는 긍정적이고 부정적인 반응은 결국 에고의 작용입니다. 자신에게 편안하고 유리하면 좋아하고, 그렇지 않으면 싫어합니다. 좋아하는 것은 오랫동안 갖고 싶어 하고, 싫어하는 것은 빨리 떨쳐버리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이것이 마음대로 되지 않아 화가 나고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붙잡고 떨쳐내려는 마음과 행동 그리고 그에 따른 분노, 증애, 애착 등은 다른 업을 만들어 냅니다. 업을 만들었다는 것은 결국 에고를 강화하는 꼴이 됩니다. 자극에 반응하는 자신만의 습관적인 태도가 있습니다. 이 습관의 고리를 끊어내는 것이 수행입니다. 무의식적인 자극-반응의 고리를 끊어내고 새롭고 긍정적인 방식으로 대응 방식을 선택하며 삶의 주도권을 찾을 수 있습니다. 자신을 늘 잘 바라보고 마음챙김을 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자극에 즉각적이고 패턴화 된 반응을 하지 않고, 자극을 받을 때 발생하는 몸의 감각을 조용히 관찰하는 좋은 방법이 있습니다. 몸의 감각은 시간이 지나면 변합니다. 몸의 감각이 변하면서 발생한 자극이 의미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꾸준한 연습이 필요할 뿐입니다.      


수행을 통해 삶의 변화를 맞이하게 됩니다. 중생에서 부처가 되는 길입니다. 수행하는 방법은 다양합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불교에서는 수행이라고 하면 참선 수행을 의미합니다. 경전을 통해 알게 된 진리, 그리고 삶 속에서 체득한 진리가 참선 수행을 통해 하나가 됩니다. 들었던 부처님 말씀도 버리고, 삶 속의 진리도 모두 버리고 ‘참 나’를 만나는 수행을 통해 부처가 되어갈 수 있습니다. 부처님 말씀은 방편입니다. 중생이 쉽게 이해하지 못하기에 알아듣기 쉽게 설명하신 것입니다. 삶 속에서 만나는 모든 상황이 에고라는 것을 일깨우는 작업이 바로 참선 수행입니다. 말이 끊긴 자리, 알음알이가 사라진 자리, 에고가 모두 없어진 자리, 아뢰야식이 모두 비어버린 자리에 ‘참 나’가 그 모습을 저절로 드러냅니다. 마치 어둠 속에서 불이 들어오면 어둠이 사라지듯이 말입니다. 수혜는 다시 문혜, 사혜와 연결됩니다. 그리고 이 세 가지 바퀴가 서로 맞물려 나선형의 톱니바퀴를 만들어 깊은 지혜의 샘을 파게 되고 드디어 감로수를 맛볼 수 있게 됩니다.      


문혜는 아직 초입에도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사혜는 삶을 60년 이상 살아왔고, 지금은 나름 편안한 삶을 살고 있으니 중간 정도 들어온 것 같습니다. 수혜는 수박 겉핥기 하듯 꽤 오랜 기간 수박을 만지작거리고 있었으니 문 앞에 서 있는 정도입니다. 근데 다행스러운 일은 ‘걷기’라는 세계가 이 모두를 한꺼번에 공부할 수 있게 만들어주고 있습니다. 부처님 말씀은 진리의 말씀입니다. 자연의 섭리가 바로 진리입니다. 길을 걸으며 사계의 변화를 통해 무상을 체험합니다. 걸으며 느끼는 몸의 고통을 통해 몸이 ‘참 나’가 아님을 확인합니다. 무아를 체득합니다. 몸을 지녔기에 몸이 지치거나 다치면 고통스럽습니다. ‘고’를 체득합니다. 불법은 이 세 가지, 즉 무상, 고, 무아를 의미합니다. 길을 걸으며 체득하는 진리입니다. 길을 걷는 것이 바로 문혜입니다.    

 

길을 걸으며 길벗과 수다를 떨기도 하지만 조용히 침묵 속에서 걷기도 합니다. 침묵 속에서 자신과 만나게 됩니다. 오랫동안 걷다 보면 살아온 자신의 모습을 반성하기도 하고, 때로는 분노에 휩싸여 화를 내기도 하고, 때로는 억울함에 울음을 터뜨리기도 합니다. 길은 자신이 살아온 모습을 비추는 업경(業鏡)이 됩니다. 또한 길에서 만나는 또는 함께 걷는 길벗은 모두 도반이 됩니다. 도반은 나의 업경이 됩니다. 도반의 모든 모습이 바로 나의 모습입니다. 길벗으로 인해 또는 길벗 덕분에 발생하는 모든 생각과 감정은 바로 나의 것이고 나의 에고입니다. 이 에고는 마음공부의 대상이 되고, 알아차리고 흘려보내는 그 순간 에고는 사라집니다. 번뇌가 깨달음으로 변하는 중요한 순간입니다. 길을 걸으며 길벗과 주어진 상황을 통해 부처님 말씀을 따르게 됩니다. 사혜입니다.     


수행은 자발적이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걷는 것도 자발적이어야 합니다. 이유야 어떻든 걷기 위해 나오는 용기와 의지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길 위에 서게 되면 이미 수행의 반은 이룬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깨달음에 이르는 수행의 단계를 예류과 일래과, 불래과, 아라한과로 나눕니다. 그중 첫 단계인 예류과는 ‘도의 흐름에 든 자’를 의미합니다. 도의 흐름에 든 자는 도의 흐름에서 더 이상 벗어나지 않는다고 합니다. 즉 어느 정도 수행의 단계에 접어들어서 삶의 유혹에 빠지거나 업을 짓는 언행을 하지 않는다고 볼 수 있습니다. 걷기 위해 길 위에 서는 순간 우리는 모두 예류과에 든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추운 겨울에도, 무더위에도, 비바람이 몰아쳐도, 폭설이 와도 우리는 길 위에서 길을 걷습니다. 따뜻하고 시원한 집안의 유혹, 안락한 환경과 맛있는 음식에 대한 유혹, 자신의 야망에 대한 유혹 등 모든 유혹을 팽개치고 길 위에 서서 길을 걷습니다. 수행은 유혹과의 싸움입니다. 잠, 먹고 싶은 것, 몸의 편안함, 쉬고 싶은 마음 등은 길을 걷는 내내 우리를 유혹합니다. 이제 그만 걷고 안락한 곳에 들어가서 편히 쉬고 맛있는 것 먹고 마시며 즐기라는 유혹의 달콤한 속삭임을 들으며 그들과 한판 큰 싸움을 벌입니다. 길벗 한 분이 제게 ‘걷는 것은 수행’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참 멋진 말이고 마음 깊이 공감되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길을 걷는 것이 바로 수혜입니다.    

  

저는 문사수를 보사수 (步思修)로 바꾸어 부르고 싶습니다. 길을 걸으며 부처가 되는 것을 말하고 싶습니다. 자연을 걷는 것 자체가 부처님 법문을 듣는 것과 같습니다. 보혜(步慧)입니다. 길을 걸으며 마주치는 사람과 상황을 통해 자신의 모습을 확인하고 변화를 위한 노력을 합니다. 사혜(思慧)입니다. 길을 걷는 것 자체가 수행입니다. 수혜(修慧)입니다. 문사수는 바로 보사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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