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걷고 Oct 26. 2024

아상(我相)

걷기 모임 나가기 전 아침에 아내와 사소한 말다툼이 있었다. 필요한 물건을 사달라고 했는데 아내는 그 용도로 사용될 수 있는 비슷한 물건이 있으니 확인한 후에 사자고 했다. 별로 원하는 것도 없고 사고 싶은 것도 없는 사람이 오랜만에 필요한 물건이 있다는데 사주지 않는다고 심술을 부렸다. 아내는 아내대로 자신의 뜻을 이해해주지 않는다고 서운해했고, 나는 원하는 것을 들어주지 않는다고 서운해했다. 집을 나오며 금방 후회가 밀려왔다. 아내는 주 나흘간 딸네 머물며 힘든 시간을 보내고 아침에 막 집에 들어왔는데, 그 힘든 사람에게 사소한 부탁을 들어주지 않는다고 화를 내고 있는 나의 모습이 참 못났다는 생각이 들었고 동시에 많이 미안했다. 지하철에서 집안일 관련된 다른 얘기를 카톡으로 했고, 아내는 부드럽고 편안하게 답변을 해왔다. 이로서 말다툼은 끝났고, 아침의 서운함도 사라졌다. 아내를 불편하게 만들지 말자는 다짐을 하지만 언제 어떤 상황에서 또 이와 유사한 일이 발생할지 모르겠다.    

  

오랜만에 반가운 친구들이 찾아왔다. 이 좋은 날 반가운 친구들, 그리고 늘 함께 걷고 있는 길벗과의 걷기는 삶의 큰 재미이자 활력이다. 오랜만에 찾아온 한 길벗과 지난 얘기를 나누며 걸었다. 친구와의 최근 상황을 얘기하며 자신의 속내를 꺼내놓는다. 사람 관계는 참 어렵다. 나 역시 나이 들어가면서 사람관계가 편안해져야 하는데 그렇게 되지 않아 고민이라는 얘기를 했다. 실제로 그렇다. 사람들 만나는 일이 점점 더 조심스러워지고 어디까지 얘기를 해야 하고 어떤 것은 참아 넘겨야만 하고, 어떤 것은 그냥 흘려보내야 하는지 그 경계를 잘 모르겠다. 말을 하지 않고 있자니 답답하고, 말을 하자니 굳이 얘기를 해야만 했을까라는 후회가 들기도 하고, 참고 있자니 마음속에는 불편함이 올라오고. 이런 것에서 벗어나고 싶은데 점점 더 어려워지는 것 같다. 노화 현상의 하나일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사고의 경직성은 나이 들어가면서 생물학적으로 발생하는 대표적인 노화현상이다. 나의 뜻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서운해하거나 화를 내고, 반대로 상대방의 뜻은 대충 무시하거나 잘 들으려 하지 않는 태도 등이 나타난다. 나에게도 분명 그런 모습이 많이 있다. 이런 모습에서 자유롭고 싶지만 잘 되지 않는다. 길벗은 내가 평생 지녀야 할 화두라고 말했고, 나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길을 걸으며 이런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것은 매우 좋은 일이다.     

 

친구 한 명이 같이 걷고 싶다고 해서 지인으로 신청해서 같이 걸었다. 이 친구를 오랜만에 만나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며 나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80년대 말에 서강대 MBA 과정에서 만난 친구다. 그 당시 회사에서 학비를 지원해 줘서 공부를 하게 되었다. 그 친구와 나는 시작부터 많이 달랐다. 나는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좋아해서 대충 놀면서 공부했고, 그 친구는 매우 성실하고 진지하게 공부했다. 나는 5학기를 모두 마쳤으니 굳이 논문을 쓸 필요가 없다는 잘못된 생각으로 수료에 그쳤고, 그 친구는 학위를 받았다. 성실성에서 이미 그 친구와는 큰  차이가 났다. 국제 포교사 자격증을 취득 후 활용하지 않았고, 그 친구는 자격증 취득 시 수석으로 품수를 받았고, 종단에서 대만에 연수를 보내주기도 했다. 같은 공부를 해도 나는 대충 했고, 그 친구는 매우 성실하게 공부했다. 상도선원에 다니면서 공부할 때 그 친구를 종무실장으로 추천했고, 그 친구는 매우 성실하게 근무하며 스님들과 신도들에게 큰 신임을 받았다. 그 이후에 KOICA 등에서 자문관으로 해외활동을 이어왔고, 귀국 후 국내 유명 사찰에서 temple stay 담당자로 근무하며 꾸준히 불교와 인연을 이어가며 공부하고 있었다. 앞으로는 국제 포교사 사무국장을 맡아 근무하게 될 것 같다. 축하할 일이다.      


이 친구와 나의 지난 삶을 비교해봤다. 외국 회사 근무 경력, MBA 과정, 국제 포교사 자격증, 불교 공부와 사찰 내 활동 등 같은 길을 걸어왔다. 그는 주어진 상황을 수용하며 그 안에서 자신의 길을 펼치며 살아왔고, 나는 늘 주어진 상황에 반항하며 제도권에서 벗어나 있었다. 국제 포교사 자격증 취득 후 연등 행사에서 외국 대사 가족 의전 담당 의뢰가 들어왔었지만, 거절했다. 이유는 그런 역할을 할 만큼 내 영어가 충분하지 않았다는 거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당시 나의 영어로는 가능한 일이었지만, 자신이 없었다. 나 자신에 대한 믿음이 없었고, 열등감과 낮은 자존감 때문이었다. 무슨 일이든 시작하길 어려워하는 편이다. 일단 하면 어느 정도 수행할 수 있는 일임에도 거절하거나 기피한다. 그 이면에는 자신감 부족과 열등감이 늘 도사리고 있었다. 또한 기존 질서나 제도권에 대한 막연한 거부 반응도 갖고 있었다. 왜곡된 사고로 인한 어리석은 생각 때문이다. 국제 포교사 활동이나 temple stay 담당자 역할을 할 수 있는데도 스님들 사이에서 잘 지낼 자신이 없었다. 오랜만에 그 친구를 만나 함께 걸으며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 보니 예전 기억이 떠오르며 나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결국 문제의 원인은 내게 있었다. 주어진 상황을 받아들이거나 그 속에서 살지 못하고 늘 파랑새만 쫓고 있었다. 결국 적응하지 못하며 살아왔다. 불만과 불평을 하며 살아가고 있었고, 그런 이유 때문에 지금-여기 주어진 일에 최선을 하지 못했고 늘 떠돌이처럼 활동해 왔다. 열등감과 낮은 자존감이 사회 속에 적응하는데 문제를 만들어냈고, 결과적으로 기존 제도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늘 혼자 지내고 있었다. 아내나 그 친구의 공통점은 매 순간 주어진 일을 묵묵하게 하며 그 안에서 나름 충만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점이다. 그에 반해 나는 주어진 상황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지난 후에 후회를 하는 생활을 반복하고 있었다. 요즘 들어서 겨우 나의 길을 찾았고, 지금 그 길을 가고 있고, 과정에서 발생하는 상황에 대해 불평보다는 나를 돌아보는 연습을 하거나 때로는 견디는 연습을 하며 조금씩 적응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  

    

걷기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아상(我相)’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흔히 아상이 높다는 말은 자신의 입장을 자랑하며 남을 우습게 보는 것을 의미한다. 못난 놈이 못난 짓을 한다. 아상이 높은 사람은 결국 열등감이 많고 자존감이 낮은 사람이다. 아상이라는 단어가 떠오른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나의 못난 점을 인정하지 못하고, 남을 평가하거나 폄하하며 마치 무엇인가를 아는 체하며 나 자신을 속이며 살아왔다. 이제 조금씩 나의 아상을 벗기는 작업을 할 때가 왔다. 아무 일도 아닌 일로 아내와 다투었고, 오랜만에 만난 친구의 모습과 그간 살아온 과정을 돌이키며 나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다. 자신의 참모습을 보지 못한 채 아상만 키우며 살아왔다. 어제 나의 아상을 제대로 볼 수 있었다. 물론 본다고 바로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다만 아상이 높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확실하게 알게 되었다. 이제는 아상을 죽이는 작업을 해야만 한다. 동안거를 하는 이유를 찾게 되었다. 단순한 삶을 살고 싶다는 생각에서 낸 마음이었는데, 어제 일을 통해 동안거의 목적을 찾을 수 있었다. 아상을 죽이는 작업, 또는 조금씩 줄여나가는 작업이 이번 동안거의 목적이다. 못난 모습도 나의 모습이고, 그렇지 않은 모습도 나의 모습이다. 못난 모습을 가릴 필요도 없고, 그렇지 않은 모습을 굳이 드려 낼 필요도 없다. 어차피 나의 모습은 나 스스로 알고, 주위 사람들은 다 알고 있다. 그냥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면 된다. 그리고 나의 할 일을 하면 된다. 그 할 일 안에 자신의 아상을 죽이는 작업이 들어있다.      


밤새 이 생각을 하느라 잠을 설쳤다. 글로 정리하고 나니 조금 마음이 가벼워진다. 반가운 친구들과의 만남, 아내와의 사소한 다툼이 큰 선물을 가져다주었다. 잘 간직할 필요가 있다. 어제 함께 만나 걸었던 길벗들에게도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함께 걸어 즐거웠고, 덕분에 행복했다. 


매거진의 이전글 보사수(步思修)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