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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걷고 Nov 20. 2024

만행 (萬行)

스님들이 안거를 마친 후 이곳저곳을 자유롭게 다니며 법을 펼치거나 또는 공부한 것을 점검하는 것을 만행이라고 한다. 만행을 운수행각(雲水行脚)이라고도 한다. 구름과 물처럼 걸림 없이 자유롭게 한 곳에 머물지 않고 인연 따라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구름과 물은 그 형체가 없다. 보이기는 하지만 일정한 형태가 없이 바람이 부는 대로 또는 물이 흐르는 대로 자신을 내려놓고 흘러간다. 무심이다. 만행은 무심을 실천하는 공부법이라고 할 수도 있다. 무심은 무아다. 만행에는 한 가지 원칙이 있다. 두타행(頭陀行)이다. 두타(dhta)란 산스크리트어로 ‘버리다’, ‘씻다’를 뜻한다. 즉 두타행이란 모든 집착과 번뇌를 버리고 수행하는 것을 의미한다. 집착과 번뇌는 ‘나’로 인해 발생한다. 무아의 철저한 체득만이 올바른 두타행을 이룰 수 있다.      


만행은 집착과 번뇌에서 벗어나기 위한 수행법이고, 안거도 역시 마찬가지다. 그러니 안거가 곧 만행이 되고, 만행이 곧 안거가 된다. 차이가 있다면 안거는 산문 안에서 수행하는 것이고, 만행은 산문 밖에서 수행하는 것이다. 또한 산문 안에 있건 밖에 있건 행주좌와어묵동정(行住坐臥語默動靜) 중에 끊임없이 공부가 이어져야 참다운 수행이라 할 수 있다. 선방에 주리를 틀고 앉아있다고 모두 수행하는 것이 아니듯이, 운수행각을 한다면서 막행막식을 하는 것 역시 수행이 아니다. 일상생활 속에 수행은 늘 함께 있어야 한다. 이 가장 기본적이고 원칙적인 수행법을 익히기 위해 안거를 하고 만행을 한다.      


2박 3일간 해파랑길을 다녀왔다. 안거를 시작한 지 채 며칠이 되지도 않아 만행을 떠난 것이다. 처음에는 조금 꺼림칙하기도 했지만, 길을 안내하는 사람으로서 약속을 지키는 것이 우선이라는 생각이 들어 길벗과 함께 떠났다. 공부가 익숙하지 않아 공부가 잘 이어지지 않는다. 좀 더 솔직하게 표현하면 길을 걸으며 공부는 이미 멀리 달아나버렸다. 그리고 가끔 안거 중이라는 생각이 올라오면 잠시 감각에 집중한다. 앉아 있을 때는 몸과 좌석의 접촉 감각을 느낀다. 손에 핸드폰을 쥐고 있는 손의 감각을 느낀다. 매 순간 몸에서 느껴지는 감각을 느끼려 노력한다. 사띠(sati)의 의미 중 하나가 ‘기억하다’다. 즉 매 순간 생각이나 감정에 빠지지 않고 감각 집중을 통해 번뇌와 집착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을 상기하라는 의미다. 아주 짧은 시간이지만 신체의 감각을 통해 삼매를 느껴본다.      


이른 아침 산길을 오르며 자연스럽게 침묵 걷기가 된다. 쌀쌀한 새벽 공기를 마시니 정신이 바짝 든다. 어둠을 뚫고 렌턴에 의지하며 길을 걷는다. 거센 바람이 몸을 스친다. 바람의 소리와 감촉을 느낀다. 발의 감각에 집중하려 하는데 잘 되지 않는다. 왼발, 오른발 명칭을 마음속으로 부르며 한 발 한 발 내딛는다. 명칭과 동작이 일치하며 잡념이 끊긴다. 선두에 서서 조금 앞서 나가며 침묵 속에서 한 발 한 발 정성스럽게 명칭을 부르며 나아간다. 다시 바람이 몰아친다. 얼굴과 옷깃에 스치는 바람소리와 감촉을 느낀다. 새소리가 들린다. 잠시 새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그리고 다시 왼발, 오른발 명칭을 부르며 걷는다. 저 멀리 수평선 너머에서 구름에 가려진 일출이 서서히 드러난다. 잠시 일출을 바라본다. 단지 바라 볼뿐이다. 좋다, 멋있다, 황홀하다 등등 감정은 배제하고 오직 ‘바라봄’만 있다. 물을 한잔 마신다. 손에 느껴지는 보온병 뚜껑의 차가운 감촉을 느낀다. 뚜껑에 따뜻한 차를 받아 마시며 입술에 가져간다. 뚜껑과 입술의 접촉점을 채 느끼기도 전에 이미 물을 마셔버린다. 순간 놓쳤다.      


간식을 먹으며 즐거운 대화를 이어간다. 대화에 집중하지 못하고 하고 있는 말에도 역시 집중하지 못한다. 아직 어설프다. 그리고 길벗의 언행을 바라보며 올라오는 여러 감정을 살피려 노력한다. 때로는 고마운 감정, 때로는 즐거운 감정, 때로는 불편한 감정이 떠오른다. 내 안의 무의식 또는 말라식이 활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하고 초점을 감정의 대상에서 자신에게 맞춘다. 그리고 이미 그 감정은 과거의 것이라는 것을 미래 즉, 한참 시간이 지난 후에야 알아차린다. 1초 전의 감정은 이미 과거의 감정이다. 그 감정을 안고 2초 후의 미래 감정까지 만들어낸다. 지금-여기, 이 찰나의 순간에는 어떤 감정도 있을 수 없다. 오직 신체나 마음 또는 생각이 만들어 낸 감각만이 존재한다. 그리고 흘러간다. 물과 구름처럼.     


즐거운 식사시간이다. 밥을 한술 뜨기 전에 미리 밥 먹는 행위를 알아차렸어야 했는데 이미 놓쳐버렸다. 한참 먹다가 중간에 겨우 알아차리고 숟가락의 감각을 느끼고 음식 맛을 음미해 본다. 음식 맛을 알아차리기도 전에 이미 음식은 목구멍을 넘어 아래로 내려간다. 내가 음식을 먹는 건지, 음식이 저절로 내 위장으로 내려가는 건지 구별이 안된다. 밥을 먹으며 ‘나’라는 존재는 사라져 버렸다. 오직 신체 기관의 작용만 있다. 나의 몸이고 나의 산체작용임에도 정작 주인을 사라져 버렸고, 오직 먹는 행위만 남는다. 그 음식은 과연 누가 먹고 있는 것일까? 내가 먹고 있지만, 그 먹는다는 사실을 채 인식하기도 전에 음식은 넘어간다. 그러니 내가 먹는 것이 아니고 귀신이 먹는 것이다. 내 몸이지만 이미 내 몸은 아니고, 내가 하는 행동이지만, 이미 내가 하는 행동이 아니다.      


하루 걷기를 마치고 침대에 누워 겨우 안거기간이라는 사실을 상기시키며 겨우 정신을 차린다. 그리고 아주 짧은 시간이지만 수행을 한다. 침대와 몸의 접촉 지점을 느낀다. 옆으로 누워 옆구리와 침대의 접촉점을 관찰한다. 그리고 호흡을 하며 배의 ‘부풂과 꺼짐’을 관찰한다. 피곤해서 또 익숙하지 않아서 잘 되지 않는다. 다시 두 다리가 포개진 부분의 감촉을 느끼고, 오른 팔이 침대 끝 부분에 닿는 감촉을 느낀다. 머리와 베개가 닿는 감촉도 느낀다. 그리고 다시 배의 관찰로 돌아온다. 이 관찰과 알아차림을 반복하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잠에 든다. 피곤한 몸이 만들어 낸 곤한 잠이다. 아침에 일어난다. 일어나는 순간 알아차리지 못하고 허둥지둥 욕실에 들어가 세면과 양치질을 한 후 걷기 위한 준비를 챙긴다. 그리고 이 순간 어느 하나도 알아차리지 못하고 몸이 자동적으로 하고 있다. 내 몸인데도 내가 알아차리기 진에 이미 몸이 움직인다. 이 몸의 주인은 틀림없이 ‘나’인데, 주인의 지시나 명령 없이 스스로 움직인다. 그럼 과연 이 몸의 주인은 어디로 갔고, 지금 움직이고 있는 놈은 무엇일까? 귀신일까?      


안거 또는 만행, 어떤 이름을 붙여도 수행은 매 순간 알아차리는 것 외에는 없다. 순간, 찰나가 전부다. 순간은 흘러간다. 무상이다. 무상한 것을 잡으려 하거나 밀어내려 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는다. 괴로움이다. 본래 구름이나 물처럼 모습이 없는데 자신이 있다고 착각하며 살아간다. 오직 잠시 머물다 사라지는 신체작용인 몸과 정신작용인 생각만 있을 뿐, ‘나’라는 존재는 없다. 무아의 체득은 세상 고통을 사라지게 만든다. 0.1초 전의 감정, 생각, 행동은 이미 과거가 되어버렸다. 그것이 나의 것이든 또는 남으로 인해 발생한 것이든 모두 과거다. 과거가 미래를 잡아먹으면 우리는 과거의 노예가 된다. 미래가 지금을 잡아먹으면 우리는 미래의 노예가 된다. 후회, 공상, 망상, 집착과 분노 등은 대부분 과거와 미래가 만들어낸다. 이것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이 바로 ‘지금-여기’를 사는 것이다.


 ‘지금-여기’에는 오직 접촉을 통한 감각만이 존재한다. 감각은 감정과 생각이 없다. 감각은 감각일 뿐이다. 감각은 순수한 감각이다. 따라서 어떤 감정이나 생각 등이 들어올 틈이 없다. 현재, 즉 ‘지금-여기’를 살아가면 행복한 이유가 모든 감정이나 생각, 집착과 번뇌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안거를 하거나 만행을 하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두타행의 원칙을 지키기 위해 ‘지금-여기’를 살아야 한다. 그러니 비록 안거 기간이지만 해파랑길을 만행의 방편으로 삼은 것은 자기 합리화가 아닌 살아있는 공부를 하기 위한 방편이 될 수 있다. 이 역시 자기 합리화라는 사실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다. 내 마음이 그렇다. 하지만 길 걷는 것을 만행으로 만드는 것 역시 나 자신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해파랑길을 다녀온 후 아침에 일어나 30분간 경행과 좌선을 했다. 몸의 피곤함으로 인해 조금 엉성하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이번 만행에서 보고 느낀 것이 조금은 있었는지 수행에 임하는 마음가짐은 조금 더 진지해진 느낌이다. 길을 걸으며 만행을 하고, 집에서 수행을 하며 안거를 하며 이번 동안거를 잘 마치길 발원한다. 함께 걸은 길벗은 모두 나를 비추는 거울이 되고, 그 거울은 바로 나의 스승이다. 또한 길에서 만난 모든 사람과 상황 역시 나의 스승이다. 만법이 스승이다. 그래서 만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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