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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걷고 Nov 21. 2024

변화

새벽에 화장실 다녀오느라 잠에서 깬 후에 다시 잠이 오지 않는다. 시간은 오전 4시 20분경. 평상시 같으면 다시 잠에 들기 위해 억지로라도 눈을 붙이는데 오늘은 바로 수행을 하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세수한 후 경행을 시작한다. 아침 시간이 여유로워 한 시간을 정해서 경행을 한다. 스님 법문 말씀대로 세 단계로 나눠 각각 15분, 15분, 30분씩 할애해서 한다. 경행을 시작하고 조금 집중되는 느낌이 들면서 늘 손이 팽창하는 느낌을 받았는데, 오늘은 다르다. 손가락이 가렵다. 경행을 하다 멈춰 서서 ‘가려움’이라고 마음속으로 명칭을 붙여본다. 10회 이상 했는데도 가려움이 사라지지 않아 무시하고 다시 경행을 한다. 여전히 가려움은 지속되지만 참고 경행을 한다. 가려움이 따가움으로 변한다. 견디기 힘들어 긁는다. 긁기 전 긁으려는 의도를 파악한 후 행동에 옮긴다. 가려움이 목 뒤 부분으로 옮겨가고, 왼손에서 오른손까지 진행된다. 꽤 오랜 시간 경행을 멈추고 가려움을 관찰하거나 견뎌본다. 세 번째 단계에 들어가며 가려움은 사라진다. ‘듦-감-놓음’이라는 세 단계로 매우 천천히 움직이는데 발등과 발가락 사이에 바람이 느껴진다. 이 단계의 경행을 할 때 매번 느껴지는 감각이다.   

   

한 시간 경행을 마친 후 좌선을 하기 위해 몸을 서서히 이동한다. 좌복에 앉기 전 천천히 몸의 동작을 알아차리며 앉는다. 한 시간 좌선을 할 생각으로 시간을 맞춰놓고 좌선을 시작하는데 잠이 몰려온다. 배의 ‘부풂-꺼짐’을 관찰하는데 관찰을 하지 못하고 잠에 빠진다. 다시 정신 차리고 관찰하는데 두세 번 하기도 전에 잠에 빠진다. 억지로 견뎌본다. 하지만 배를 관찰하는데 번번이 실패한다. 시간을 보니 40분 정도 흘렀다. 40분간 배의 움직임을 관찰한 것은 채 5분도 되지 않는 것 같다. 더 이상 좌선을 하는 것이 무리라는 생각이 들어 잠 자기로 결정한다. 두 시간 정신없이 잔 것 같다. 깨어난 후 좌선 시 잠이 몰려오면 경행을 하라는 법문이 기억난다. 만약 잠에 들지 않고 경행을 했다면 가능했을까? 그리고 이어서 좌선을 다시 시작할 수 있었을까? 잘 모르겠다. 하지만, 아무튼 오늘 좌선은 잠선이 되었다. 이것도 좋은 경험이다. 해파랑길 다녀온 후 아직 몸이 완전히 회복이 안 된 거 같다.      

 

오전에 손자 병원 예약 시간에 맞추기 쉽지 않아 서둘러 나갈 채비를 한다. 간단히 식사를 한 후 손자를 태우고 병원으로 이동한다. 식사 시간에 식사하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정신없이 먹기 바쁘다. 운전을 하며 운전대를 잡은 손의 감각을 의식적으로 느끼며 운전한다. 겨우 시간 맞춰 병원에 들여보낸 후 병원이 있는 건물에서 기다리며 커피를 마신다. 커피 잔을 만지며 뜨거움을 느낀다. 마시기 전 입술이 닿는 컵 테두리의 감촉을 느끼며 한 모금 마신다. 마시기 전 커피 향을 천천히 느껴본다. 그리고 마시며 커피의 맛과 뜨거움을 구강 전반에서 느낀다. 커피가 내려가는 과정을 살펴본다. 목구멍의 뜨거움 외에는 잘 느껴지지 않는다. 한 모금, 한 모금 마실 때마다 이 과정을 반복한다. 예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순간의 동작과 감촉과 감각을 느낄 수 있다. 예전에는 커피를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빨리 마시고 잔을 내려놓는 것을 무의식적이고 습관적으로 하며 지내왔다. 커피를 마시는 것도 습관의 일부일 뿐이고 커피 마시는 전 과정을 알아차리며 마신 적은 없었다. 작은 변화가 시작된 것 같다.      


커피를 마신 후 건물 내 복도를 걷는다. 약 폭은 1.5m, 길이는 10m 이상 되는 한적한 복도가 있다. 경행 하기에는 아주 좋은 환경이다. 왼발, 오른발 명칭을 붙이며 걷는다. 30분 이상 경행을 한 후 근력 운동을 한다. 일상생활을 할 때 신는 신발은 늘 같은 신발로 가벼운 트레킹을 할 수 있는 신발이다. 얼마 전부터 걸을 때마다 발의 온기와 습기를 예전보다 더 많이 느낀다. 발은 늘 건조한 편인데, 최근에는 건조함이 약간 축축한 느낌으로 변한 것 같다. 오늘 밤에 집에 오면서도 또 한 번 느꼈다. 어쩌면 경행을 하며 발의 감각이 조금 살아나서 그런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스승님이 계신다면 이런 상황에 대해 질문하며 수행의 진전 상황을 파악할 수 있을 텐데 아쉽다. 스승이 수행에서는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아침에 전철에서 내리며 실수로 옆에 있는 젊은 사람을 가방으로 살짝 건드렸다. 목례로 미안함을 표현했는데, 그 친구는 불편한 눈초리로 째려본다. 대학생으로 보이는 남자아이다. 순간 욱하며 감정이 올라온다. 미안함을 표현했는데도 불쾌한 표현을 한 그 어린 친구가 괘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친구는 다시 핸드폰을 보고 있고, 나는 그의 머리 위에 눈초리를 보낸다. 그리고 전철 문이 열리기 전까지 불쾌한 마음이 잠시 머물렀다. 내리면서 왜 불쾌했을까? 라며 초점을 상대방에서 나에게로 돌려본다. 단지 그의 눈초리가 불쾌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어린 사람이 무례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나이가 감정과 무슨 상관이 있을까? 또한 눈초리는 감정이 없다. 다만 그 눈을 바라보는 나의 마음에 감정이 일어난 것뿐이다. 말이나 행동 자체에는 어떤 감정도 없다. 다만 그 언행을 받아들이는 나의 마음속 감정이 그렇게 바라 볼뿐이다. 다행스럽게 그 불편한 감정은 빨리 사라졌다. 지금 이 글을 쓰며 다시 상기해 보니 아무 일도 아닌 것을 갖고 스스로 꼰대짓을 한 것에 불과하다.      


경행을 하며 손의 팽창이나 가려움, 바람을 느낀다. 몸이 느끼는 감각일 뿐이다. 내가 만든 것도 아니고 어디서 온 것도 아니다. 그냥 몸이 있으니 몸이 저절로 느낀 것뿐이다. 감각은 나일까? 나의 감각이 과연 맞을까? 내 신체가 느낀 것은 맞지만, 그 신체가 과연 나일까? 지하철에서 받은 눈초리로 인한 감정은 나의 감정일까? 근데 그 감정은 금방 변했다. 그럼 느꼈던 불쾌한 감정은 어디로 갔을까? 눈초리는 감정이 없는데 왜 불편한 감정을 느꼈을까? 그 감정은 과연 나의 감정일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과연 ‘나’라는 실체가 있는 것일까라는 생각이 든다. 몸이 느끼는 감각이 있고, 마음이 느끼는 감정이 있다. 하지만, 이들은 상존하지 않고 매 순간 변한다. 몸과 마음을 자신이라고 생각하지만, 감각과 감정이 늘 변하면 과연 자신은 어떤 것일까? 변한다는 것은 실체가 없는 것이 아닐까? 위빠사나는 몸의 신체작용과 마음의 정신작용을 면밀히 관찰하며 무상, 고, 무아를 통찰하는 수행이라는 사실을 조금씩 알아가고 있다.


“마음의 움직임을 관(觀) 해 보면, 마음의 기본적인 특성을 알 수 있다. 즉 그것은 끊임없이 흐르는 것이고(無常), 만족스럽지 못한 것이고(苦), 실체가 없는 것이다(無我). 여러분은 이와 같은 마음의 현상을 알아차리고 면밀히 관찰해야 한다.” (고요한 숲 속의 연못, 아잔차 스님 위빠싸나 수행 법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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