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으며 왼발, 오른발을 마음속으로 부르며 걷는다. 길벗은 나를 배려해 조금 멀리 떨어져서 걷는다. 걷기 명상하는 나를 위한 배려다. 고맙다. 배려는 상대방의 입장에서 하는 배려가 참 배려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너를 위해 하는 배려’라고 하는 말은 다소 폭력적일 수도 있다. 참다운 배려와 공감은 참 어려운 작업이다. 자신이 없어져야 비로소 배려와 공감을 제대로 할 수 있게 된다. ‘자기(ego)'가 있는 상태에서 하는 배려와 공감은 말만 그럴 뿐 실제로는 자기만족 또는 자기 괴시에 불과하다. 자기를 버려야 비로소 타인, 주변, 자연, 마주치는 모든 상황과 하나가 된다. 하지만 ’ 자기‘를 지키기 위해 또 자기의 성을 쌓기 위해 평생 노력해 온 사람이 자기를 버린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잠시 쉬면서 파도를 바라본다. 파도를 보는 감각 기관인 ‘눈’이 있다. 눈이 있기에 볼 수 있다. 보는 대상인 ‘파도’가 있다. 대상이 없다면 볼 수 있는 것 역시 없어진다. 가장 중요한 것이 한 가지 있다. 보는 ‘의식’이다. 보고 있다는 의식 또는 마음, 보는 것을 알아차리는 깨어있음, 보겠다는 의지를 ‘의식’이라 할 수 있다. 이 세 가지, 즉 감각기관, 대상, 의식이 있어야 비로소 ‘봄’이 성립된다. ‘봄’에는 ‘나’라는 존재는 없다. 따라서 본다는 것은 결코 ‘나’가 보는 것이 아니다. 볼 대상이 있고, 볼 수 있는 감각 기관이 있고, 보겠다는 의지작용이 작용해서 ‘봄’이 이루어진다. 그럼 보고는 있지만 그 보는 주인인 ‘나’는 과연 존재할까? ‘나’는 누구이고 무엇일까? 파도는 보고는 있지만, 눈, 대상, 의식이 보고 있을 뿐이지, 보고 있는 주인인 ‘나’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에는 ‘나’는 있다고 생각하고, ‘나’를 채우기 위해 한평생 노력하고, ‘나’가 무시당하면 분노를 표출하고, ‘나’의 상대적 우월감을 드러내기 위해 시간과 에너지를 소모한다. 존재하지도 않는 ‘나’라는 유령을 위해 한평생 바치며 산다.
논리적으로 생각하면 위의 내용을 이해할 수는 있다. 하지만 실제 상황인 삶 속에서 이를 체득하고 늘 깨어있는 상태에서 바라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꾸준하고 반복적인 연습이 필요하다. 파도를 바라보며 작은 깨달음을 순간적으로 얻었다고 해서, 그것이 바로 삶과 직결되지는 않는다. 평상시 쌓아온 업의 힘이 순간적인 깨달음을 쉽게 눌러버린다. 그리고 예전의 모습으로 살라고 끊임없이 유혹한다. 그 유혹은 익숙하고 달콤하다. 몸에 나쁜 약이나 음식과 같다. 우리가 어리석은 이유는 이 유혹을 자신을 위하는 것이라 착각하고 평생 그 착각 속에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익숙한 것을 설게 만드는 것이 마음공부라고 옛 현인들께서 말씀하셨을 것이다.
길을 걸으며 때로는 즐거움을 때로는 힘듦을 느낀다. 몸을 지니고 있기에 체력에 문제가 발생할 수도 있고, 생리적인 현상이 갑자기 찾아올 수도 있고, 쉬고 싶다는 유혹과 맛있는 것을 먹고 마시고 싶다는 갈증을 느낀다. 몸의 요구를 따르면 결국 몸을 망치게 된다. 그렇다고 몸을 무시하면 역시 몸을 망치게 된다. 유혹과 절제 사이의 균형이 필요하다. 부처님은 한 나라의 왕자로 태어나서 출가 전까지 음식과 숙소 등 부족한 곳이 없는 곳에서 지내시며 안락함을 누리셨지만, 편안함 보다는 괴로움을 느끼셨다. 출가 후 온갖 고행이라는 고통을 통해 괴로움에서 벗어나려고 시도했지만, 이 역시 괴로울 뿐 평온함을 느끼지 못하셨다. 그리고 좌선에 들며 고통과 쾌락의 양극단에서 벗어나 평온함을 이루게 된다. 몸과 마음의 괴로움과 즐거움의 양극단을 벗어나는 방법은 무엇일까?
괴로운 이유는 ‘나’라는 존재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과연 ‘나’는 누구이고 무엇일까? 바다는 바다다. 파도는 바다의 한 모습이고, 해변가에 퍼지는 포말은 바다의 다른 모습일 뿐이다. 바다는 바다지만, 바다는 존재하지 않고, 자신이 스스로 바다라고 인지하지도 못한다. 그냥 우리가 바다라고 부를 뿐이다. 그냥 한 물건인 ‘물’이 모여 만들어진 것을 우리가 바다라고 부른다. 바람이 불면 파도가 거세지고, 잠잠해지면 바다의 윤슬이 조용히 모습을 드러낸다. 우리가 바다를 여러 이름으로 부른다. 파도, 윤슬, 심해, 포말, 바다, 해수, 등등. 이름은 상황에 따라 다르게 부르지만, 원래 모습인 ‘물’은 그냥 물일 뿐이다. 그리고 바다 자체는 자신이 바다라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 채 그냥 바람 부는 대로 또는 물길 따라 흘러갈 뿐이다.
그럼 ‘나’라는 존재는 무엇일까? 나의 이름은 이휘재다. 법명은 법천이고, 길명은 걷고다. 남편이고, 자식이고, 할아버지고, 친구고, 형이고, 동생이다. 나를 부르는 사람에 따라 나의 호칭은 달라진다. ‘호칭’과 ‘이름’이 만들어 준 틀이고 허상이다. 바다가 그냥 흐르는 물이듯, 나 역시 그냥 살아가는 ‘나’ 일뿐이다. 근데, 이 ‘나가 실제는 존재하지 않는다. 보고는 있지만, 단지 마음이 눈을 통해 대상을 볼 뿐, ’나‘라는 존재는 없다. 보고, 맡고, 감촉을 느끼고, 맛을 느끼고, 상상과 생각을 하지만, 그 주인 역시 없다. 감각기관과 대상과 의도가 있기에 그냥 보고 맡고 감촉을 느낄 뿐이다. ’나‘가 없는데 괴로움이 존재할 수 있을까? 몸이 아프면 고통을 느낄 뿐이다. 고통은 괴로움과 다르다. 고통은 육체적인 통증이고, 괴로움은 심리적인 어려움이다. 괴로움의 원인은 ’나‘로부터 시작된다. ’나‘가 있다고 생각하고, 그 ’나‘를 위해 한평생 바치고, ’나‘의 안락함을 위해 노력한다. 괴로움의 원인인 ’나‘를 위해 살아간다. 참 이상하다.
고통의 원인이 ‘나’라면 그 원인 자체를 없애면 된다. ‘나’라는 허상에서 벗어나면 된다. 무아를 체득하면 된다. 무아의 체득은 바다를 보고, 파도 소리를 듣고, 바다의 냄새를 맡고, 바닷바람을 느끼고, 바다 음식을 맛보면서 이루어질 수 있다. 매 순간 알아차리면 된다. 쉽지는 않겠지만, 보고, 듣고, 맡고, 느끼고, 먹는 것이 ‘나’가 아님을 깨어있는 마음으로 끊임없이 알아차리는 과정을 통해 비로소 무아를 체득할 수 있다. ‘나’가 없으니 저절로 ‘나의 고통’도 사라진다. 파도가 윤슬이 되고, 포말이 되고, 심해의 고요한 모습이 되듯 원래 모습은 없고 늘 변한다. 무상이다. 무상, 고, 무아의 체득이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방법이다. 이 세 가지를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렛고(let go)가 된다. 잡지 말고 흘려보내면 된다. 모든 것은 무상하니 무상함을 알면 저절로 흘려보내게 되고 잡으려 하지 않는다. 괴로움은 집착에서 발생하니 흘려보내면 괴로움은 사라진다. ‘무아’의 체득은 알아차림에서 시작되니, 1초 전의 또는 1초 후의 느낌, 감정, 생각에 머물지 말고 ‘지금-여기’에서 알아차리고 흘려보내면 된다. ‘지금-여기’는 늘 변하므로 실체가 없다.
바다를 보고, 바닷소리를 듣고, 바닷바람을 맞으며 우리는 걷는다. 바다가 바다가 아니듯, 우리는 우리가 아니다. 우리가 아니기에 우리라고 생각하고 있는 모든 것을 렛고 한다. 길을 걸으며 렛고(let go)를 연습한다. 그리고 삼법인에 대한 철저한 이해를 위해 걷고 또 걷는다. 길과 우리가 하나가 되는 범아일여(梵我一如)를 경험한다. 범일은 범아일여의 줄임말이다. 해파랑길을 함께 걸은 바다, 렛고, 걷고, 범일은 도반이자 스승이며 길벗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