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꺾이지 않는 마음

by 걷고

언젠가부터 유행처럼 번지는 말이 있다. 바로 ‘꺾이지 않는 마음’이다. 이 말은 2022년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이 쓰인 유행어로 평가되고 있다. ‘중요한 것은 꺾이지 않는 마음’은 리그 오브 레전드 2022년 월드컵 챔피언십에 참가한 프로게이머 김혁규 선수의 인터뷰를 담은 영상의 제목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비록 승부에서는 졌지만 잘 싸웠다는 표현은 어쩌면 ‘정신 승리’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정신 승리’라는 단어는 다소 부정적인 의미로 자신의 실패나 좌절을 합리화하는 단어로 사용되고 있다. 하지만 ‘꺾이지 않는 마음’은 상당히 솔직한 표현이다. 비록 승부에서는 졌거나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이루지 못하더라고 다시 도전하겠다는 의지를 품고 있다. 이는 자신의 상황을 인정하고 받아들인다는 의미지만, 동시에 그 상황에 꺾이지 않고 자신을 단련시키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말이다.

안나푸르나 트레킹을 하는 힘든 상황에서도 절대 포기하지 않고 목적지인 푼힐 전망대와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ABC)까지 자신의 발과 의지로 올랐던 사람들을 보며 이 말이 생각났다. 푼힐에 오르는 날은 전날 저녁부터 빗줄기가 거셌다. 바람도 제법 많이 불었다. 로지에서 아침 일찍 출발해서 푼힐 전망대에 올라 일출을 볼 계획이었다. 하지만, 날씨가 허락하지 않았다. 비바람이 거세어 출발 시간은 자꾸 늦춰졌고, 의견이 분분했다. 진행하자는 의견과 포기하자는 의견이 팽팽하게 맞섰다. 결국 각자 결정하기로 했다. 대부분 로지에서 쉬기로 결정했고, 다섯 명만 두 명의 가이드와 함께 출발했다. 빗줄기는 거세졌고 바람도 세게 불어 길을 방해했지만, 다섯 명의 용사는 거침없이 앞으로 나아갔다. 모든 것은 변한다. 날씨도 예외는 아니다. 결국 비는 잦아들었고, 바람도 숨 고르기를 하며 우리에게 운무라는 멋진 선물을 만들어주었다. 우리는 구름 위를 걸으며 구름이 만들어 낸 몽환적인 운무를 볼 수 있는 행운을 맞이했다.


오르는 길이 쉽지만은 않았다. 전날도 많이 걸어서 몸은 무겁고, 아침 일찍 걸으니 발걸음도 무겁다. 길벗 한 명은 구토 증세를 보이며 중간에 포기할까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지만, 구토를 여러 번 하며 몸을 푼힐에 맞추는 ‘꺾이지 않는 마음’을 보여주었다. 그녀의 그런 의지와 노력이 많은 감동을 주었다. 구토 후에는 몸이 한층 가볍다며 즐겁게 걷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포기하지 않는 한 원하는 모든 것은 이룰 수 있다는 가능성을 확인할 수 있었다. 푼힐 전망대에 올라 사진도 찍고 주변 경치를 살피는데 갑자기 바람이 거세지며 진눈깨비 같은 것이 내리기 시작한다. 서둘러 내려갈 준비를 하는 중간에도 사진 찍는 일은 포기할 수 없는 일이다. 걷는 일도, 사진 찍는 일도, 푼힐에 오르는 일도, 살아가는 일도, 포기하지 않는 한 원하는 대로 만들어 나갈 수 있다. 기우제가 성공하는 이유는 비가 내릴 때까지 기우제를 계속하기 때문이라는 말과 같다. 언젠가는 원하는 대로 이루어진다. 포기하지 않는다면, 또는 ‘꺾이지 않는 마음’만 갖고 있다면.

이번 트레킹은 비와 인연이 깊다. 총 6일 걷는 기간 동안 3일을 비와 함께 걸었다. 그리고 수도 셀 수 없이 많은 돌계단을 걸었다. 비와 돌계단, 이번 여정에서 각인된 안나푸르나의 모습이다. 물론 새벽 일출과 함께 드러난 gold trail, 즉 설산이 금산으로 변하는 환상적인 모습도 인상적이다. 하지만, 그것보다는 비와 돌계단이 오히려 내게는 더욱 강하게 인상에 남아있다. ABC 오르는 마지막 날에도 비는 여지없이 내렸다. 고산 지역에서 비를 맞고 걷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다. 추위와 싸워야 하며 젖은 옷과 등산화를 신고 걷는 일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럼에도 ‘꺾이지 않는 마음’을 지니고 일행 16명 모두 단 한 명도 중도에 포기하지 않고 ABC에 도착했다. 대단한 사람들이다.


MBC에서 점심 식사를 한 후 ABC에 오르기 시작했다. 부부 한 쌍이 힘들다며 MBC에 머물기를 원했다. 하지만 전제 진행을 총괄하는 대장의 설득으로 마침내 용기를 내어 오르기 시작했다. 70대 부부로서는 힘든 길이었지만, 마침내 ABC에 자신의 의지와 발로 오를 수 있었다. 그분들의 강한 의지에 경의를 표한다. 길벗 한 명은 정상인보다 심폐기능이 약한 사람이다. 그래서 평상시에도 오르막길을 오르는 데 많이 힘들어한다. 이번 ABC는 그녀에게는 큰 도전이었을 것이다. 뒤에서 그녀를 지켜보며 걸었다. 두세 걸음 걸은 후 잠시 숨을 고르기 위해 숨 쉬는 모습을 뒤에서 바라보며 놀랐다. 그녀의 거친 숨이 느껴졌다. 우비를 입은 모습 위로 거친 숨의 움직임을 볼 수 있었다. 마치 한 마리의 아주 작은 새가 살기 위해 희미하지만 숨을 거칠게 몰아쉬는 느낌이다. 차마 빨리 걷자는 말을 할 수 없었다. 서너 걸음 뒤에서 가만히 지켜보며 그녀의 용기에 찬사를, 노력에 응원을, ‘포기하지 않는 마음’에 감동하며 걸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녀는 ABC에 자신의 의지와 발, 미세하지만 거친 호흡으로 오를 수 있었다.


ABC 트레킹을 하며 단순히 설산만 본 것은 아니다. 산이 폭포가 되는 모습도 보았다. 징검다리가 물길로 변하는 것도 보았다. 맑은 하늘이 갑자기 구름으로 덮이는 것도 보았다. 그리고 그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포터, 가이드의 모습도 보았다. 외지인인 우리와 같은 트레커들을 보았다. 단순히 사람을 본 것만이 아니었다. 그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았다. 그 모습이 때로는 거칠고 힘들게 보여도, 그 안에 아름다운 심성이 살아있는 모습을 보았다. 힘든 몸과 마음을 다스리며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꺾이지 않는 마음’도 보았다. 늘 가까이에서 보아온 사람들의 의외의 모습도 보았다. 우리는 길을 걸으며 길만 체험하는 것이 아니고. 길을 걷기 위해 자신과 싸우는 모습도 체험했고, 다른 사람의 고통과 노력을 보며 자신을 다독이기도 했다. 그리고 마침내 ‘꺾이지 않는 마음’의 소중함을 몸으로, 눈으로 직접 체험하고 볼 수 있었다. 이 경험은 앞으로 살아가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세상사 못할 일도 없다. 다만 포기하지만 않는다면, 또한 어떤 모습으로 어떤 가치를 우선시하며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한 생각을 할 수 있는 기회도 만들 수 있었다. 같은 경험을 하며 각자 다른 체험을 한다. 같은 세상을 보며 다른 시각으로 살아간다. 그런 다양성이 아름답다. 게다가 ‘꺾이지 않는 마음’까지 있다면 세상 살아갈만하지 않을까? 몸으로 직접 가르침을 펼쳐 보여준 길벗에게 존경하는 마음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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