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가 차려 준 아침 식사를 먹고 준비해 준 간식거리를 들고 어둠이 채 가시기 전에 집을 나섰습니다. 눈이 조금씩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무슨 대단한 일을 하는 것도 아니고 단순한 걷기를 하러 가는데 이렇게 아침 일찍부터 서두르나 싶기도 하면서도, 길에 대한 설렘이 좋은 명분을 만들어 줍니다. 그 전날 상담사 모임에서 두 분이 제 책을 읽고 산티아고의 꿈을 꾸고 있고, 걷기에 동참하고 싶다는 반가운 말씀을 하셨습니다. 언젠가 같이 걸을 날이 올 것입니다.
원래는 1박 2일로 예정되어 있었지만, 기차 안에서 나들이님과 얘기를 하여 둘이 하루 더 연장하여 걷기로 하였습니다. 다행스럽게 우리 두 명 모두 요즘은 한가한 시간이라 안주인의 허락만 득하면 되는 상황입니다. 저는 전화로 보고를 하여 승인을 받아냈고, 나들이님은 선조치, 후보고라는 집안 특유의 전통과 시스템으로 확정을 지으셨습니다. 함께 걸었던 길동무들과 헤어지며 단 둘이 오붓하게 길을 걷는 것도 좋습니다. 굳이 많은 말이 필요 없고, 서로 무심한 듯 챙기기도 하고, 각자의 속도에 맞춰 길을 걷다가 쉬면서 차 한 잔, 간식을 나눠 먹으며 이런저런 얘기를 하기도 합니다. 즐거운 대화도 좋고 침묵 속 걷기를 존중해 주는 배려도 아름답습니다.
도니님은 미국에 사진을 공부하러 갈 계획을 구상 중에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 얘기를 들었을 때 저는 너무 기뻤습니다. 퇴직 후 제2의 삶을 준비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니기에, 그런 용기와 결정이 너무나 반가웠습니다. 떠나건 아니건 그것은 중요한 것이 아닌 거 같습니다. 길을 찾았다는 것 자체가 중요한 거 같습니다. 뒤풀이 자리에서 제가 구상하고 있는 인생이모작 학교에 대한 얘기를 나눌 수 있었습니다. 걷기, 명상, 상담을 접목한 프로그램인데, 어떤 방식으로 구성하는 것이 좋은가 늘 고민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번 여정에서 제 꿈을 말씀 드렸고, 길동무들께서 좋은 의견을 주셔서 조금 더 구체화 된 계획을 구상할 수 있었습니다. 제 생각에 제2의 삶을 준비하는데 많은 시간과 노력, 경제적 투자를 해야 하고, 그 준비를 하는 과정에서 자기를 내려놓은 연습을 하게 됩니다. 자신이 오랫동안 생활해왔던 과거의 경험, 능력, 학력, 인맥, 경력 등을 모두 내려놓고 직접 모든 것을 홀로 준비해야 하는 과정을 통해 자신을 내려놓게 됩니다. 그런 과정이 중요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제가 구상하고 있는 프로그램 역시 직접 스스로 몸으로 체험하고, 지금의 자신으로부터 벗어나는 탈피의 과정 위주로 준비가 되어있고, 그런 과정을 통해서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찾아 인생이모작을 준비하는 내용으로 구성하고 있습니다. 조금씩 구체화 되어가고 있습니다. 사업 계획을 짜듯이 일을 준비하지 않고, 생각이 나는 대로 조금씩 정리해 가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길이 열릴 것입니다. 또한 이 프로그램에 참석을 하신 분들의 힘든 과정을 겪어낸 내용을 책으로 출간하여, 다른 퇴직자 분들을 위한 지침서가 될 구상도 하고 있습니다.
울산의 공업단지 길 외에는 너무나 멋진 길이었습니다. 해안가를 따라 도는 길을 걸으며 바다 내음도 맡고, 시골 마을의 그림 벽화를 보는 재미도 좋았고, 깨끗한 바다 물을 볼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해파랑길을 걷고 있는 분과 차 한 잔 나누며 정보를 교환하고, 걷기에 대한 팁도 주고받으며 서로 안전한 걷기를 위한 기도를 해주기도 합니다.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생면부지의 사람을 만나 마치 오랜 친구처럼 스스럼없이 다가가고 얘기하고 나눌 수 있으니까요.
십리에 걸쳐 펼쳐진 태화강변의 대숲 밭은 조용히 걷기에 아주 좋은 곳이었습니다. 언젠가 TV 광고에서 보았던 ‘잠시 휴대전화의 전원을 꺼 놓으셔도 됩니다.’라는 장면이 떠오르는 곳입니다. 울산은 현대왕국이었습니다. 수출을 위해 끝없이 넓은 광장에 대기 중인 자동차, 버스 안내판이나 정류장 이름이 현대000 로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도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울산대교에서 바라 본 울산의 모습은 울산 공단에 근무하는 모든 분들에게 긍지를 심어주기에 충분하였습니다. 바닷가에 끝없이 펼쳐진 공단의 활기찬 모습은 말 그대로 장관이었습니다. 최근에 자동차 산업이 2년째 마이너스 성장을 하고 있다고 하니 안타깝습니다. 다행스럽게도 현대자동차는 임단협이 타결되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현대 중공업은 금년도 수주 목표액이 작년보다 76% 높은 132억 달러라고 하니 좋은 소식입니다. 주변에 현대중공업의 임단협 타결을 촉구하는 현수막이 여기저기 많이 걸려있습니다. 현대계열사의 명운이 울산 시민의 명운과 함께 한다는 뜻으로 느껴졌습니다.
대왕암과 슬도를 걸으며 해녀들의 물질을 보았습니다. 물 밖에서 보아도 차가움이 느껴지는 바다에 몸을 던지는 해녀의 모습을 보니 제 마음이 다 시렸습니다. 그분들은 생존을 위해 일을 하시고 있고, 우리와 관광객들은 놀러 와서 그런 광경을 쳐다보고 사진을 찍고 있었습니다. 순간 많이 죄송했습니다. 하지만, 어찌 보면 우리를 포함한 관광객들 모두 각자의 일터에서는 누구 못지않게 열심히 살아오셨다는 생각이 들면서 미안한 마음을 조금 내려놓을 수 있었습니다. 대왕암 아래 해변가에 바로 바다에서 건져온 해산물을 파는 곳이 있었습니다. 그런 곳은 그냥 지나치면 결례가 될 수 있을 것 같아, 멍게, 해삼, 고동과 함께 소주 한잔 마시고 왔습니다. 돌멍게 먹은 후 그 껍질에 소주를 따라 마시는 운치는 참으로 특별한 것이었습니다.
3일차 아침에는 5시에 기상하여 식사를 한 후에 일찍 길을 나섰습니다. 해수관음상과 망월대에서 일출을 볼 수 있었습니다.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해수관음상, 좀 더 높은 곳에 위치한 망월대를 보면서 마냥 기쁘지만은 않았습니다. 그곳에서 많은 사람들이 바다를 바라보고 기도를 했던 이유는 아마 가족들의 무사귀환이었을 것입니다. 그곳에서 저는 편안하게 일출을 보고 있었습니다. 해수관음상 앞에서 잠시나마 그 분들의 혼령을 위해 기도를 드릴 수 있었습니다. 주상절리라는 곳도 들렸습니다. 그냥 모르고 지나쳐버리면 갯바위에 불과할 수 있는 곳입니다. 화산으로 인해 생긴 단면의 모양이 육각형, 오각형 등 다각형으로 이루어진 바위를 말하는 곳이라 합니다.
나들이님은 뒤에서 사진을 찍고 오느라 저와 거리가 멀어집니다. 산길을 걸을 때에도 해안가를 걸을 때에도. 하지만 전혀 불편하지 않습니다. 각자 하고 싶은 일을 하고, 각자의 방식으로 걸으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따로 또 같이’ 걷고 있습니다. 홀로 침묵 속에 걷고 있는데 가슴 속 통증이 올라옵니다. 예전에는 이 증세는 스트레스 받고 있다는 경고용 느낌이었는데, 요즘은 묻혀있던 통증이 밖으로 배출되는 느낌이 듭니다. 가끔 명상을 할 때에도 통증이 올라오기도 합니다. 반가운 통증입니다. 아직도 가슴 속에는 돌덩이가 부서진 자갈들과 가시들이 남아 있기에, 이들을 빼내는 데는 통증이 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 통증은 반가운 통증입니다.
상경 기차를 타고 오는데 무료해서 ‘송담스님’ 법문을 들었습니다. ‘만법이 스승’ 이고 ‘힘 빼고 내려놓는 것이 득력’이라는 말씀이 와 닿습니다. 이번 여행에서 만난 모든 분들, 자연, 느낌과 생각들이 결국은 자신을 내려놓는 연습을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길에서 만난 삼라만상에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