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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남파랑길

온전한 한 걸음

by 걷고

여유롭게 걸었다. 욕심 내지 않고 걷는 거리를 조금 줄여서 걸으니 편안하다. 함께 걸은 길벗 모두 편안하고 여유롭게 걸었다고 한다. 그간 걸으며 카페에 많이 가야 한번 정도였는데, 이번에는 세 번 들렸다. 그것도 그 지역에서 핫한 카페다. 커피를 마시며 우리는 서로 얼굴을 보며 웃는다. 지금 우리가 걸으러 왔는지, 아니면 카페 투어를 왔는지 약간 혼란스럽지만 즐거운 표정을 지으며 웃는다. 예상 시간보다 버스 터미널에 일찍 도착해서 버스표 시간을 앞당겨 출발했다. 서울에 도착해서도 여유롭게 저녁 식사까지 한 후에 헤어졌다. 걸을 만큼 걸었는데, 힘들게 걸었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는다. 욕심을 조금 내려놓으니 너나 나나 모두 편하다. 그 욕심이 늘 문제다. 잘 알면서도 또다시 욕심의 늪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하다가 이번 경험을 통해 다시 한번 욕심을 내려놓는 것이 얼마나 편안하고 모두에게 즐거움을 선사하는지 알게 되었다. 마음이 여유로우면 세상사 보는 시각도 여유롭고 자유롭다.


지나온 걸음은 무섭고, 앞으로 나아갈 걸음은 두렵다. 지나온 걸음이 무서운 이유는 그 걸음에 따른 책임 때문이다. 그 발자국은 겉으로 보기에 사라진 것 같지만, 하늘이 알고 땅이 안다. 다만 겉으로 드러나지 않을 뿐이다. 우리는 이것을 업이라 부르고, 그에 따른 결과를 업보라고 한다. 업은 업보를 받기 전까지 절대로 사라지지 않는다. 그래서 지난 걸음은 늘 무섭다. 언제 어디에서 그 걸음에 대한 책임 추궁을 당하게 될지 또는 어떤 결과가 나타날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지나온 걸음을 지울 수도 없다. 과거를 변하게 만들 수 있는 능력을 우리는 갖고 있지 않다. 하지만 지나온 걸음을 지우려거나 감추려고 하는 노력대신 지금 걷는 걸음에 온전히 집중한다면 과거를 변화시킬 수는 없지만,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미래를 만들어 나갈 수 있다. 과거의 발걸음과 같은 걸음을 한다면 과거와 같은 사람이 되고, 같은 결과를 맞이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과거와 이별하고, 과거와 다른 발걸음을 하고, 업보를 달게 받는다면, 다시는 그 업의 굴레 속으로 들어가지 않는 삶을 살 수 있다. 과거의 늪에 빠져 과거와 같은 언행을 하며 살아갈 것인가?아니면, 과거와 다른 삶을 살 것인가? 지금 내딛는 한 걸음에 달려있다. 그 한 걸음만이 실상이고, 진실이고, 살아있는 것이고, 현재의 삶이고, 모든 것이다.


앞으로 나아갈 걸음이 두려운 이유는 앞에 무엇이 펼쳐질지 모르기 때문이다. 우리는 단 1초 후의 일조차 예측할 수가 없다. 매우 과학적인 방식으로 예측을 한다고 해도 한두 번 정도는 운 좋게 맞힐 수 있겠지만, 대부분 그 예측 자체가 무의미하게 끝나는 경우가 많다. 한 걸음 앞으로 내딛기 위해 두려움에 직면하는 용기와 마음가짐이 필요하다. 그 두려움이 나를 휘어잡더라도, 그 두려움에 굴복하지 말고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한 걸음만큼 앞으로 나아가면, 그 걸음만큼 자신의 한계에서 벗어날 수 있다. 두 걸음 앞을 걱정할 필요조차 없다. 단지 한 걸음 앞으로 내딛기만 하면 된다. 이 한 걸음이 나의 미래가 된다. 그리고 언젠가 지금 내딛는 한 걸음이 나의 과거가 되어 나를 구속할지 아니면 자유롭게 할지 결정한다.


결국 한 걸음이다. 온전히 집중해서 걷는 한 걸음이 나의 인생이 된다. 1초가 영원이 되듯, 한 걸음이 나의 과거, 현재, 미래가 되고, 전생, 현생, 내생이 된다. 한 호흡에 삶과 죽음이 있듯이, 한 걸음에 삶과 죽음이 있다. 그러므로 한 걸음에 모든 것을 쏟아부어야 한다. 그래야만 그 걸음이 나를 나답게 만들고, 나를 찾게 만들고, 나와 우주가 하나라는 중요한 진리를 체득할 수 있게 만들어 준다. 여유롭게 걸으며 든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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