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모님께서 어느 날은 조금 활력이 있고, 어느 날은 매우 지쳐 보이신다. 매일매일 건강 상태가 변한다. 요즘 며칠간 음식을 소화하지 못하고 토하기도 하셨다. 속이 아파 음식을 못 드셔서 병원에 찾아가 약을 처방받았다. 기존에 드시는 약에 새로운 약이 더해지니 약만 가득하다. 그 약을 어떻게 다 소화시킬 수 있을지, 약이 오히려 몸을 망치는 것은 아닌지 걱정된다. 어제는 힘이 없으시다고 해서 영양제 주사를 맞고 오셨다. 오늘 아침은 조금 나아지신 모습이다.
어제 어머니 손등을 자세히 보았다. 피부가 늘어져 쭈글쭈글하다. 얼굴에도 주름이 가득하고 머리에는 듬성듬성 머리카락만 간신히 붙어있다. 고관절 수술과 원래 좋지 않았던 무릎이 말썽을 부리며 회복을 더디게 한다. 당신 스스로 몸을 거동하는 것이 불편하니 당신도 힘들고 우리도 힘들다. 몸을 스스로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은 축복이라는 사실을 어머님을 통해서 다시 한번 확인한다. 어머님도 젊으신 시절이 있었다. 그때의 모습은 지금과는 달랐다. 어미님의 모습을 보며 나의 모습을 살펴본다. 나의 모습도 과거와 다르다. 많이 늙었고 노쇠했다. 이마에 주름살도 늘었고, 얼굴에 검버섯도 펴있고, 손에 주름살도 많다.
불교에서는 공부를 할 때 안으로 하고, 밖으로 해야 한다고 한다. 안으로 하는 것은 자기 스스로 자신을 돌아보고, 밖으로 공부한다는 것은 다른 사람을 통해 공부하고 깨달으라는 뜻이다. 나와 남의 모습이 겉모습만 다를 뿐 실상은 똑같다. 태어나고 자라고 늙어서 죽어간다. 생주이멸이다. 변화의 진실을 받아들일 때 우리는 현명한 삶을 살아갈 수 있다. 태어나고 자라고 늙고 죽어간다는 것은 변화이고 무상이다. 그리고 변하는 것은 실상이 아닌 허상이다. 즉 무아다. 무상과 무아, 이 두 가지가 우리를 지혜롭게 살게 만들어 준다. 이 두 가지를 제대로 깨닫기 위해 삶의 희로애락을 누리며 살아가는 것은 아닐까? 존재의 실상인 무상과 무아를 망각할 때 이기적이고 전체와 분리된 편협한 존재가 된다. 투쟁과 불화는 여기서 발생한다. 존재의 실상인 무상과 무아를 받아들일 때 비로소 모든 고통은 저절로 멈춘다.
장모님의 모습을 보며 나의 가까운 미래 모습을 본다. 장모님의 질병을 보며 내게 찾아올 질병을 본다. 안팎으로 공부하는 좋은 기회다. 장모님의 고통이 바로 아내와 나의 고통으로 연결되고, 가족 모두와 주변 사람들에게 연결된다. 장모님의 웃음이 아내와 나, 가족과 주변 사람들은 웃게 만든다. 이 간단한 사실 하나만 보아도 우리는 서로 연결된 존재임을 알 수 있다. 살아가면서 우리는 가끔 이 상호연결성을 잊고 살아간다. 무상과 무아라는 자연의 섭리를 미리 깨달으면 깨달을수록 편안하게 살아갈 수 있다. 우리가 종교를 찾고, 마음공부를 하고, 열심히 사회생활하고, 서로 어울려 사는 이유는 겉으로는 복잡해 보여도 실은 단 한 가지다. 바로 편안한 삶을 위해서다. 그 편안함은 상호연결성을 이해하는 연기에 대한 통찰과, 무상과 무아라는 자연의 법칙을 이해할 때 저절로 이루어진다. 그 방법으로 자신과 다른 사람의 모습을 관찰하며 안팎으로 공부해 나가면 된다. 밖으로 공부하는 것은 남과 비교하기 위한 방편이 아니다. 밖을 통해 자신의 내부를 들여다보는 방편이다.
“과거와 현재, 미래의 거칠고 미세한 모든 신체적 경험과 느낌, 지각과 생각, 의식에 대해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다. 이것은 내가 아니다,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지혜로써 분명하게 보아야 한다.” (마음이 아플 땐 불교심리학, 책 콘필드 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