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와 그림자
일시: 2020년 1월 21일 (봉산 둘레길 7km)
2020년 1월 22일 (불광천 – 월드컵공원 – 한강변 – 집 10km)
2020년 1월 23일 (홍대 토즈점 – 집 6km)
2020년 1월 26일 (집 – 매봉산 – 노을공원 – 난지 한강공원
– 집 16km)
거리: 39km
누적거리: 311km
기록 시작일: 2019년 11월 20일
차 안에서 아내와 큰소리로 싸운 것은 일반적으로 명절에 발생하는 명절증후군 탓이 아닌 사소한 일에서 시작되었다. 내일 하루 더 쉬는 날이니 사촌 처남 부부와 함께 브런치 하자고 얘기를 했는데, 아내는 명절 반찬이 많이 있으니 집에서 식사를 하자는 것이었다. 이번 일 외에도 아내가 나의 의견에 따라주거나 지지해 준 적이 별로 없었다는 생각을 하며 지난 일들을 떠올리며 화를 냈고, 아내는 그런 기억이 나지 않고 나의 말하는 태도나 표현이 너무 심하다고 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오랜만에 서로 시원하게 소리 지르며 싸웠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걷기 복장으로 바꿔 입은 후 바로 집을 나가 걷기 시작했다. 원래 걷기 모임에 나가서 걸을 계획이었는데, 언짢은 기분으로 사람들을 만나기 불편하여 홀로 걷기로 결정을 한 것이다. 걸으며 차 안에서 있었던 일을 되돌아보았다. 왜 그렇게 화가 났을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도중에 처갓집에서 있었던 불편한 상황들이 함께 떠올랐다.
절을 올리려 하는데 장모님께서 우리 부부끼리 서로 존중하는 의미로 먼저 맞절을 하라고 하셔서 순간 당황스러웠다. 손아래 처남 부부, 조카와 조카며느리, 딸과 사위, 손녀가 있는 앞이라 거절하기도 민망하여 마지못해 어색하게 부부끼리 큰절을 하였다. 환갑이 넘은 사위에게 이런 불편한 요구를 하시는 장모님이 불편했다.
캐나다에 살고 있는 큰처남이 보내온 연어로 장모님께서 연어 회덮밥으로 점심을 준비해 주셨는데, 본가에서 차례를 지낸 후 음복까지 잔뜩 한 상태여서 점심을 건너뛰었다. 저녁 식사 때 장모님께서 아무 말씀도 없이 연어 비빔밥을 직접 비비신 후 내 앞에 슬쩍 밀어 놓으셨다. 국에 밥을 말아 속이 편하게 먹고 싶었는데, 내 의사와는 전혀 상관없는 연어 비빔밥을 먹게 되는 상황이 불편했다.
마음이 불편했던 세 가지 상황을 곱씹으며 걸었다. 처음에는 화가 많이 난 상태에서 과거의 불편했던 별의별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며 떠올랐다. 그 이후에 화가 난 이유를 조용히 생각해 보았다. 내 의사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내 생각과 상관없는 일을 해야만 한다는 상황에 화가 났다. 상대에 대한 배려 없이 자신의 판단과 기준으로 평가하고 결정하는 그 방법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불편했다. 조금 더 밑 감정을 들여다보았다. 그 이면에는 내가 원하는 대로 할 수 없고, 원하는 대로 되지 않아 심기가 불편하다는 못된 이기심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길을 걸으니 마음이 조금씩 가라앉고 불편한 마음도 진정이 되면서 상황을 다른 시각에서 보기 시작했다.
주부의 입장에서 여러 가지 명절 반찬을 냉장고에 보관하는 것이 신경 쓰여 집에서 먹자고 한 것이 그렇게 잘못한 것인가? 또한 식사하자는 것을 거절한 것도 아니고 집에서 편하게 식사를 하자는 것이 그렇게 잘못된 일인가? 주부로서 한 푼이라도 아끼려는 마음에 집에서 식사를 하자고 한 것인데, 그것이 그렇게 비난받을 일인가? 어떤 이유와 명분을 떠올려도 화를 낸 것은 전적으로 나의 잘못이다. 오히려 집에서 편하게 식사를 하자는, 아내는 음식 준비하느라 불편할 수 있는데, 아내에게 감사하다고 절을 해야 마땅한 일이다. 미안하고 창피스럽고 민망하다.
장모님께서 우리 부부에게 맞절을 하라고 말씀하신 이유는 아마 그 모습을 눈에 담고 싶으셔서 그러셨을 것이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점점 노쇠해가시고 우리들과 추억을 쌓아가실 기간이 그다지 많지 않다고 생각을 하셔서 가능하면 좋은 추억을 가슴에 간직하고 싶어서 그런 말씀을 하셨을 것이다. 이런 생각이 들자 너무 죄송하다는 생각이 들면서 그나마 말씀대로 맞절한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큰처남이 캐나다로 20여 년 전에 이민을 떠났지만, 명절이나 장모님 생신에는 선물을 보내오고 안부 전화를 한다. 장모님은 당신의 장남이 보내온 연어를 우리 모두에게 맛있게 대접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 아들이 그립고, 아들이 보내온 음식을 서로 나눠 먹으며, 이국 땅에 살고 있는 그 아들을 포함하여 형제들끼리 우애 좋게 잘 지내라는 의미가 담긴 비빔밥이었을 것이다. 좀 더 맛있게 많이 먹지 못한 것이 너무나 송구스럽다. 직접 말씀으로 표현하지 못하신 행간을 읽을 수 있는 나이가 되었음에도 자신의 틀을 벗어나지 못한 이기심으로 인해 장님과 귀머거리가 되었던 것이다.
걷는 중간에 아내가 전화를 했다. 동네 분과 차 한잔 마시러 나가려는데 점심 식사 준비 때문에 망설이고 있다고 하여, 식탁에 차려 놓고 편하게 다녀오라고 쿨하게 얘기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남편의 점심을 챙기려는 아내의 목소리를 들으니 더욱 미안하고 창피스러웠다. 집에 들어갈 때 아내 얼굴 보기가 조금 민망한 상황이었는데, 외출을 한다는 소식이 오히려 반가웠다.
집에 거의 도착할 즈음 ‘나의 생각’이 과연 ‘나’일까?라는 의문이 들었다. 그 생각이 확장되기 시작했다. ‘나의 모습’이 ‘나’일까? ‘나의 태도’가 ‘나’일까? ‘나의 지위’가 ‘나’일까? ‘나’의 일부분은 되겠지만 ‘나’는 아니다. 그렇다고 나의 모습, 생각, 말, 태도, 지위 등이 ‘나’가 아닌 것은 아니다. 그 모든 것들이 ‘나’ 이면서 동시에 ‘나 아닌’ 것이다. 오늘 한 가지 확실하게 배운 점은 ‘나의 생각’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하여 ‘나 자신’이 거부되었거나 무시당했다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단지 생각이 다르고 다른 관점도 항상 존재한다는 것이다. 또한 동시에 편협한 관점 확장의 가능성을 열어 줄 기회라는 것이다.
우리는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거나 ‘감정’이 존중받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면 ‘자신’이 무시당하고 자기 존재감이 박탈되었다는 생각으로 인해 분노를 느끼기도 한다. 생각은 생각일 뿐이고, 의견은 의견일 뿐이다. 자신의 감정과 생각이 자신이라고 동일시하려는 경향으로 인해 이런 일이 발생한다. 생각과 감정은 삶 속에 흘러가는 상황 중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마치 바람의 흐름과 강도에 따라 순간적으로 나타났다 사라지는 드넓은 바다의 파도나 물거품에 불과한 것이다. 이런 생각과 감정은 매 순간 변하므로 불변하는 존재 자체가 있는 것이 아니고 지나가는 상태나 상황으로만 존재할 뿐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들, 감정, 생각, 느낌, 감각 등, 을 자신과 동일시하고 강화하여 점점 더 자신의 성을 높고 두껍게 쌓아가고 있다. 그 성은 성주나 주민이 없는 환영에 불과한 성일뿐이다.
‘꽃은 꽃이 아닌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라는 글귀를 본 적이 있다. 오늘 상황을 통해 ‘나는 나 자신이 아닌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라는 명백한 진리를 경험할 수 있었다. 바로 무아(無我)의 실체를 본 것이다. 만법의 실상(實相)은 존재하지 않고, 다만 모든 존재는 실상(實相)이라고 생각하는 식(識)으로만 존재하는 것이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이다. 모든 세계는 오직 주관적이 세계만 존재하고, 하나의 세계에 사람 수(數) 만큼 많은 세계가 존재하는 것이다.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알거나 본 것 자체가 체득한 것과는 큰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일상생활 속에서 꾸준히 마음공부해 나가는 훈습을 통해 알고 본 것을 체화(體化) 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공원 길을 걷는데 나무와 그림자가 눈에 들어와 사진에 담았다. 그림자는 나무로 인해 나타난다. 나무가 없으면 그림자는 존재할 수 없다. ‘나’라는 상(相)이 있으니 고통(苦)이라는 ‘그림자’가 나타난다. ‘나’가 없어지면 그림자인 ‘고통’도 따라서 없어진다. 존재의 실상인 제법무아(諸法無我)를 볼 수 있다면, 제행무상(諸行無常)의 세계가 그대로 드러나며, 무상을 깨닫게 되면 일체개고(一切皆苦)가 사라지며 열반적정(涅槃寂靜)의 세계가 저절로 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