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고의 걷기 일기 0033]

by 걷고

일시: 2020년 3월 11일 (마포역 – 한강변 – 월드컵공원 - 마포구청역)

거리: 8km

누적거리: 521km

기록 시작일: 2019년 11월 20일


요즘 코로나로 인해 사회적으로나 가정적으로 면책을 부여받은 느낌이 들어 오히려 한가롭게 쉬고 있습니다. 약 2주 전부터 상담센터도 휴관을 하여 홀로 쉬는 시간이 더 많아졌습니다. 그런데 관성에 의해 매일 뭔가를 해야만 한다는 강박관념이 있어서 독서, 글쓰기, 명상, 전공 서적 공부, 걷기 등을 마치 과제처럼 하고 있는 저를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은 굳이 그럴 필요가 없는데도 말입니다. 습관의 무서움입니다. 하고 있는 일을 좀 더 단순화하고 싶었습니다. 걷기는 일상생활이 되었고, 명상은 매일 아침에 꾸준히 해오고 있습니다. 독서나 글쓰기도 딱히 할 일도 없으니 가볍고 편안한 마음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굳이 제외시킬 것은 전공서적 공부밖에 없습니다. 그 하나라도 덜어내니 마음이 한결 편안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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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분에 손녀와 함께 지내는 시간이 많아졌습니다. 손녀는 누군가의 팔을 만져야만 잠에 듭니다. 요즘은 제 팔이 손녀의 애착 인형이 된 느낌입니다. 기저귀도 갈아주고, 식사도 떠 먹여 주고, 같이 놀아주기도 합니다. 평상시에는 아이가 울거나 떨어지지 않으려 하면 조금 짜증이 나기도 했습니다. 제가 할 일을 하지 못하는 것에서 오는 불편함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요즘에는 시간이 많아 급한 일도 없고, 딱히 할 일도 없으니 손녀와 편안하게 잘 놀고 있습니다. 손녀가 제 팔을 사포질 하듯이 위아래로 만지며 잠에 들 때 저는 손녀와 제 팔의 접촉되는 촉감에 집중합니다. 오롯이 그 느낌만 존재합니다. 시간, 공간, 손녀와 저라는 모든 것들이 사라지고 오로지 제 팔과 손녀의 손이 닿는 촉각만 존재합니다. 그러다가 같이 잠에 빠지기도 합니다.


3월 초부터 손녀는 사위 회사에서 운영하는 어린이 집에 입학하기로 되어있었는데, 코로나로 인해 계속 연기되고 있습니다. 덕분에 저는 손녀와 함께 하는 시간이 많아졌습니다. 손녀의 어눌한 말투를 알아차리는 재미도 있고, 날마다 조금씩 변화하고 성장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도 큰 행복입니다. 아내와 딸과 같이 손녀를 돌보며 함께 웃고 떠들며 가족의 고마움을 느끼기도 합니다. 하지만 사위가 혼자 자기 집에서 지내는 모습을 생각하면 미안함, 안쓰러움, 안타까운 마음이 떠오르기도 합니다. 젊은 부부가 주말 부부로 살아가는 모습이 보기에 너무 안쓰럽습니다. 빨리 코로나가 물러나서 사회와 모든 사람들이 자기 자리를 되찾기를 바랍니다. 우리 사위와 딸, 손녀도 빨리 한 집에 머물며 자신들의 아름다운 가정을 꾸려나가길 바랍니다.


다행스럽게도 제 생활에는 별 어려움이 없습니다. 상담 센터에 나가지 못하고, 강의나 집단상담 프로그램이 연기된 것 외에는 큰 차이가 없습니다. 하지만 주변을 살펴보면 힘든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10년 이상 자주 이용했던 식당을 며칠 전에 방문했는데, 매월 천만 원의 적자를 보고 있다고 합니다. 지금까지 한 번도 힘들다는 얘기를 하지 않는 사장님이 이번에는 먼저 괴롭다는 얘기를 하시는 것을 보니 어지간히 힘드신 모양입니다. 어제는 걷기를 마치고 뒤풀이를 하기 위해 한 식당을 찾았는데, 창업 3개월 만에 7명의 손님이 오신 적이 처음이라고 하며 허탈한 웃음을 지으셨습니다. 이런 분들을 마주하니 ‘편안한 휴식‘이 ‘미안한 휴식’으로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걷기 동호회 회원분들 중에도 코로나의 확산으로 당분간 나오지 못할 수도 있다고 하는 분들이 늘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요식업을 하시거나 자영업을 하시는 분들, 그리고 중소기업에 종사하시는 분들이 힘들어하시는 모습에 비하면 걷기 위해 모인 사람들은 그나마 마음이 편하신 분들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럼에도 모임 자체에 나오기조차 꺼려하고 있습니다. 모일 때에도 모두 마스크를 쓰고 나오고, 걸을 때에도 마스크를 쓰고 걷고, 헤어질 때도 마스크를 쓰고 작별 인사를 합니다. 전염병이 만든 풍경입니다.


며칠 전 신문에 실린 최재천 교수의 칼럼 ‘바이러스와 마스크’를 우연히 읽게 되었습니다. 전염병이 주는 공포로부터 조금이나마 벗어나길 바라는 마음에 그 내용 중 일부를 인용합니다. 각자 신중하게 대처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자신과 타인을 위해 조심하고 에티켓을 지키는 것도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각자의 일상을 유지하는 것도 중요할 것 같습니다.


“바이러스 때문이라면 내가 아니라 남을 위해 마스크를 쓴다는 인식이 필요하다. 코로나 19 바이러스는 공기로는 전파되지 않는다. 그래서 날숨이 닿지 않거나 침이 튀지 않을 간격만 유지하면 대체로 안전하다. 바이러스가 아무리 작아도 중력을 거스를 순 없다. 서로 ‘사랑의 간격’만 유지하면 된다. …. 나는 밀폐된 좁은 공간에 들어갈 때나 남과 가까이 마주 보며 얘기할 때만 잠시 마스크를 착용하고, 끝나면 곧바로 벗어서 봉투에 잘 넣어둔다. 당연히 여러 차례 사용했다. 대신 손은 드라마에서 본 외과 의사처럼 철저히 자주 씻는다."


요즘 마스크 때문에 예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이상한 풍경이 펼쳐집니다. 약국마다 긴 줄을 서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이 기회를 이용하여 자신만의 이익을 챙기기도 합니다. 반면에 SNS를 통해 ‘저는 한 달간 마스크를 사지 않겠습니다.’라는 선한 캠페인을 벌이는 분들도 계십니다. 이런 성숙한 시민 정신이 있기에 우리는 잘 극복해 나갈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모든 것이 빠른 시기에 정상화되어 함께 ‘편안한 휴식’을 즐길 날이 오길 바랍니다.


오늘 수요 저녁 걷기를 진행하였습니다. 마포역에서 한강변을 지나 월드컵공원을 걷는 코스입니다. 코로나가 확산되는 시기에도 마스크를 쓴 13명은 활기차게 걸으며 자체 면역을 강화했습니다. 월드컵공원에서 바라본 하늘에는 크고 둥근달이 떠 있었습니다. 그 달을 보며 빠른 시일 내에 지금 모든 사람들이 걱정하고 불안해하는 코로나부터 벗어나길 기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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