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고의 걷기 일기 0058]

걷기 아까운 길

by 걷고

일시: 2020년 5월 7일 (일원역 – 대모산 – 구룡산 – 양재시민의 숲 10km)

누적거리: 899km

기록 시작일: 2019년 11월 20일


아침에 길을 나서는데 시내가 시끌벅적합니다. 도로 정비하는 분들의 손길과 소음이 만들어 낸 활력입니다. 차들도 많이 나와있습니다. 소음이 이렇게 반가웠던 적이 없었던 거 같습니다. 소음이 활기로 느껴지기도 처음입니다. 집 나서기 전 손녀의 울음소리를 들었습니다. 그 소리 조차 반갑고 고마웠습니다. 어린아이의 웃음은 생명입니다. 점점 어린아이들의 모습과 울음소리를 듣기가 어려워졌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의 울음소리, 웃음소리를 들으면 더욱 행복해집니다.


길을 홀로 걷는다고 하니 아내는 심심하지 않냐고 물어봅니다. 천만의 말씀입니다. 저는 홀로 걷는 것이 훨씬 즐겁고 편합니다. 음악도 듣고, 자연의 소리도 듣고, 스틱이 땅과 부딪치는 소리가 정겹게 들립니다. 길의 모습을 사진에 담으려고 온 길을 되돌아 가기도 합니다. 괜한 폼을 잡는 것입니다. 사진을 제대로 찍을 줄도 모르면서 자기도취에 빠져 사진의 각도를 이리저리 잡아 보기도 합니다. 걷다가 피곤하면 쉬기도 하지만, 별로 그런 편은 아닙니다. 음식이나 물 먹을 때 외에는 쉬거나 앉지도 않고 그냥 걷는 편입니다. 다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은 하산 후 시원한 맥주 한잔 같이 할 길동무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도 괜찮습니다. 지금 일기를 쓰며 시원한 캔 맥주 한잔을 혼자 여유롭게 마시며 글을 쓰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재미도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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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을 나설 때부터 마음이 설렙니다. 산길에 들어서면 숨을 쉴 수 있게 되고 기분이 절로 좋아집니다. 음악 소리에 맞춰 발걸음이 가볍게 장단을 맞추기도 합니다. 때로는 스틱 소리를 들으며 소리 명상을 하기도 합니다. 때로는 길에 취해서 길을 쳐다보거나 사진을 찍기도 합니다. 걸으면 온 세상이 제 세상이 된 듯 마냥 행복합니다. 오늘 걸은 길은 산책하기에 아주 좋은 길입니다. 높낮이도 별로 없는 완만한 산길로 편안하게 걸을 수 있습니다. 초록색 나뭇잎들이 햇빛을 가려주고, 때로는 나무들이 열을 맞춰 열병식을 하며 저의 행군을 축하해 주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 길은 조금 천천히 걷고 싶었습니다. 마치 맛있는 과자를 조금씩 먹듯, 이 길을 아껴서 걷게 됩니다. 이런 길을 급하게 걷는 것은 길에 대한 예의가 아닙니다. 걷는 속도도 속도지만, 걷는 마음에 여유가 넘쳐납니다. 예전에는 빨리 마치고 돌아갈 생각이 많았다면, 요즘은 마냥 걷고 싶고 여유롭게 천천히 길 속에 남고 싶습니다. 제가 걷기를 참 좋아하는 사람임에는 틀림없습니다.


홀로 걷는다고 하니 한 친구는 걸으며 들으라고 음악을 보내주었습니다. 지방에 있는 고교 동창은 걷기를 응원한다며 반가운 목소리로 전화를 하며 창원에 걸으러 오라는 얘기도 했습니다. 오늘따라 반가운 사람들로부터 많은 연락이 왔습니다. 전철에서 걷기 동호회 회원을 만나 수다를 떨기도 했습니다. 친구들 모임인 단톡 방에서 서로 보고 싶다는 소식을 전해오기도 했습니다. 걷기를 시작할 때에 음악을 듣습니다. 한 시간 정도 음악을 들은 후에는 음악을 끄고 걷는데 집중합니다. 사진을 찍기도 하고 사람들의 다양한 모습을 보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은 울타리 안에 있는 개 한 마리와 대화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 사람이 뒤에서 따라오는데 괜히 신경이 곤두서기도 했습니다. 걷기 모임인 듯한 한 그룹의 사람들이 즐거운 수다를 떨며 걷고 있었습니다. 우리 동호회 회원들 생각이 나기도 합니다. 삼삼오오 벤치에 앉아서 준비해온 음식물을 먹으며 즐겁게 떠들고 있습니다. 보기 좋은 광경입니다.


길 정비와 표식이 잘 되어 있어서 길 찾기가 어렵지는 않았지만, 두 군데 공사로 인해 표식이 없어졌거나, 주차된 차로 인해 주황색 리본이 보이지 않아 어플을 이용해서 겨우 길을 찾아내기도 했습니다. 이제는 이런 일에 많이 익숙해졌습니다. 길 찾는 재미는 마치 어릴 적 소풍 가서 보물 찾기를 하는 재미와 같습니다. 길을 걸으며 중간중간에 스탬프를 찍는 재미도 걷는 재미 중 하나입니다. 산티아고 걸을 때에는 증명서 발급을 위해 무조건 찍어야만 된다는 생각을 가졌었는데, 서울 둘레길을 걸으며 스탬프 찍는 일은 보물 찾기와 같은 재미가 있어서 그 느낌이 다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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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재 시민의 숲에서 한 코스 더 걸을까 잠시 고민을 했습니다. 이미 걸은 거리가 약 10km. 3시간 조금 넘게 걸었습니다. 1시간 이상 걸어야 진출로가 나올 것 같습니다. 그곳에는 전철역이 없습니다. 이 길을 걷는 이유 중 하나는 동호회 회원들 이끌고 오는 것인데, 지하철 역에서 만나고 헤어지는 것이 그분들에게 편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저도 오늘은 그만 걷고 싶었습니다. 걸은 길이 너무 좋아서 그 길 느낌만으로 이미 충분한 보상을 받았습니다. 준비해 온 도시락을 천천히 먹으며 친구들 단톡 방에서 수다도 좀 떨고, 조금 쉬었다가 역으로 가서 걷기를 마쳤습니다.


집으로 오는 버스가 있어서 그 버스를 탔습니다. 강남과 한남대교, 종로 쪽을 운행하는 버스입니다. 그 길은 제가 사업할 때 많이 다녔던 길이었고, 고객사가 입주한 건물들이 많은 도로입니다. 예전에는 그 건물이 참 위압적이고 불편하게 느껴졌는데, 오늘 버스를 타고 바라보니 편안하고 오히려 초라하게 보였습니다. 갑과 을의 관계가 사라짐으로 인해 저절로 위축된 마음의 주름이 펴진 것입니다. 버스 안에서 그 건물들과 고객사와 고객들의 모습을 보고 생각하며 잠시 졸기도 했습니다. 그 졸음이 아주 편안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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