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고의 걷기 일기 0084]

냉장고가 고장 났어요

by 걷고

코스: 20200705 (집 – 월드컵공원 – 한강변 – 합정역 왕복 14km)

20200706 (집 – 문화비축기지 – 난지천 공원 – 집 8km)

누적거리: 1,270km

평균 속도: 4.2 km/h

기록 시작일: 2019년 11월 20일

“기질은 타고난 성향으로 변할 가능성이 희박하고, 성격은 후천적인 영향을 받은 것이기에 노력에 따라 변할 수 있다. 기질은 음식의 원재료에, 성격은 원재료를 보관하는 냉장고에 비유할 수 있다.” 얼마 전 받은 ‘기질 및 성격 검사 (TCI)’ 교육 시 임상 전문가가 말씀한 강의 내용이다. 오늘따라 그 말이 기억난다. 우리는 각자 자기 삶의 요리사다. 재료는 바꿀 수가 없으니, 주어진 재료에 적합한 선도를 유지하기 위해 요리사는 냉장고를 잘 관리해야만 한다. 그렇게 해야만 주어진 재료로 낼 수 있는 최상의 음식을 만들어 낼 수 있다. 원재료도 그다지 상급이 아닌 사람이 냉장고 관리를 잘못해서, 그 재료마저도 상하게 했다.

오늘은 손녀를 픽업하여 딸이 회사에서 돌아올 때까지 돌보는 날이다. 집에서 출발하면서부터 사소한 일로 아내에게 짜증을 부렸다. 아내가 딸네 집에서 청소하고, 빨래하고, 다림질하고, 쓰레기 버리는 등 할 일이 많아 잠시도 쉬지 못하는 모습을 보며 딸에게 화가 났다. 그렇다고 둘째 아이 임신한 몸으로 출근하고, 피곤한 몸으로 서둘러 퇴근하는 딸을 보고 화를 낼 수도 없다. 혼자 속으로 씩씩거리며 화를 억지로 가라앉혔다. 심기 불편한 나를 편안하게 하기 위해 아내는 애쓰고 있다. 그 모습도 보기 싫다. 오늘은 무슨 일을 하든 내 눈에 곱게 보이지 않는다.

집에 돌아오니 저녁 시간이다. 아내는 서둘러 메밀국수를 준비했다. 걷기 모임에 나가려 했는데, 시간이 늦어 참석할 수가 없다. 식사 후 홀로 걷기 위해 물 한 병 들고 집을 나섰다. 오늘은 걷기조차 귀찮았지만 걸어야만 할 것 같아서 걸었다. 그러지 않으면 집안에서 아내에게 괜한 심술만 부리고 있었을 것이다. 집을 나와 걸은 것은 아주 현명한 선택이었다. 집을 나서며 오늘 일을 복기해봤다. 별로 기억나는 것도 없다. 늘 있는 사소한 일에 예민하게 반응했던 것이다. 딸이 힘들 것 같아 집안일을 도와주는 아내의 마음이 곱고 아름다운데, 내 눈에는 밉게 보였다. 딸은 나와 아내를 위해 조금이라도 일찍 귀가하려고 서둘러왔다. 우리를 배려한 고마운 마음과 행동이다. 그런 딸도 곱게 보이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걸으며 곰곰이 생각해봤다.

시간을 낭비하고 있고, 본분인 상담심리사와 심신 힐링 컨설턴트의 모습을 잊어버리고 생활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마음이 불편했다. 본분에 맞는 일은 하지도 않고, 현실적인 문제에 매달려 있는 자신의 모습도 보기 싫었다. 멍하니 늦은 시간까지 TV를 보고, 늦잠을 자는 태도도 못마땅했다. 상담심리사로서 해야 할 공부도 하지 않고 시간만 죽이고 있는 자신이 싫었다. 많은 시간을 쓸데없는 일에 낭비하고 있는 자신에게 화가 났다. 시간이 많은 것이 오히려 독이 될 수 있다는 말이 생각난다. 시간을 무엇으로 채우느냐에 따라 삶이 결정된다.


그렇다. 코로나로 인해 외부 활동이 줄어들면서 혼자만의 시간이 넘쳐나는데, 그 시간을 낭비하고 쓸데없는 잡념과 허드렛일로 보내고 있는 자신에게 화가 났던 것이다. 나이 들어가면서 사용할 수 있는 시간과 에너지가 줄어들고 있다. 그래서 그 두 가지가 점점 더 소중해지고 있는데, 그 두 가지를 모두 허비하고 있는 자신이 보기 싫었던 것이다. TCI 강사의 말처럼 냉장고 관리를 잘 못해서 상급도 못 되는 재료 자체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시간과 에너지의 낭비는 냉장고 전원을 꺼버린 것이다. 전원을 켜기 위한 방법은 무엇일까? 내린 결론은 마음 챙김과 걷기다. 요 며칠 마음 챙김을 못하고 잡념에 빠져 살았다. 걷기는 꾸준히 해오고 있지만, 걸으면서도 잡념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했다. 잡념으로 쌓인 상태에서 걷는 것은 단순한 육체노동에 불과하다. 물론 하지 않는 것보다는 나을 수 있지만, 걸으면서도 마음 챙김을 놓치지 않아야 한다.

집에 돌아오니 아내가 TV를 보고 있다. 미안한 마음에 먼저 말을 걸고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척했다.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아내는 소파에서 TV를 보다 막 잠 들었다. 하루 종일 자신의 일에 충실했고 최선을 다한 사람만이 경험할 수 있는 꿀 잠을 자고 있다. 많은 일을 하고, 못된 남편 불편한 마음까지 돌보느라 많이 힘들었을 것이다. 미안하다. 이제 냉장고 전원을 켰으니 내일부터 신선한 재료가 기능을 잘 발휘하며 아내를 편안하게 만들어 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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