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바타

by 걷고

며칠 전 유명 MC 두 명이 진행하는 예능 프로그램에 어느 스님이 나왔다. 처음부터 시청한 것이 아니어서 스님에 대한 소개를 듣지 못해 법명이 무엇인지도 모른다. 한 가지 느꼈던 점은 매우 유쾌하고 활발한 스님이라는 점이다. 일반적으로 스님들이 갖고 있는 엄숙한 분위기나 수행자의 경건한 모습과는 많이 달랐지만, 오히려 그런 점이 편안하게 다가왔다. 형식을 버린 본질에 좀 더 가까운 느낌이 좋았다. 그 스님의 말씀 중에 기억에 남는 것이 있다. 아바타와 자신에 대한 구별을 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생각, 느낌, 행동, 감정은 아바타의 것이지, 우리 자신이 아니라는 말씀이 마음에 와 닿았다. 불교의 진리 중 하나인 ‘무아(無我)를 너무나 적절하고 이해하기 쉽게 표현했다는 생각이 든다.

아바타는 분신(分身), 화신 (化身)을 뜻하는 말로, 사이버 공간에서 사용자의 역할을 대신하는 애니메이션 캐릭터이다. 원래 아바타는 산스크리트 “아바따라(avataara)’에서 유래한 말이다. 신이 지상에 강림함 또는 지상에 강림한 신의 화신을 뜻한다. 고대 인도에선 땅으로 내려온 신의 화신을 지칭하는 말이었으나, 인터넷 시대가 열리면서 3차원이나 가상현실 게임 또는 웹에서의 채팅 등에서 자기 자신을 나타내는 그래픽 아이콘을 가리킨다. (네이버 지식 백과, 두산 백과)


스님은 두 MC에게 화가 나면 ‘내가 화나는 것’이 아니고, ‘내 아바타가 화가 났다’라고 알아차리라는 얘기를 했다. 어떤 상황이 발생하든, 어떤 사람을 만나든 일어나는 감정이나 생각은 모두 아바타의 것이라는 말씀이다. 나 자신이 아닌 아바타의 감정과 생각을 나와 동일시하지 않고 바라 볼 수만 있다면, 그 감정과 생각에 빠질 일이 없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나의 감정, 사고, 행동, 느낌을 자신과 동일시한다. 동시에 상대방이 나에 대한 표현, 비난이든 칭찬이든, 을 듣고 화를 내기도 하고 좋아하기도 한다. 두 개의 아바타가 서로 가상현실에서 울고 웃고 하는데, 그 아바타를 자신이라고 착각하고 같이 울고 웃고 있는 것이다. 아바타와 자신을 조금만 객관적인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다면, 그 모습이 아주 우습고 어리석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단지 두 개의 캐릭터가 주고받는 표현을 그 캐릭터의 주인들이 자신들에게 하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꼭두각시가 주인이 되고, 주인이 꼭두각시가 되는 것이다. 도둑이 집 안에서 주인 행세를 하고, 주인은 쫓겨나는 꼴이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그 늪, 아바타를 자신이라고 생각하고 느끼는, 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허우적거리며 점점 더 깊은 늪에 빠지게 된다. 마치 꿈속에서 일어난 일을 현실로 착각하는 것과 같은 현상이다. 가끔 꿈을 꾸다가 ‘이것이 꿈이지’ 하고 꿈속에서 알아차리면서 꿈에 깰 때가 있다. 그럴 때 안도감을 느낄 수 있다. 우리네 삶도 아바타를 자신이라고 생각하며 스스로 고통 속에 가두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아바타를 아바타라고 직시하기만 하며 울고 웃고 할 일도 없을 것이고, 그냥 옷의 먼지 털 듯 삶의 객진 번뇌를 훌훌 털어낼 수 있을 것이다.


아바타를 생각하다 삼국유사에 나오는 일화인 ‘조신의 꿈’이 떠올랐다. 스님 ‘조신’이 절에 찾아온 여인을 사모하여 그 여인과 인연이 되길 기도하다 잠에 들었다. 꿈속에서 그 여인과 한 평생 살면서 온갖 고생을 다하고 심지어는 자식들이 굶어 죽기도 한다. 곡기를 이어갈 수 조차 없는 힘든 상황에서 결국 자식을 나눠 키우기로 하며 헤어진다. 두 사람이 헤어지려는 순간 ‘조신’은 꿈에서 깨어난다. 아바타가 꿈속에서 조신의 역할을 하며 한 평생을 산 것이다. 그 아바타는 결코 조신이 아니다.


스님은 우리 자신은 아바타가 아니고 그 아바타를 바라보는 존재라고 했다. 아바타가 자신이 아니라는 사실 하나만 확실하게 볼 수 있고, 인식할 수만 있다면 세상의 고민거리는 사라질 것이다. 그 순간 고해는 바로 낙원이 되고, 지옥은 천당이 될 것이다. 불교 공부는 자기를 찾는 공부이고, 그 공부는 바로 무아를 체득하는 것이라고 들었다. 무아를 체득하게 되면 ‘참 자기’와 ‘아바타’를 구별할 수 있게 되고, 구별을 하게 되면 아바타의 희로애락에서 벗어날 수 있다. 결국 매 순간 깨어있어야만 가능한 일이다. 수행자가 열반 시 도반들이 화두를 들고 있냐고 묻는 이유는 바로 깨어있으라는 친절한 안내 말씀이다.


일상생활 속에서 삶에 허덕이며 살면서 늘 깨어있기는 결코 쉽지 않다. 가끔 느끼는 것 중 하나는 주어진 생명을 자연사할 때까지 이어가는 것이 참 어려운 일이라는 것이다. 몸은 노쇠하고, 병은 찾아오고, 할 일은 별로 없고, 만나는 사람들도 줄어들고, 입맛도 사라지고, 환경은 점점 더 거칠어지고 있는 세상을 살아가는 것은 버겁고 고된 일이다. 몸을 갖고 태어난 우리가 평생 안고 가야 할 숙명이기도 하다. 다만 몸을 갖고 태어났기에, 수행을 통해 생로병사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는 부처님 말씀을 믿고 열심히 수행하는 것 외에 다른 방도가 없다. 그 시작과 끝이 ‘깨어있기’다. 아바타에게 속지 않는 것이 ‘깨어있기’다. 정신 바짝 차리고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아바타가 속이려 할 때, 그 찰나 바로 알아차려야 아바타에게 끌려 다니지 않게 된다. 집중과 자각이 필요하다. 그런 면에서 아바타는 우리를 일깨우기 위해 나타난 고마운 존재다.


아바타에게 끌려 다니느냐, 아니면 아바타를 공부할 대상으로 알아차리느냐가 우리의 삶을 ‘아바타’의 삶으로 만들기도 하고 ‘참 자기’의 삶으로 만들기도 한다. 선택의 각자의 몫이다. 그러니 우리의 삶에 대해 어느 누구를 탓하거나 상황을 탓할 필요가 전혀 없다. 이 또한 좋은 일이다. 내 삶의 주도권을 온전히 내가 갖고 있다는 것은 선택할 여지가 있다는 것이고, 내 삶을 내가 만들어 갈 수 있다는 희망의 메시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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