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친구가 강원도 신림에 농막을 지어서 친구들과 함께 다녀왔다. 은행 지점장 출신으로 정년 퇴임을 한 후에 자신만의 공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만든 것이다. 약 30년 전쯤 가출을 감행했지만, 갈 곳이 없어서 명동을 서성거리다 백화점에 들려서 아이들 옷을 사서 돌아왔었다고 한다. 그때 집을 나서면 어딘가 갈 곳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그 이후 줄곧 자신만의 공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왔다. 그런 생각이 현실화되는데 30년 이상의 세월이 걸렸다.
그 친구는 매사 시작하면 확실하게 하고 사소한 일도 허투루 하는 것을 본 적이 없다. 지어놓은 농막에서 하루 종일 지내며 그 친구의 완벽함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다. 그 친구의 완벽함과 다른 친구의 미적 감각이 만들어 낸 아주 편안한 공간이다. 6평을 이층으로 꾸며서 실 평수 11평 공간으로 만들었고, 이층에는 명상실도 꾸며놓았다. 스피커와 블루투스를 연결하면 멋진 음악 감상실이 된다. 좁은 공간을 최대한 활용하여 수납공간도 많이 확보했다. 아주 효율적인 공간 활용과 기능이 돋보였다. 여기저기 멋진 사진 액자를 걸어 놓아서 마치 고급스러운 갤러리를 방문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그 농막을 ‘문향’이라고 명명했다. ‘문향’은 ‘향기를 귀로 듣다’라는 의미다. 일반적으로 향기를 코로 맡는데, 향기를 귀로 들으라고 한다. 마치 앉은뱅이한테 서서 걸으라고 얘기하고, 장님에게 세밀화를 보여주며 잘 들여다보라고 하는 격이다. 앞뒤가 맞지 않는 그 이름이 은근히 마음에 든다.
인도에서는 자식들 결혼시킨 후에 재산을 모두 정리하고 수행 생활을 하기 위해 홀로 집을 떠나는 관습이 있었다고 한다. 지금도 그런 관습이 남아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가정적으로 또 사회적으로 자신의 역할을 모두 마친 뒤에 수행을 하며 남은 생을 보내는 것이다. 우리나라에도 이런 관습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자주 해왔다. 우리는 일생 많은 일들을 겪으며 살아간다. 그 모든 시간과 역경을 극복하기 위해 자신이 받았던 상처도 많았을 것이고 남에게 상처도 많이 주었을 것이다. 자신의 역할을 마친 사람들은 역할로부터 자유롭게 지내며 자신의 상처를 위한 치유를 하고, 타인에게 주었던 상처에 대한 참회를 하며 살아갈 필요가 있다. 동시에 살아오며 잊고 살았던 자신을 찾기 위한 노력을 할 시간도 필요하다.
‘문향’은 그런 의미에서 아주 잘 지은 이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향기’는 ‘맡는 것’이지만, ‘듣는 것’이기도 하고, ‘느끼는 것’이기도 하고, ‘맛보는 것’이기도 하다. 코로 향기를 맡는 것이 아니고 귀로 듣고, 입으로 맛보고 피부로 느끼는 것이다. 좀 더 정확히 표현한다면 맡을 ‘향’도 없고, 맡고 듣고 느낄 감각기관도 없다. 감각 대상과 감각기관은 겉으로 보기에는 있지만, 존재하지 않는다. 죽은 사람의 귀에 대고 얘기를 한다고 해도 듣지 못한다. 죽은 사람의 코에 진한 향기를 뿜어내도 맡지 못한다. 죽은 사람의 귀와 코에는 소리도 향기도 존재하지 않는다. 분명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 몸의 감각기관이 존재하지만 우리가 죽으면 감각기관은 그대로 있지만, 아무것도 느끼고 듣고 맡을 수 없다.
결국 감각기관은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고, 감각 대상도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한 가지만 존재한다. 보고 듣고 느끼고 말하는 ‘그것’만이 존재한다. ‘그것’이 없다면 세상 모든 존재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음악은 존재하지만 생각에 빠진 사람에게는 존재하지 않는다. 결국 ‘그것’이 자각해야만 존재하게 된다. ‘그것’을 보거나 찾지 못하면 우리는 모두 꿈속에서 살고 있고, 도둑이 집주인 노릇을 하는 것이고, 주인이 종노릇을 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문향’은 단순한 이름이 아니다. ‘향기를 들으라’고 얘기하는 것이 아니고, 향기를 듣는 ‘그것’을 찾으라는 말이다. 화두!! 바로 그 자체다. 그 문을 통해 들어가고 나오면서 ‘참 자기’를 찾으라는 친절한 안내문이다. ‘입차문내 막존지해 (入此門內莫存知解)’라는 문구가 사찰 일주문에 쓰여있다. ‘이 문을 들어서는 사람은 알음알이를 내지 말아라’라는 뜻이다. 지금까지 알고 있었던 모든 것을 내려놓고 절 안에 들어오라는 말씀이다. 이 문구가 바로 ‘문향’이다. 또 어느 사찰의 법당은 문의 높이가 고개를 숙여야만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낮다고 한다. 머리를 숙여야만 들어갈 수 있다. 세상 모든 존재들에게 머리를 숙이는 것이 ‘문향’이다. 불교에서 참선 수행자가 평생 씨름하는 화두 ‘이 뭣고?’가 ‘문향’이다.
농부가 일하다 쉬는 공간이 농막이다. 우리 모두에게 그 농막은 마음을 쉬는 공간이다. 어디에 있든지 마음을 쉴 수 있으면 그곳이 바로 수행도량이지만, 그 마음을 얻을 때까지 마음을 모을 공간이 필요하다. 그래서 농막은 ‘문향’으로 명명된 수행도량이다. 문향에서 수행을 한 후에 사회에 나가 운수행각을 하며 수행을 점검하고, 다시 문향으로 돌아와 수행을 하게 될 것이다. ‘문향’에 들어가고 나갈 때마다 ‘문향’의 의미를 되새기며 마음을 여미길 기원한다. ‘문향’은 우리의 ‘숨터’이자 ‘놀이터’이며 ‘수행도량’이다. 30년 넘게 간직했던 수행 도량을 만들고 기꺼이 우리 모두에게 공유해준 친구에게 무한한 감사를 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