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크기
날짜와 거리: 20201207 - 20201209 22km
누적거리: 2,687km
기록 시작일: 2019년 11월 20일
어젯밤에 절두산 순교 성지 주변을 걷다가 우연히 바로 옆에 위치한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을 발견하게 되었다. 아무도 없는 묘지를 밤늦은 시간에 홀로 천천히 걸으며 무서울지 알았는데 오히려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경건한 분위기가 나를 차분하게 만들어 주었다. 어느 묘비에는 미국에서 이장되었다는 문구가 쓰여 있었다. 그분에게 고국은 어디일까? 왜 그분은 죽어서 한국 내 이곳에 묻히기를 희망했을까? 왜 외국인 선교사들은 기독교를 선교하기 위해 이곳까지 와서 목숨 걸고 선교활동을 했을까? 소명이 그들을 이렇게 만들었을까? 여러 질문들을 혼자 머릿속에 던지면서 혼자 내린 결론은 삶에 대한 확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하는 일에 목숨을 걸 정도로 확신에 찬 삶을 살았던 것이다.
조용히 참배를 홀로 마치고 나서며 나의 소명은 무엇인가 잠시 생각을 하기도 했다. 그릇 크기가 달랐다. 자신만을 생각하는 나와 타인을 위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과는 이미 그릇의 크기가 다르다. 종교인과 비종교인과의 차이도 아니며 수행자와 비수행자의 차이도 아니다. 아직 나의 삶은 마치 달팽이처럼 집을 등 위에 올린 상태에서 힘겹게 하루하루 버텨나가고 있다. 언제 이 집을 훌훌 털어버릴 수 있을지 아득하기만 하다.
묘원을 나서며 며칠 전 TV에서 노숙인을 위해 식사 대접을 하는 외국인 신부님 얼굴이 떠올랐다. 노숙인들이 줄 서 있는 곳으로 다가가 함께 일하는 봉사자 두 분과 함께 인사를 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세 말씀을 하셨는데, 다른 말씀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손으로 머리 위에 하트를 그리며 ‘사랑합니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선명하게 기억에 남아있다. 추운 겨울 새벽부터 나와 음식을 준비하고 이른 아침 5시부터 식사를 나눠주시며 미소 짓는 얼굴로 ‘사랑합니다’라고 말씀하시는 모습을 보며 저절로 머리가 숙여졌다. 그 신부님은 노숙인 분들에게 단순히 음식만 제공하는 것이 아니고 사랑을 나눠드리고 있었다. 요즘 코로나로 인해 노숙인의 숫자는 늘어나지만, 기부금과 자원봉사자는 줄어들고 있다고 걱정스럽게 말씀하시는 모습이 안타깝다.
세상은 점점 더 삭막해지고 있는데, 그 신부님은 이런 세상에 따뜻한 빛을 비추고 있다. 신부님을 보며 우리나라 종교계는 무엇을 하고 있는지 궁금해졌다. 물론 나름대로 사회봉사와 수행에 전념하리라고 믿고 싶지만, 어느 순간 각자 살기 바빠 중생들에게 베풀 힘을 잃어버린 것이 아닌가라는 의구심이 들기도 한다. 종교계도 코로나로 인해 경제적으로 힘들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신도나 신자들이 종교 시설 방문을 하지 않기에 수입이 줄어들어 힘들다는 얘기다. 허긴, 종교 탓을 할 필요도 없다. 나 역시 나보다 힘든 사람들에게 봉사를 하고 있지 않으니, 굳이 다른 사람과 종교를 탓할 명분도 없고, 그럴 자격 역시 없다.
어떻게 살아야 하나? 나의 소명은 무엇일까? 그릇 자체가 작아서 남을 포용할 만한 크기가 되지도 못한다. 그나마 스스로 위로를 한다면 ‘걷기를 통한 봉사’ 정도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다. ‘봉사’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조차도 부끄럽다. 나의 건강을 위해 걷기를 하는 데 길동무들과 함께 걷는 것이 ‘봉사’에 맞는 행동일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일단 시작을 하면서 조금씩 발전시켜 나갈 수는 있을 것이다. 신부님을 보며 부끄러운 마음을 이렇게라도 합리화시켜 나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다독이고 싶다.
자신만을 생각하는 사람의 크기는 ‘자신’을 넘어서지 못한다. 그 사람은 사회에서 뒤로 물러나는 순간 모든 사람들에게 잊히고 홀로 자신의 성에서 살아가며 외부와 벽을 더 높게 두껍게 쌓아가며 고립된 생활을 한다. 외부의 모든 사람과 상황이 마음이 들지 않아 불만투성이가 되고, 자신만이 옳다고 생각하며 주변 사람들과 쓸데없는 논쟁과 불화를 만든다. 반면 타인을 생각하며 함께 살아가는 사람의 크기는 생각하는 사람의 수와 비례한다. 주변에 늘 사람들이 많이 모이고 함께 울고 웃으며 살아간다. 자신의 성 안에 많은 사람들이 들어와서 성은 저절로 넓어지게 되고 더 많은 사람들이 들어올 수 있도록 벽을 허물게 된다. 나중에는 성 자체가 허물어지며 세상 자체가 성이 된다. ‘나’와 ‘너’의 경계는 허물어지고, ‘너와 나’라는 개념도 사라지고 ‘우리’라는 우리가 저절로 생성된다. 이런 사람에게는 세상이 그의 성이 된다. 동시에 그 성은 모든 사람의 성이 된다.
사람의 크기는 생각하는 크기만큼 변한다. 우리 모두 자신의 그릇을 키울 가능성을 갖고 있다. 생각을 넓고 크게 하면 된다. 어색하더라도 연습을 통해서 꾸준히 하다 보면 생각하는 대로 넓어질 수 있다. 물론 좁아질 수도 있다. 결과는 자신의 선택에 달려있다. 지금 자신의 세상이 좁다면 스스로 그런 선택을 한 것이다. 넓다면 스스로 그렇게 만든 것이다. 스스로 만든 것이기에 누군가를 탓하거나 세상 탓할 필요가 없다. 자신만의 소명을 찾고 그 일을 주변 사람들과 함께 나누며 살아가는 것, 이것이 어제 외국인 선교사 묘원을 걸으며 받았던 귀한 가르침이다. 묘원 앞에 크리스마스트리를 소박하게 만들어놨다. 작은 전등이 모여 불을 밝히며 세상을 따뜻하게 만들고 있다. 우리의 작은 마음이 세상을 밝히는 불씨가 되어 세상을 따뜻하게 밝혀주길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