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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고의 걷기 일기 0146]

맑은 샘물

by 걷고

날짜와 거리: 20201226 10km

코스: 집 – 불광천 – 경의선 숲길 – 홍제천 – 불광천 - 집

누적거리: 2,841km

기록 시작일: 2019년 11월 20일


토요일과 일요일에는 괜히 아무것도 하기 싫어집니다. 별로 할 일도 없는 매일이 같은 날임에도 주말은 더 아무것도 하기 싫고 귀찮기도 합니다. 게으름도 피우고 TV를 보며 소파 맨이 되어 보기도 하지만, 이 역시 그다지 편하지만은 않습니다. 매일 10km를 목표로 홀로 걷겠다고 걷기 동호회 카페에 글을 올렸기에 억지로 몸을 일으켜 밖으로 나갔습니다. 가끔은 이런 자의적 강제성이 제게 도움이 됩니다. 덕분에 10km를 즐겁게 걸을 수 있습니다. 일단 밖으로 나오면 되는데, 그것이 그렇게 어렵습니다. 작은 방에 좌복을 깔아놓고 명상을 할 수 있도록 만들었는데, 그 방 문턱을 넘는데 많은 세월이 걸렸습니다. 이제는 습관이 되어 아주 쉽게 하루에도 자주 넘어갑니다. 습관은 참 무서운 같습니다. 좋은 습관은 강화시키고 나쁜 습관은 약화시키는 연습을 평생 꾸준히 해야 하나 봅니다.


요즘은 글감이 잘 떠오르지 않습니다. 지금 준비하고 있는 책 원고가 마무리될 때까지는 쓰고 싶은 글도 많았고, 신문, TV, 사람들 얘기, 책 등을 보며 많은 글감이 떠올라 휴대전화에 저장을 하기도 했습니다. 지금 제 휴대전화에는 아무런 글감이 남아있지 않습니다. 요즘은 탈고된 원고와 출간 제안서를 준비해서 매일 두세 곳의 출판사에 보내고 있습니다. 어쩌면 원고 마무리하느라 조금 지쳤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간 온라인 강의도 했고, 상담도 꾸준히 해왔고, 자잘한 일들이 많았었는데, 지금은 코로나 여파와 연말이 다가오면서 모든 일이 마무리되는 시점입니다. 아마 글감도 스스로 마감을 하는 시점인가 봅니다.


며칠 전 TV를 보는데 한 연예인이 ‘연예인은 너무 안정되면 소재도 떨어지고 열심히 하지 않게 된다.’라는 말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그냥 넘어갔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그 말이 제게 다가옵니다. 아마 요즘 제가 많이 심신이 편해졌나 봅니다. 특별히 고민할 일도 없고, 신경 쓰이는 일도 없고, 만들어 놓은 생활계획표에 따라 알차게 하루하루 보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별로 생각하거나 고민한 일이 없습니다. 제가 글감이 없어진 이유를 이제 알 것 같습니다. 심신이 편안하고 안정되니 특별히 쓰고 싶은 글이 없어지고, 생각을 깊게 할 일도 없어져서입니다.


종교와 철학의 기반은 삶의 고통입니다. 삶이 괴롭기에 종교와 철학을 통해서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는 해결책을 찾기도 하고, 그런 과정을 통해서 성숙하고 발전합니다. 물론 삶의 괴로움에 압도되어 벗어나지 못한다면 이 또한 바람직한 일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의 괴로움은 우리 삶의 원천이 되기도 하고, 극복하는 과정을 통해서 삶의 진리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스트레스 연구 분야의 세계적 석학인 Seyle, Hans 박사는 “적당한 스트레스가 없으면 인간은 멸망하며, 어떤 사람으로부터 스트레스를 완전히 제거하면 그 사람은 무능해진다.”라고 했습니다. 삶의 고통은 우리를 힘들게 만들 수도 있지만, 동시에 우리에게 활력을 불어넣어 주기도 합니다. 그런 면에서 어쩌면 지금의 저는 안정으로 인해 약간의 무기력증에 빠진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샘물’이 떠올랐습니다. 제 안에 샘이 있습니다. 물이 고이면 퍼내어 사용했습니다. 어떤 때는 바닥이 다 보일 정도로 모두 써버리기도 했습니다. 그때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가만히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저절로 물이 조금씩 차오릅니다. 이 사실을 아는데 시간이 많이 걸렸습니다. 오늘에서야 지금까지 모아서 사용했던 물이 흙탕물이고 오염된 물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간 살아오면서 겪은 수많은 부정적 경험이 만든 오염된 물입니다. 아직도 찌꺼기는 남아있지만 그래도 오염된 물을 참 많이 쏟아냈습니다. 이제 차분히 기다리면서 맑은 물이 고이기를 기다릴 때입니다. 감사한 일입니다. 찌꺼기를 모두 없앨 수는 없지만, 맑은 물을 많이 모이면 저절로 희석이 될 것입니다.


누군가에게 인정받고 싶어 하고,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며, 타인의 기준에 맞춰 살아가는 삶은 이제 마쳤습니다. 제가 원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준비가 되었습니다. 굳이 서두를 필요도 없습니다. 연말이며, 코로나로 인해 강요된 사회적 거리두기는 저의 샘에 맑은 물이 고일 수 있는 아주 중요한 기회를 만들어 주었습니다. 앞으로는 맑은 물이 저를 이끌어 갈 것입니다. 감사한 마음으로 편안하게 주어진 휴식을 즐기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경의선.jpg 경의선 숲길 연남도 구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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