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상(無常)과 업(業)
날짜와 거리: 20210111-20210113 17km
코스: 일상생활
누적거리: 2,968km
기록 시작일: 2019년 11월 20일
모 단체 채용 면접 위원으로 다녀왔다. 집에서 일찍 출발해서 약속 장소에 도착하니 1시간 반 정도 시간이 남아있다. 점심 식사를 하기에도 시간이 애매했고, 아침식사를 평소보다 늦게 해서 시장기가 없다. 근처에 있는 수원 화성 행궁 광장으로 가서 어제 내린 눈이 제법 많이 남아있는 백설의 광장을 이리저리 걸었다. 몇몇 아이들이 엄마와 함께 나와 눈사람도 만들고 눈 위에 뒹굴면서 사진도 찍고 있다. 날씨가 푸근해져서 눈 놀이 하기에는 아주 좋은 날이다. 행궁 주변에 있는 나무들에 핀 눈꽃이 모두 녹아 보지 못한 것이 아쉽다. 직장인으로 보이는 네 명의 남녀는 서로 눈싸움을 하고 있다. 오랜만에 보는 눈싸움이 정겹다.
화성 행궁 입구에 가서 주변을 둘러보다 전혀 예상도 못한 “신풍 초등학교’ 간판을 보게 되었다. 지금은 폐교가 되어 남아있고 간판만이 그 학교 위치였음을 알려주고 있다. 고향이 수원인 나는 어릴 적 할아버지 집에 가기 위해 그 당시 ‘신풍 국민학교’를 지나가곤 했다. 우리 문중에서 학교 건립자금을 지원했다는 소문을 어릴 적 들었던 기억이 있다. 간판을 보면서 할아버지 집과 집성촌이 떠올랐다. 명절에는 너무 인사할 곳이 많아서 배가 늘 부른 상태에서 돌아다녔던 기억이 있다. 할아버지 집 앞에는 작은 개울가가 있었는데, 그 개울가에서 세수도 하고, 건너편에 있는 포도밭에 가서 포도를 따먹으며 놀았던 기억도 있다. 그 당시 할아버지 집 창고에는 엽전과 창(槍)들이 많았던 기억도 있다.
광장을 돌며 무상(無常)이 떠올랐다. 어릴 적 만났던 집성촌에 살고 있었던 분들 중 많은 분들은 이미 이 세상 사람들이 아니다. 남아 있는 분들도 모두 뿔뿔이 흩어져 살고 있고 남남처럼 연락도 없이 살아가고 있다. 할아버지께서 살고 계셨던 집도 지금은 없어졌고, 포도밭은 어떻게 변했는지도 모르겠다. 세월이 많은 것을 바꿔놓았다. 그 당시 어린 꼬마는 지금 60대 중반의 나이로 삶의 황혼기에 접어들고 있다. ‘신풍 국민학교’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기억에만 남아있다. 그럼에도 그 간판을 보는 순간 옛날 추억이 아련하게 떠오른다. 동시에 많은 것이 변했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권불십년(權不十年)이다. 권세도 10년을 넘기지 못한다. 세월에 장사도 버티지 못한다고 한다. 늙음을 막을 수는 없다. 아들이 할아버지가 되었고, 딸이 엄마가 되었다. 잘 살던 사람이 나락으로 떨어진 것도 보았고, 힘들게 살던 사람이 부유하게 사는 사람도 보았다. 어느 순간 돈도 명예도 필요 없고 건강이 가장 중요하다는 사람들도 보았다. 돈, 명예, 권력, 건강 모두 영원한 것이 없다. 잠시 머물렀다가 사라진다. 무상이다. 그런 무상함을 잘 알면서도 욕심을 내며 살아간다. 마치 죽기 위해 살아가고 있는 것 같다. 행복을 추구하면서도 불행하게 살고 있다. 욕심 때문이다.
세월이 자신을 포함한 주변의 모든 것들을 변하게 만든다. 어느 하나 단 한순간도 변하지 않는 것이 없다. 하지만, 단 한 가지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 바로 ‘업(業)’이다. 업은 자신이 말, 행동, 생각으로 만들어 낸 모든 것이다. 그 업은 반드시 업에 따른 결과를 받게 되어있다. 좋은 업에는 좋은 결과가 나오고, 나쁜 업에는 나쁜 결과가 기다리고 있다. 지극히 당연한 이치인데 우리는 가끔 이 중요한 이치를 잊고 살아간다. 업의 결과를 생각하지도 못한 채 욕심에 눈이 멀어 살아간다. 마치 날카로운 칼 위에 발라진 꿀을 혀로 핥고 있는 격이다. 꿀의 단맛에 빠져 죽음을 잊어버린다.
어제 면접을 마치고 동료 차를 얻어 타고 서울로 오는 길에 우연히 걷기 얘기를 하게 되었다. 그 친구에게 ‘걷고의 걷기 일기’를 쓰고 있다고 말하며, 이 일기는 평생 쓸 것이라고 했다. 이 일기는 나의 기록임과 동시에 우리 손주들에게 넘겨주고 싶은 나의 유산이다. 재산이나 다른 것은 남겨줄 것이 없더라도 일기는 기록으로 남아 손주들에게 전해지길 바란다. 그 일기는 나의 ‘업’이다. 나의 생각과 행동이 고스란히 기록되어 있다. 나의 ‘업’을 읽으며 손주들이 자신들의 업을 잘 지어가길 바란다. 그 ‘업’이 바로 그 ‘사람’이다. 면접을 마치고 나오는데 아이들이 만들어 놓았던 눈사람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역시 무상이다. 아이들은 집으로 돌아갔는지 보이지도 않는다. 광장의 눈도 거의 녹아서 바닥을 드러내고 있다. 무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