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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고의 걷기 일기 0158]

나를 설레게 하는 것들

by 걷고

날짜와 거리: 20210110 12km

코스: 집 – 불광천 – 한강변 – 노을공원 주변길 – 메타세콰이어길 – 문화비축기지 – 집

누적거리: 2,951km

기록 시작일: 2019년 11월 20일


점심 식사 이후에 햇빛을 맞으며 걸었다. 불광천에는 많은 사람들이 운동을 하고 있다. 건강하게 코로나를 극복하고 있는 모습이 보기 좋다. 한강변으로 갔던 이유 중 하나는 얼어있는 강을 보고 싶어서였다. 작년에 한강변에 정박 중인 작은 배를 묶어 놓은 줄에 고드름이 맺힌 것을 본 적이 있다. 그 모습이 아름다워 보였다. 이번에도 그 모습을 보고 싶었는데, 너무 추워서인지 주변이 온통 얼음으로 뭉쳐져 있어 그 모습을 볼 수 없어서 아쉬웠다. 노을공원 주변길을 걸으며 앞으로는 계단으로 노을공원을 오르며 하체 근력을 키우는 것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계단으로 오르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늘 피해왔었다. 힘들게 오르고 싶지 않은 안일함 때문이었다.

고드름.jpg 작년에 찍었던 배를 묶는 밧줄에 매달린 고드름

“이른 아침 산책의 기대로 마음이 설레어 잠에서 떨쳐 일어나지 않는다면, 첫 파랑새의 지저귐이 전율을 일으키지 않는다면, 눈치채라. 당신의 봄과 아침은 이미 지나가버렸음을.” (헨리 데이비드 소로)


매일 아침 지인이 좋은 글귀를 카톡으로 보내준다. 오늘 그 친구가 보내준 글이다. 이 글을 읽는 순간 정박한 배의 밧줄에 달린 고드름을 보지 못했던 어제의 아쉬움이 떠올랐다. 이런 사소한 설렘과 아쉬움이 좋다. 비록 그 고드름을 보지도 못했지만, 내 안에 그런 설렘이 있다는 것 자체가 고맙다. 요즘 길을 걸으며 새소리를 자주 듣게 된다. 작은 새들이 활기차게 날아다니는 모습과 지저귀는 소리는 활력을 불어넣어주고 귀를 맑게 씻어준다. 늘 걷는 길이기에 어디에서 새들이 놀고 있는지 알고 있어서 일부러 그 길을 찾아가기도 한다. 그리고 새소리를 들으며 잠시 멈춰 서기도 한다. 그런 한가로움과 자연의 소리가 마음을 열어주고 확장시켜준다.


소로의 글을 읽으며 무엇이 나를 설레게 하는가를 잠시 생각해 보았다. 제일 먼저 떠오른 것은 ‘길’이다. 가고 싶은 길을 가기 위해 준비하는 과정에서부터 설렘이 시작된다. 그 설렘의 클라이맥스는 출발 당일 배낭을 등에 메고 신발끈을 묶으며 출발 장소로 가는 그 시간이다. 그리고 계획했던 장소에 도착해서 걷기 시작하기 전에 설렘의 긴장감을 가장 강하게 느낀다. 걷는 시간에는 풍경에 마음을 뺏기고, 걸으며 자신과 대화를 하고, 길동무들과 떠드느라 설렘보다는 즐거움이 크다. 걷기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서 다음 길을 생각할 때도 가벼운 설렘이 있다.

길.jpg 한강 난지 생태 공원

보고 싶은 영화를 기다리고, 영화관에서 매표를 하고, 영화관 내의 영화 안내 팸플릿을 읽고, 자리에 앉아 영화 시작을 기다리고, 불이 꺼지면서 영화가 시작될 때 그 설렘이 가장 강하게 느껴진다. 영화를 보면서는 영화에 빠져서 설렘보다는 몰입하게 된다. 마치고 나오면서 영화 내용을 잠시 생각하고, 그 영화를 생각하며 글을 쓰는 순간에도 설렘이 있다. 영화를 좋아하기는 하나보다. 요즘은 영화관에 가지 않고, TV나 넷플렉스를 통해서 영화를 보기는 하는데, 영화를 기다리거나 영화관에 가는 설렘이 없어서 조금 아쉽다.


좋은 친구들과 만나기로 약속하고 약속 장소로 가는 순간에 설렘이 있다. 친구들 얼굴도 떠오르고, 전에 만났던 추억도 떠오르고, 친구들의 소중함도 느낄 수 있다. 만나서 맛있는 음식을 먹고 즐겁게 떠드는 순간에는 설렘보다는 즐거움이 있다. 모임을 마치고 돌아오면서 느끼는 아쉬움도 좋다. 지인의 집에 방문하거나, 가깝고 편안한 친척들이 우리 집에 오는 설렘도 있다. 식사와 와인을 준비하고 지인을 기다리는 설렘도 좋다. 함께 마시며 즐겁게 떠들고, 돌아갈 때 느끼는 아쉬움도 좋다. 최근에는 근처에 사는 처남 부부가 가끔 집에 와서 와인 한잔 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얼마 전에는 그 집에 초대받아서 재미있게 보냈던 추억도 있다.


가족들을 차에 태워 어딘가로 여행을 떠나기 위해 준비하는 설렘도 있다. 물론 자주 하지는 못했지만, 가족들이 한 차에 타고 내가 운전하면 마치 온 세상을 다 가진 주인공이 된 느낌도 든다. 아마 가장으로서 뭔가 큰 일을 하고 있다는 생각으로 순간 우쭐하는 기분을 느껴서 그렇게 되는 것 같다. 요즘은 아내와 함께 손녀를 어린이 집에서 픽업하기 위해 운전하는 설렘도 있다. 손녀를 만난다는 설렘이다. 손녀를 태우고 손녀가 외치는 ‘출발’이라는 소리를 들으면 세상 그런 큰 행복은 없다.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 남은 아쉬움은 설렘의 후 폭풍이다. 그런 후 폭풍은 맞을 만하다.


영화를 보거나, 길을 걷거나, 사람들을 만나거나, 책을 보거나, TV를 보거나 하면서 글감이 떠오를 때가 있다. 그 글감을 바로 표현하지 않고, 며칠 묵혀두면 글감이 스스로 숙성이 된다. 그 숙성된 글을 쓰기 위해 노트북을 켜는 순간 느껴지는 설렘도 있다. 숙성된 글은 별도로 정리하지 않고 그냥 떠오르는 대로 자판을 두드린다. 그리고 다시 읽으며 약간의 수정을 한다. 약 한 시간 정도 걸린다. 쓰는 것은 한 시간 정도이지만, 글감이 만들어지고 숙성되는데 걸리는 시간은 며칠이 될 수도 있고, 가끔은 한 달 정도 걸릴 때도 있다. 이런 숙성을 기다리는 시간을 통해서 기다림을 배우기도 한다.


아내와 같이 보는 TV 프로그램, 특히 ‘미스 트롯 2’를 소파에 앉아서 기다리는 시간에도 설렘이 있다. 아내와 나는 취향이 달라서 서로 보는 프로그램이 다르지만, 몇몇 프로그램만은 함께 본다. 함께 보는 프로그램을 기다리는 설렘이 우리 부부에게 주는 큰 행복이다. 이 외에도 곰곰이 생각하면 설레는 순간들이 더 많이 있을 것이다. 글을 쓰며 생각해 보니, 설렘은 바로 행복과 직결된다. 사소한 설렘이 삶에 행복을 가져다준다. ‘행복은 강도가 아니라 빈도’라고 어느 행복 심리학자가 얘기했던 기억이 난다. 일상의 사소한 설렘이 많을수록 우리는 그만큼 행복해질 수 있다. 그런 면에서 나는 매우 행복한 사람이다.

배.jpg 얼어붙은 한강과 선박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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