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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고의 걷기 일기 0157]

자신을 규정하는 것

by 걷고

날짜와 거리: 20210109 14km

코스: 집 – 불광천 – 문화비축기지 – 난지천 공원 – 난지생태길 – 노을공원 – 집

누적거리: 2,939km

기록 시작일: 2019년 11월 20일


이틀 연속 강추위가 계속되고 있다. 앞으로 며칠간 계속 추울 예정이라고 한다. 오랜만에 만난 강추위는 한강도 얼렸다. 추위 속에서도 우리는 각자 할 일을 한다. 오늘 내가 할 일은 걷고 글 쓰는 것 외에 특별한 일이 없다. 시간은 많고 별 달리 할 일도 없는 사람으로서 걷기와 글쓰기라는 좋은 취미를 갖고 있어서 좋다. 이런 취미마저 없었다면 하루하루를 지루하게 보내고 있을 것이다. 요즘 길을 걸으며 가능하면 사람들이 잘 다니지 않는 길을 택해서 걷는다. 그럼에도 앞에서 사람들 모습이 보이면 좀 더 거리를 유지하기 위해 일부러 건너편으로 건너가서 걷기도 한다. 서로를 보호하기 위한 행동이다. 노을공원을 걸었다. 노을공원 내 캠핑장에는 사람이 없어서 제법 넓은 평원을 마음껏 걷고 남아있는 눈 위에 족적을 남겨 놓기도 했다. 마치 어린애가 된 느낌이 들었다.

평원.jpg

마스크를 쓰고 걸으면 안경에 김이 서린다. 강추위로 안경에 서린 김은 금방 얼어서 살얼음이 된다. 그렇다고 마스크를 쓰지 않고 걸을 수도 없는 상황이다, 가능하면 인적이 드문 곳을 골라서 마스크를 안 쓰고 걷고 있다. 앞에서 사람들 모습이 보이면 마스크를 다시 쓰고 거리를 유지하기 위해 우회하거나 간격을 더 멀리 유지하며 걷는다. 넥워머를 하고 다니기에 피할 수 없는 상황에서는 넥워머를 올려서 입과 코를 가리고 가능한 한 멀리 떨어져 걷는다. 상대방도 마스트를 쓰지 않고 오다가 나를 발견하고는 잠시 멈춰서 마스크를 쓰고 걸어온다. 그런 분들의 마음이 고맙다. 타인을 위해 마스크를 쓰는 코로나 시대의 새로운 에티켓이 생긴 것이다.


가끔 지인들은 내게 뭐가 그리 바쁘고 할 일이 많으냐고 질문을 한다. 그들은 내가 하는 일의 가짓수도 많고, 매일 일정이 다르기도 하고, 새로운 시도를 꾸준히 하고 있다고 한다. 그분들에 대한 나의 답변은 늘 같다. “특별히 할 일도 없어서 놀 거리, 할 거리를 만들고, 그 일들을 하면서 하루하루 살고 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하루가 너무 지루하다. 지루하게 살지 않고 또 무기력하게 되지 않으려고 그냥 하루하루 살고 있을 뿐이다.” 무엇을 성취하거나 어떤 꿈을 이루고 싶다는 생각보다는, 그냥 하루를 즐겁게 그리고 활기차게 보내고 싶다.


오전 일정은 나름 루틴이 만들어져 있다. 명상, 신문 읽기, 글쓰기, 상담 전공 공부를 하면 오전 시간이 끝난다. 점심 식사 이후에 두세 시간 걷고, 씻고 나면 저녁 시간이 된다. 저녁 식사 후 TV나 영화를 보면 하루가 끝난다. 아내와 둘이 같이 있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대화도 예전보다 더 많아졌다. 딸과 손녀를 보기 위해 운전을 하기도 한다. 그렇게 살다 보면 일주일이 금방 지나간다.


요즘은 사람들을 만날 일이 거의 없다. 사회적 거리 두기로 인해 저절로 홀로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홀로 있는 시간이 편한 나에게 주어진 꿀 같은 휴식의 시간이다. 또 혼자 지내는 것에 익숙한 편이라서 전혀 불편하지 않다. 가끔 친구들과 술 한잔 하고 싶은 마음도 올라오지만, 집에서 저녁 식사를 하며 와인 한두 잔 마시면 그런 갈증은 금방 해결된다. 아내와 같이 있으면서도 서로의 생활을 존중하는 편이다. 서로를 의식하지 않고 자유롭게 각자 할 일을 하고 있다. 서로 부딪칠 일이 거의 없다.


책이나 신문을 보면서 좋은 문장이 있으면 휴대전화로 찍어서 보관하는 습관이 생겼다. 휴대전화에 저장된 내용 중 이런 글이 들어있다. “사람이 어떤 일에 노력을 들이면, 그 일이 거꾸로 그에게 노력을 들여서 그 사람을 규정한다.” (프레드릭 더글러스, 미국의 노예 해방론자, ‘에고라는 적’) 맞는 말이다. 지금 하고 있는 일을 오랜 기간 지속적으로 하면, 그 일 자체가 우리의 정체성을 만들어준다.


나는 어떤 사람인가? 아직 잘 모르겠다. 아침에 하는 일과는 명상 1시간 30분, 글쓰기 1시간 30분, 그리고 상담 전공 공부와 신문 읽는 것이다. 상담이 있는 날에는 센터에 가서 상담을 진행한다. 오후나 저녁 시간에 주 3, 4회 두세 시간 정도 걷는다. 저녁 시간에 별 할 일이 없으면 TV나 영화를 보거나 책을 읽는다. 이런 행동이 지속된다면 나는 명상가, 작가, 상담심리사, 걷기를 좋아하는 사람으로 규정될 수 있다. 오랜 기간 평생 할 일을 찾아 헤맸고, 그 일을 찾았다. 상담, 걷기, 명상을 접목한 심신치유 프로그램을 기획 및 운영하며 사람들의 심신 고통을 조금이나마 치유하는 삶을 사는 것이다.


다행스럽게 요즘 하고 있는 행동과 살고 싶어 하는 모습이 거의 일치하고 있다. 물론 혼자 루틴의 삶을 사는 것과 타인과 함께 살아가는 것과의 차이가 있다. 이 격차를 줄여나가는 것이 남은 숙제가 될 것이다. 잘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한 가지 확실하게 알 수 있는 것이 있다. 바로 이런 숙제가 나의 삶에 활력을 만들어 준다는 것이다. 그리고 숙제를 위해 꾸준히 노력하면 어느새 ‘심신치유 컨설턴트’라고 규정될 날이 올 것이다. 결국 나는 ‘심신치유 컨설턴트’이다. 최근에 신문을 읽다가 찍어서 보관한 시(詩)가 있다.


기대지 않고


더 이상 기성 사상에는 기대고 싶지 않다

더 이상 기성 종교에는 기대고 싶지 않다

더 이상 기성 학문에는 기대고 싶지 않다

더 이상 어떤 권위에도 기대고 싶지 않다

오랜 살면서 마음속 깊이 배운 건 그 정도

자신의 눈과 귀 자신의 두 다리로만 서 있으면서

그 어떤 불편함이 있으랴

기댄다면 그건 의자 등받이뿐

- 이바라기 노리코 (1926-2006)

(성혜경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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