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미스터 트롯과 비우기

by 걷고

지난 3개월간 매주 목요일에 방영되는 ‘미스터 트롯’ 시청을 위해 손녀를 재우는 작업을 먼저 해야만 했다. 그 작업은 딸아이의 몫이 되었고, 아이를 재우다 딸아이도 같이 잠에 빠져 들기도 했다. 아내는 같이 시청하다 먼저 잠들고, 결국 나 혼자 TV 앞을 지키며 어느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아주 편안하게 시청할 수 있었다. 그 덕분에 집중해서 노래를 들을 수 있었고, 가끔 노래를 들으며 혼자 눈물을 훔치기도 했다. 지난 3개월은 이 프로그램 덕분에 목요일을 기다렸고 행복했다. 다음 날 신문에 난 기사를 읽으며 감동을 되살리기도 했다.


작년에 ‘미스 트롯’을 시청하며 트롯의 매력에 빠져들게 되었고, 올해는 ‘미스터 트롯’을 보고 더욱 깊게 빠져들게 되었다. 정확하게 얘기하면 트롯에 빠졌다기보다는, 참가자들이 노래에 녹여내는 험난한 인생 역정의 처절함과 그런 삶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간절함에 빠져들었다. 현역 트롯 가수, 아이돌 출신 가수, 트롯 신동, 그 외에 트롯을 통해 인생을 역전시키고 싶어 하는 분들의 힘들었던 얘기를 시청하며 가슴이 먹먹해지고 눈물이 나기도 했다.


부처는 삶을 고통의 바다, 고해 (苦海)라 했다. 삶이 그만큼 힘들다는 말씀이다. 한 평생 살아간다는 것이 결코 녹녹하지 않다는 것을 나이가 들어가면서 점점 더 느끼게 된다. 그런 과정을 통해 우리는 성장하고 성숙해간다. 또한 겸손을 배우게 되고, 모든 생명과 존재에 대한 연민의 감정을 느끼기도 하고, 서로에 대한 존중과 배려도 배울 수 있게 된다. 고통을 겪어 본 사람들만이 다른 사람들의 고통을 공감할 수 있다.


이번 ‘미스터 트롯’ 참가자들이 가장 멋지게 보였던 순간도 경쟁자임에도 서로 아끼고 배려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을 때이다. 자신이 정상에 오르기 위해 누군가를 질투하거나 시기하지 않고, 서로 도움과 격려를 아끼지 않는 모습이 너무 보기 좋았다. 아마 참가자들은 국내 여러 무대를 통해 서로에 대해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열악한 환경에 처한 상황을 너무 잘 알기에 정보도 주고받고, 의지도 하고, 격려와 도움을 주며 살아왔을 것이다. 이번 무대를 통해서 자신의 얼굴과 이름을 알리고 싶어 하는 참가자들도 있고, 장르를 바꿔서라도 가수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고 싶어 하는 참가자도 있다. 그런 간절함에서 나온 노력 덕분에 멋진 노래를 감상할 수 있었고, 얼굴 없는 가수들을 알게 되었다. 그런 면에서 이미 모든 참가자들은 원하는 것을 모두 얻었다고 할 수 있다.


어제 결승전을 시청했다. 일곱 명의 결승 참가자의 노래를 들으며 여러 번 눈시울을 붉혔다. 자신들의 삶을 노래로 한풀이 하듯 풀어내고 있었다. 혼신의 힘을 쏟아내며 가슴속 깊이 박혀있던 가시를 뽑아내기도 했고, 응어리를 토해내기도 했다. 그 가시와 응어리는 평생 그들의 삶을 괴롭혔던 굴레이다. 노래를 통해서 자신의 과거를 비워낸 그들은 이미 프로그램 이전의 그들이 아니다. 비워야만 채울 수 있다. 과거의 슬픔, 가난, 비참함, 억울함을 비워내고, 그 자리에 기쁨, 행복, 평안함으로 채워나가고 있었다. 비록 처한 환경과 상황이 쉽게 변하지 않더라도 이미 내면의 변화로 같은 상황을 다른 시각으로 볼 수 있게 되었을 것이다.


노래를 통해 자신의 고통스러웠던 과거를 비워내고 있는 모습을 보며 ‘비움’의 중요성을 느끼고 배울 수 있었다. 부정적인 마음의 샘은 비워냄으로써 긍정적이고 희망이 넘치는 샘물로 채울 수 있다. 하지만 비워내는 작업은 결코 쉽지만은 않다. 비워내고 싶어도 못 비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비우는 방법을 모르는 사람도 있고, 비웠다고 착각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뭘 비워야 하는지도 모른 채 살아가고 있다. 비움을 위해서는 철저한 자기 성찰이 있어야만 한다. 또한 비움을 위한 끊임없는 노력과 좌절을 겪어내야만 한다. 비움은 결코 한 번에 손쉽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비운다’는 생각만 하며 그 ‘비운다는 생각’으로 채우기도 한다. 모래 위에 집을 짓고, 다시 그 위에 집을 쌓고 있는 어리석음을 반복하는 것이다.


코로나 19로 인해 한가한 날들을 보내고 있다. 그런 한가로움 속에서도 ‘한가함’을 여유롭게 즐기기보다는 뭔가를 채우려 아등바등 애쓰는 나의 모습이 안타깝게 느껴진다. 어제 결승전에서 노래를 통해서 온 몸과 마음을 쥐어짜며 자신들을 괴롭혔던 응어리를 비워내는 모습을 보며 나도 비워내고 싶었다. 아침에 일어나 책상 위를 정리했다. 책들과 독서카드, 메모지 등으로 산만하게 어지럽혀 있는 책상을 정리했다. 보고 있던 책들도 모두 서가로 옮겼고, 메모지도 모두 치웠다. 책상 위를 비우니 마음이 한결 한가롭다.


뭔가를 계획하지 않고, 주어진 하루를 비움으로써 충만하게 살고 싶다. ‘미스터 트롯’의 참가자들이 노래를 통해 과거의 자신을 비움으로써 새로운 자신을 채우듯이, 나 역시 비움으로써 기존의 습관에서 탈피하여 매 순간 온전히 살고 싶다. 법정스님께서 말씀하셨던 ‘텅 빈 충만’의 삶을 살고 싶다. ‘미스터 트롯’에게 받은 귀한 선물이다. (2020년 3월 14일)

책상.bmp


keyword
이전 05화낙이망우 (樂以忘憂)