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에서 평생 근무하다 2년 전에 정년퇴임 한 도니님은 산티아고에서 만난 길동무다. 음악과 사진에 대한 열정으로 인해 한때는 회사 생활에 대한 회의가 들어 힘들었던 경우도 있었다. ‘하고 싶은 일’과 ‘해야만 하는 일’ 간의 갈등 속에서 심각하게 퇴사를 고민해 보기도 했다. 하지만 가장으로서 책임이 최우선이라 생각하고 열정을 잠시 접어두며 업무에 집중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런 노력 덕분에 임원으로 승진하여 만족할만한 회사생활을 할 수 있었다.
그는 회사 생활을 하면서도 자신의 꿈을 단 한순간도 포기하지 않고, 주말이나 퇴근 후 시간을 이용해 사진과 음악 작업을 꾸준히 해왔다. 사진과 음악은 퇴임 이후 그의 삶을 풍요롭게 만들어주고 있다. 집안에 꾸며놓은 자가 암실과 수천 장의 음악 CD와 진공관 스피커가 설치되어 있는 오디오 룸은 그만의 유일한 휴식 공간이며 치유 공간이다. 직장 생활을 하면서도 천천히 그리고 꾸준히 인생 3막을 준비해 온 그는 요즘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가끔 전화를 하면 해파랑길을 걷거나 지리산 둘레길을 걷고 있다고 하며 사진을 보내왔다. 홀로 일주일 정도 길을 걸으며 사진도 찍고, 음악도 들으며 하루하루 행복하고 충만한 삶을 살고 있다.
인생은 3막으로 구성되어 있다. 1막은 태어나서 결혼하기까지의 삶이고, 2막은 결혼하여 가정을 이루고 사회생활하며 아이들 결혼할 때까지의 삶이다. 1막은 부모님, 형제, 선생님과 친구들 덕분에 만들어진 삶이다. 2막은 홀로 서는 시기로 가정을 이루고 가장으로 충실하게 살아가는 삶이다. 누군가의 아내나 남편으로, 엄마나 아빠로, 자식과 며느리나 사위로 여러 가지 가면을 쓰고 살아간다. 인생 3막은 가정적으로 또 사회적으로 해야만 하는 책임과 의무를 마친 후 죽을 때까지 살아가는 온전히 자신만의 삶이다. 마음은 평온하게, 몸은 끊임없이 움직이며 편안하고 즐겁고 활기찬 인생 3막을 살아가고 싶다.
롤 모델인 김형석 교수는 늙지 않고 사는 방법 세 가지를 제시했다. 일, 사랑, 그리고 여행이다. 프로이트는 인간에게 꼭 필요한 것이 일과 사랑이라고 했다. 두 분의 말씀 중 두 가지가 일치한다. 일과 사랑이다. 50대 중반에 상담 공부를 하기 위해 대학원에 입학한 것은 평생 할 일을 찾기 위한 방편이었다. 상담심리사 자격증 취득 후 지금은 상담심리사로 활동하고 있다. 늦은 나이에 독서와 글 쓰는 즐거움에 빠지게 되었고, 이런 일들이 이제는 일상이 되었다. 혼자 놀기에 이보다 좋은 일이 없다. 도서관이나 커피숍에 앉아 책을 일고 글 쓰는 것은 매우 즐거운 놀 거리이다.
걷기도 중요한 취미이자 일이다. 걷기를 통해 심신 건강을 유지하며 가능하면 죽을 때까지 타인에게 몸을 의탁하지 않고 맑은 정신으로 살고 싶다. 오래 잘 걸을 수 있는 재능이 있다는 사실을 최근에야 알게 되었다. 재능은 소명이자 태어난 이유이고, 할 일이며, 존재의 이유이다. 걷기 학교를 만들어서 걷기와 명상, 상담을 접목한 프로그램을 운영하며 심신이 힘들 분들에게 도움 되는 일을 하고 싶다. 걷기라는 취미가 일이 되고, 일이 봉사가 되는 즐거운 놀 거리이다.
사랑은 베푸는 것이다. 나와 너의 벽을 허무는 일이다. 나의 즐거움이 그대의 행복이 되고, 그대의 괴로움이 나의 고통이 되는 것이다. 가족 간의 사랑도 있고, 친구들과의 사랑과 우정도 있고, 모든 존재의 안녕을 위한 사랑도 있다. 사랑은 주는 것이 아니고 자연스럽게 다른 존재들에게 넘쳐흐르는 것이다. 매일 아침 명상 후 자애 명상을 20분 정도 한다. 억지로라도 사랑하는 마음을 육성하기 위한 방편이다. 사랑이 가득하여 자신과 모든 존재를 사랑하며 살고 싶다.
여행은 답답한 일상에서 벗어나 숨 쉴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활력을 불어넣어준다. 자연이나 이색적인 풍경을 즐기며 사진도 찍고 한가한 여유를 누릴 수 있다. 각 지방이나 나라의 음식과 문화를 맛볼 수도 있다. 또한 다양한 사람들과 교류를 통해서 사고의 틀을 확장시킬 수도 있다. 여행하면 일반적으로 해외여행을 생각하기도 하지만, 내게는 걷기 여행이 있다. 길을 걸으며 온몸으로 길, 자연, 사람, 음식, 문화를 경험할 수 있고 자신과 대화를 통한 성찰도 할 수 있다.
걸을 길이 넘쳐난다. 서울에만 서울 둘레길, 북한산 둘레길 외에도 많은 길이 있고, 각 지방마다 조성된 걷기 좋은 길도 있다. 코리아 둘레길은 한반도 동서남북을 연결하는 길로 해파랑길, 남파랑 길, 서해안 길, 평화 누리길로 구성되어 있다. 약 4,500km에 달하는 길로 조성된 곳도 있고 준비 중인 곳도 있다. 조선 왕릉길 600km도 지금 조성 중에 있다. 앞으로도 이런 길은 계속 조성될 것이다. 이 길을 구석구석 혼자 또는 길동무, 걷기 학교 참가자들과 함께 걷고 싶다. 걷기는 여행이자 할 일이며 놀 거리이다.
일, 여행, 사랑 외에 한 가지 더 하고 싶은 일이 있다. 명상이다. 하루라도 명상을 하지 않으면 마음이 거칠어진 것을 느낄 수 있다. 마음 밭에 잡초가 가득 들어선 것이다. 사찰에서는 아침마다 빗자루로 마당 청소를 하기도 하고, 때로는 잡초를 뽑기도 한다. 마당을 청소하며 자신의 마음 밭을 청소하는 것이다. 마음이라는 마당은 누구나 갖고 있다. 다만 그 마당을 잡초로 채울 것인지, 향기 가득한 꽃으로 채울 것인지 선택과 결정권은 각자 자신에게 있다. 인생 3막은 명상을 통한 깨끗한 마당 위에 사랑, 걷기, 심리상담, 글쓰기 등으로 채울 수 있으면 좋겠다.